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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2/1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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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2023년 2월 16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9,1-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 오늘 복음
    (마르코 8,27-33)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2월 16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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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
마르코 8장 27-33절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16일 (목)
마호성 아브라함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3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16일 (목)
진슬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12:21

📌 강론시작 21:05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16일 (목)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3

📌 강론시작 07:2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삶

 

오늘 복음도 변함없이 우리를 믿음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이를 위하여 복음서는 매우 강한 대비의 구조를 두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닫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하느님의 계획에 반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며 사람들 손에 죽임당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노아가 모든 것이 파괴된 땅에서 이제 막 드러난 마른땅과 마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라.’는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신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며 사람의 피가 땅에 흘러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계획에 순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며 하느님 말씀 안에서 모든 순간을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가 말하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과 아벨의 피와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구덩이에 버려진 요셉과 구약의 많은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살아간 의인들의 죽음을 보셨고, 외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히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께 빛을 받아 옳게 시작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만 어느 순간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의 충동에 따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려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만 찾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삶을 살아갑시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7).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는 마흔네 살에 죽었다. 너무나 젊은 나이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담긴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그 사랑하는 연인은 병으로 하늘나라에 가신 분으로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애틋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이 구절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군요. 
 
“너는 마흔네 살에 죽었다. 너무나 젊은 나이다. 그러나 네가 천 살을 살았다 해도 나는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통계청 2022년 5월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평균 83.4세입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많은 나이에 사망해야 늙은 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사랑하는 사람을 행해서는 나이가 의미 없습니다. 제 부모님 모두 아흔을 넘어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너무 일찍 하늘나라에 가신 것만 같습니다. 이 세상의 이별 앞에서 나이의 의미는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많은 아쉬움과 후회 속에서 그 미안함을 지금 당장 풀어낼 수 없음이 커다란 상실감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존재가 너무나 고마울 수밖에 없습니다.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의 해방을 ‘죽음’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당신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새로운 나라로 나아간다는 것을 당신의 부활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쉬움과 후회. 그러나 그보다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만남, 그리고 무엇보다 죄가 없는 하느님 나라에서 기쁨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더 열심히 지금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라고 물으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한다고 대답하지요. 

이렇게 대답할 때, 제자들은 상당히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에 대한 정확한 신원을 이야기한 것을 듣고는 숨겨져 있었던 하늘나라의 비밀을 말씀해주십니다. 당신이 수난과 죽음을 겪게 된다는 것, 그리고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답을 이야기했던 베드로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반박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꾸짖으십니다. 아쉬움과 후회의 순간을 받아들이지 않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보다 바라봐야 하는 것은 부활로 이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살면서 많은 아쉬움과 후회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일을 봐야 했습니다. 그 하느님의 일 안에서 우리는 커다란 희망을 얻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한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를 믿고 사랑해 준 사람들의 열매다.

- 김나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피 흘림 없이 내 이름 부르는 이가 사탄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 누군가는 그 사람 때문에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 누군가가 그 이름을 불러주며 그 이름에 자기 피를 섞었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시가 이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누구를 알아준다고 해서 다 그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까요? 오늘 예수님은 당신을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러주며 자기 피를 흘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피를 흘릴 마음이 없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사탄입니다. 그 사람에게 정체성이나 자존감을 심어주기 위함이 아닌 그 사람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러주는 이름에 합당한 피를 흘립니다. 백종원 씨는 자신이 가르쳐 준 대로 하지도 않고 백종원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칩니다. 

“거짓으로 내 이름 팔지 마!”

우리도 그리스도 때문에 변할 마음이 없으며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면 거짓으로 그분의 이름을 파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술집 여자가 “사장님!” 하며 술을 팔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사장님은 그 여인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아닌 돈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아닌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을 바라며 당신 이름을 부르며 오는 이들을 거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나의 무엇을 내어주는지 묵상해봅시다. 관계 자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그 이름을 부른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보니 어떤 아들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장가도 포기하고 막일을 하며 4년이나 어머니를 업고 다닙니다. 공사장에서 일하랴 어머니 챙기랴 바쁩니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어떤 유튜브는 자신이 좋아하게 된 여자가 헬스로 몸을 만드는 여인이기에 자신도 그 여자처럼 몸을 변화시키기로 합니다. 1년 동안 고생한 끝에 엄청난 몸짱이 되어 자신이 여신처럼 바라던 그 여인을 만나 꽃다발을 안겨줍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누군가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나의 피 흘림이 절대적입니다. 내가 지는 십자가 없이 부르는 하느님의 이름이 하느님을 헛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부르는 대상의 이름을 항상 나의 피를 섞어 그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악마적인 사람의 일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존재가 사탄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고 사람의 일은 생각지 않는 사람은 천사이고 사탄이 아닐까요? 

제가 감히 말하건대 아무리 하느님 일을 생각한다고 해도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사탄의 짓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사랑 실천이고, 하느님 자녀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 하느님만 생각하는 사람 상당수가 영적 이기주의자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의 고통에 무감하여 성체조배만 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선 기도해줄 줄도 모르고, 사랑 실천은 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자기의 마음 평안만을 위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마적인 사람의 일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가로막는 사람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가로막는 사람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요? 

- 하느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행위 곧 신앙인으로서 저지르는 악행 

-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선행을 하지만 그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빛내는 행위 

- 사랑도 하느님 사랑이 빠져있는 인간적인 사랑이나 애착 

- 하느님의 일인데 정작 하느님 없이 자기 힘으로 하거나 인간끼리 도모하는 것 

- 하느님 사업에 헌신하려는 것을 인간적인 사랑 때문에 반대하는 것 

그렇습니다. 저의 경우 악마는 선으로 포장하고 오고 사랑의 얼굴을 하고 옵니다. 그리고 이젠 너의 선이든 나의 사랑이든 그것이 악마적이란 걸 식별할 줄 압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주님처럼 호통치며 물리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저를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정신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마음을 놓치면 사람의 길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이 우리의 교만을 꺾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으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수난이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수난이 만들어놓은 길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 영혼을 지탱하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고통 중의 고통은 하느님의 고통입니다. 하느님의 수난이 빚어 만들어내는 사랑의 위대한 힘입니다. 고통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늘을 보게 됩니다.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느님께서는 수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십니다. 수난의 선물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우리가 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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