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2023년 2월 15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8,6-13.20-22)
노아가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8,22-26)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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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복음
마르코 8장 22-26절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15일 (수)
김민휘 요한 세례자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3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15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3:43
📌 강론시작 12:01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15일 (수)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9
📌 강론시작 07:14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나와야 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떤 눈먼 이의 치유는 어제 복음에서 볼 수 있었던 제자들의 소경성을(마르 8,16-17 참조)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자주 눈의 상징을 활용합니다. 우리가 후회되는 일을 하고는 “내가 그때 눈이 멀었었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인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자신의 인생사를 보려 하지 않는 것은 구원에 큰 장애가 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세례 받은 사람을 ‘빛을 받은 이’로 불렀습니다.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뎌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히브 10,32).
또 신앙의 눈으로 올바로 보는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이 세상을 살아가며 좋다고 하는 것들 사이에서 참으로 값진 보물을 구별해 내기는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속이고 기만하는 것을 만나 세상살이가 두렵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눈처럼 겉모습 너머를 보는 눈, 참생명을 위하여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선택은 늘 눈에서, 곧 욕망으로 가려진 눈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창세 3,6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의 치유를 위한 많은 가르침을 주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두 번 나오는 “마을”이란 말에 조금 더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실 때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라는 말씀과, 시력이 회복된 이에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보고 신앙의 눈을 뜨고 살아가려면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루기를 바라시는 새로운 탈출의 여정을 뜻합니다(예레 31,31-32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치유된 이를 “집으로” 보내시며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집으로 보내시면서 그가 살아갈 마을로는 가지 말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 마을”이란 그리스도의 빛과 복음의 빛으로 보지 않고 세상의 기준과 자기 통념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그 모든 곳이 아닐까요?
세상의 기준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은총을 다시 한번 주님께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무엇이 보이느냐?
어떤 물건을 인터넷에서 구매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물론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대부분 가격 비교 사이트를 보고서 단 10원이라도 더 싼 쇼핑몰을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물건에 대한 비교를 많이 해서일까요?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교도 참 많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동차를 새로 장만하려고 하는데, 자동차와 자전거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아니, 그렇게 멍청한 비교가 어디 있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동차와 자전거는 둘 다 이동 수단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지요. 쌍둥이라도 성격이 다르고 특기와 재주가 다릅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각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유한 ‘나’를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본당 신자가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임 신부님보다 여러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강론, 업무 처리, 신자들과의 친교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 비교가 맞을까요?
예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어느 할머니께서 역대 본당 신부님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무엇을 잘하셨고, 저 신부님은 저것을 잘하셨고….”라는 식으로 각 신부님의 고유한 면을 바라보면서 칭찬하셨습니다.
이렇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의 습관적인 잘못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분히 하나씩 고쳐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고유한 면을 발견하면서 인정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간다면, 어느 순간 어떤 사람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냥 단번에 고쳐주시면 될 것 같은데, 여러 단계를 거치십니다.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다시 두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때 비로소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났다고 해서 곧바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속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으며 또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당 한 번 나갔다고 미사 한 번 참석했다고 해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주님의 품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의 비결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다.
- 제임스 발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회춘이 아니라 회생을
오늘 주님께서는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데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고쳐주시지 않고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것도 마을 밖까지 데리고 나가셔서 고쳐주십니다.
이 의미가 은밀한 사랑의 표시라고 예전 강론에서는 얘기했는데 오늘은 그 의미를 다르게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복음 끝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과 오늘 독서와 연결해 묵상해보니 다른 관점에서 그 의미를 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는 영적인 눈이 새로 열리는 것과도 연결이 됩니다. 육신의 눈만 열린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열렸을 것이고, 그래서 세상은 이제 새 세상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가 살던 저 마을은 옛 세상이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의 의미도, 그를 옛 세상에서 빼내시는 의미일 것이며, 저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심은 옛 생활로 돌아가지 말고, 새 세상으로 나아가 새 삶을 시작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노아 얘기도 같은 의미지요. 홍수로 세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지만 파국이 노아에게는 새 세상의 시작이고, 그것도 육백한 살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백 년을, 없어져야 할 세상에서 산 셈입니다. 그리고 삼백오십 년은 새 세상에서 살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저나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참 의미가 있겠습니다. 이 나이를 십분의 일로 줄이면 환갑까지 산 다음 35년은 새롭게 사는 겁니다.
환갑까지 참 인간적으로 그리고 세속적으로 살았습니다.,이 나이에, 뭐 새로울 것이, 있겠냐고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며 살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오늘 복음에서 깨우침을 받고 노아에게서 깨우침을 받는다면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지 않고 지금 새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고작 회춘하려 들지 않고 회생의 삶을 용기 내어 시작할 것입니다.,다시 봄을 맞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만큼 뼈를 깎는 아픔이랄까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없을 수 없겠습니다.
전에도 예를 든 적이 있지만, 독수리의 회생과 같습니다. 몇 년 전 저는 이렇게 독수리의 회생에 대해 묘사했지요.
“독수리는 70년을 사는 장수 동물이지요. 그런데 독수리가 70년을 살기 위해서는 40세에 갱년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40세가 되면 독수리의 부리와 발톱과 깃털은 노쇠하여 그대로 놔두면 사냥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죽게 됩니다.
이때 독수리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대로 죽을 것인가 환골탈태할 것인가.
환골탈태를 선택한 독수리는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먼저 바위를 쪼아 낡은 부리를 부숴버리고 새 부리가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부리가 자라면 새 부리로 낡은 발톱을 다 뽑아버리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발톱이 자라면 새 발톱으로 낡은 깃털을 다 뽑아버리고 다시 새 깃털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 부리와 새 발톱과 새 깃털을 가지게 되고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로운 30년 더 살게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삼십 년을 더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과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인생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보게 되는 여정이 은총입니다. 꽃을 꽃으로 나무를 나무로 사람을 사람으로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볼 수 있어야 건강한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무지와 편견에 마음이 닫혀 볼 수 없는 우리들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것을 내어 보이는 것에서 사랑은 자라납니다. 하느님께 멀어지면 하느님의 것을 영원한 것을 알아 볼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듯 사랑하지 않고서는 서로를 볼 수 없는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이 우리의 빛입니다. 빛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감사하고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도 볼 수 없는 우리가 사라지는 것들에 집착합니다. 보아야 알게 되고 보아야 만나게 되는 회복의 은총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시간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다시 사람이 보이는 사람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시력의 회복은 사랑의 참된 회복 빛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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