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2023년 2월 13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4,1-15.25)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 오늘 복음
(마르코 8,11-13)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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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복음
마르코 8장 11-13절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13일 (월)
김민휘 요한 세례자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5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13일 (월)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45
📌 강론시작 14:49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13일 (월)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8
📌 강론시작 08:16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카인과 아벨
오늘 제1독서에는 두 형제가 주님께 각자의 소출을 바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카인의 곡식과 달리 아벨의 봉헌물에 눈을 두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궁금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차별을 말합니다. 카인이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듯이 보이는 하느님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가장 잦은 시도는 히브리서의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아벨이 카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바쳤다는 것입니다(히브 11,4 참조).
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짚으며 하느님의 행위에 반영하였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축업을, 가나안 민족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우월을 강조하고자 카인(농업)보다 아벨(목축)의 봉헌을 하느님께서 선호하셨을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봉헌물이 카인의 것보다 낫지 않았는데도 받으셨다면 주님은 불의한 분이 되시는 것은 아닐까요?
하와는 첫 아기를 낳고 “내가 주님과 함께 한 사람을 얻었다.”(창세 4,1의 직역)라며 카인이라고 부르며 무척 소중히 여긴 듯합니다. 반면에 아벨에 대하여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은 듯합니다. 아벨은 부모의 아들로 제시되기보다는 카인의 동생으로 덧붙여진 사람으로 소개됩니다(창세 4,2 참조).
이렇게 우리 앞에 대조되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열망이 반영된, 하느님과 함께 얻은 카인과 그와 비교할 바 못되는 아벨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와의 두 가지 불의를 봅니다.
카인에게 쏟은 과도한 애정과 아벨에게 보인 무관심 또는 무정입니다. 어머니에게 지대한 관심과 소유의 열망을 받고 있는 카인과 달리 아무런 관심도 애정도 받지 못하는 아벨의 선물을 하느님께서 받아 주심은, 어쩌면 차별당한 불의한 아들 아벨에게 하느님 편에서 베푸실 수 있는 보상이 아닐까요?
아벨이 여전히 하느님 앞에 또 사람들 앞에 존재함을 인정하시는 하느님의 행위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아벨의 선물을 받으시자 이제껏 연기처럼 존재하던 아벨이 드러나게 되고 카인은 그의 옆에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의 첫 형제는 형제애를 이루는 데 실패합니다. 사실 성경은 단 한 번도 카인을 아벨의 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아벨의 경우는 카인의 동생이라고 일곱 번이나 말합니다(4,2.8.9.10.11 참조). 우리는 주님 앞에서 형제애를 이루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소유와 질투의 욕망으로 형제를 잃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살핍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디를 보고 있나요?
18세기 성인인 프랑스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님은 매일 성당을 찾아오는 농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는 특별한 기도를 하지 않는 것 같은데, 평화로운 모습을 늘 오랫동안 성당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 농부에게 신부님께서 물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기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도대체 성당에 몇 시간씩 앉아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분을 보고, 그분은 저를 보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행복해하지요.”
신부님께서는 이 대답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사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대화라고 하면서, 늘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냥 ‘나’만 말하기 바빴습니다. 심지어 그분을 보지도 않고 말이지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화를 나눈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껴져서 대화를 그만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대화를 나눠야만 상대와의 사랑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연애 중인 연인은 하루 종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이 있으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과 기쁨을 체험합니다.
참 기도는 나의 일방적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 즉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며 하느님과의 시선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과 사랑의 깊이가 더 생기고 그 안에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앞선 농부처럼 말입니다.
서로 바라봐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시는데, 우리는 과연 어디를 보고 있을까요? 혹시 입으로 하느님을 외치면서 다른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하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빵의 기적도 행하시고…. 표징의 숫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것만 바라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기도를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일방적인 말하기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래서 서로 행복한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을 사는 데는 딱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기적인 듯 사는 것’ 또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듯 사는 것’.
- 알버트 아인슈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표징을 보지 못하는 이유: 묵상기도의 부재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은 잘못이 없으신가?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오늘 저의 강론은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렵니다.
하느님은 잘못이 없으신가?
인간만 잘못이 있고 하느님은 없으신가?
카인의 죄악에 하느님의 잘못은 없으신가?
저는 오래전부터 하느님의 원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원죄의 원죄가 하느님께 있다고. 인간 원죄의 원죄가 하느님께 있다는 얘기지요.
자식의 모든 죄에 부모의 원죄가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유전자적으로 그런 자식을 낳았고, 그렇게 양육했기에 자식이 그리된 것이 아닙니까?
똑같습니다. 낳은 분은 하느님이나 부모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의 잘못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잘못에 대해 하느님도 할 말이 없습니다.,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부터 하느님의 원죄이니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지은 것에 관해 할 말이 없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또 사랑하시기에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며, 자유를 주신 이유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다시 말해서 억지로가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그 사랑에 관해서는 감사하지만, 인간의 원죄에 하느님의 원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카인의 죄에 관해서도 하느님의 원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하느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만 굽어보셨습니까? 제물을 안 바쳤다면 모를까 바쳤는데 왜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하느님이 분명 잘못하셨고 카인의 죄에 하느님의 원죄가 있습니다,,만약 하느님께는 잘못이 없다면 창세기에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가, 하느님께서 굽어보시지 않은 이유를, 굽어보시지 않은 것이 편애가 아니라는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은 겁니다.
사실 창세기뿐 아니라 모든 성경이 하느님의 모든 신비를 친절하게 그리고 다 설명하지 않고, 다 설명해준다 해도 인간이 다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고 신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제물을 하느님께서 맘에 들어 하시느냐 그것을 창세기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쨌거나 인간은 죄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자유의지를 어떻게 쓰든, 그것도 우리 인간의 자유입니다. 죄를 짓는 데 쓸 수도, 사랑을 하는 데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은 할 수 없고 죄만 짓게 만드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억지이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며 죄의 핑계나 탓을 하느님께 돌리는 미성숙이지요.
성숙하다면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고, 성숙하다면 자유의지를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다스린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다스리는 것이고, 성숙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잘 다스려 자유의지를 죄를 짓는 데 쓰지 않고 사랑하는 데 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자유의지를 사랑하는 데 힘을 쓰게 할까요?
자유의지를 사랑하는 데 쓰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사랑을 위해 쓸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참된 표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한 번도 만나 본적이 없는 표징을 만납니다. 신앙의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따름과 투신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느새 우리도 표징이 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은 언제나 표징에 집착합니다. 작은 표징의 사랑이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합니다. 표징의 생활인 사랑의 실천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아무리 큰 표징이 오더라도 깊어질 수 없는 우리들 신앙입니다.
살아있는 오늘이 가장 뜻깊은 표징의 날입니다. 기적을 멀리서 찾지 않습니다. 표징을 먹고 마시는 우리들의 삶이 기적입니다. 뺄 수도 더 할 수도 없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다른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표징에 감사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사이에 마음이 있고 삶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표징도 있습니다. 뚜렷이 드러나는 사랑의 삶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표징입니다. 표징은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기도와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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