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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2/09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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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하느님께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주님,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2023년 2월 9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2,18-25)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오늘 복음
    (마르코 7,24-30)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2월 9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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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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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마르코 7장 24-30절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9일 (목)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16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9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08

📌 강론시작 14:36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9일 (목)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0

📌 강론시작 06:2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다름은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준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 오늘 제1독서에서 창세기 저자는 마치 하느님의 마음을 읽고 써 내려가는 듯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상과 그 안의 많은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보시니 좋았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정반대의 표현을 보고 있습니다. 히브리 말은 이 뚜렷한 대조를 더 쉽게 드러냅니다(키-토브/로-토브). 사람은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이 곁에 있음에도 고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사람의 고독과 외로움이 보였고 그분께서는 이것을 해결하려 나서십니다. 우리말로 “협력자”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에제르’는 성경에서 죽음의 위협에서 누군가를 구해 주고자 개입하는 데 사용되는 말로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협력자를 선물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에 등장하는 ‘라자로’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친구 ‘라자로’는 창세기의 ‘에제르’와 같은 어원을 지닌 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어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담의 갈빗대’는 성경에서 쓰인 본뜻과 조금 다릅니다. 이 낱말은 계약 궤의 한 면, 천막의 한 쪽 면, 성전의 옆 면, 산의 다른 한 쪽 면, 두 쪽으로 나뉜 문의 나머지 한 쪽을 가리킬 때 쓰인 말입니다(탈출 25,12; 26,20; 1열왕 6,34 참조). 

히브리 말 성경을 그리스 말로 옮긴 최초의 번역 성경 ‘칠십인 역’에는 ‘갈빗대’라는 말이 없고 ‘몸의 한 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한 면으로 여인을 만드셨다는 표현은 남녀가 어느 한 쪽만으로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남자와 여자, 이 둘은 본성이 같으면서도 엄연히 구별됩니다. 히브리 말은 둘의 본성이 같다는 것과 함께, 서로 구별된다는 점을 공통 어원을 지닌 다른 말을 사용하여 분명히 표현합니다(잇시/잇샤). 다름이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 나아가도록 서로를 위하여 ‘알맞은 협력자’를 보내 주신 좋으신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새겨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 유행하는 상식 퀴즈를 맞혀보세요.

 

1) 영국은 섬나라인가?

2) 한국 전쟁이 일어난 연도는?

3) 태양계의 행성을 순서대로 말해보라. 
 

요즘 유행하는 상식 퀴즈라고 합니다. 대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첫 번째 문제의 정답률은 30%, 두 번째 문제의 정답률은 23%, 마지막 문제의 정답률은 14%였습니다. 
 
‘아니, 이 정도도 몰라? 지성인이라고 하는 대학생의 상식 수준이 이것밖에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굳이 알 필요가 뭐 있어?’라고 말입니다. 상식이 부족하다고 또 무식하다고 말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사는 데 지장이 없다면 굳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요즘 아이돌 가수를 잘 모릅니다. BTS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지만, 솔직히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몇 명으로 구성된 그룹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세대가 볼 때, 너무나도 무식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다지 좋아하는 취향도 아니고,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와 공통 주제로 소통하기는 힘들겠지만, 오십 넘어 그들과 굳이 이런 내용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지식의 전달이 아닌, 지혜의 전달이기 때문입니다. 
 
상식 부족이라는 이유로 남을 평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보다 그 모습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가장 중요한 것을 전달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이교도였습니다. 선민의식이 강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교도는 구원으로부터 제외된 사람들이라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것은 당시 유다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지요.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왜 차별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정말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옳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드러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도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상식을 내세워 자기 생각만 옳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힘들이지 않고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다.

- 데모필루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죽었다고 믿어야만 악에서 해방되는 이유

 

2017년 6월 청년 창업 지원과 전통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지자체에서 내놓은 방법은 청년들이 음식을 판매하는 청년몰입니다. 여기는 창업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임대료도 다른 업소들에 비해서 10분의 1 정도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실패할 일은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통해 백종원 씨가 여러 가지 솔루션을 주었고 이 방송은 커다란 홍보 효과를 낳았습니다. 

지난 2018년 SBS ‘골목식당’에 나온 뒤 손님들이 줄을 이었던 인천 신포국제시장 청년몰. 지금은 문을 연 점포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대전 청년구장의 청년몰 역시 2021년 모두 폐점했습니다. 물론 코로나 여파도 없지 않아 있겠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모든 상인이 망한 것은 아닌데도 왜 유달리 청년몰은 전국적으로 다 망했을까요? 

백종원 씨는 2019년 청년구단을 기습 방문하여 청년구단 대표들을 모아놓고 정확히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장사가 장난입니까? 이렇게 장사하면 다 망해요. 왜 가게 세가 이렇게 낮은데 여러분들은 다른 곳과 같은 가격대를 형성합니까? 내가 분명히 가격 내리라고 했는데. 그리고 왜 다른 업소에서 파는 것을 내가 팝니까? 서로서로 잘 돼야 하지 왜 나만 잘되려고 합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통해 장사 경험을 쌓는 학교, 다양한 손님을 접하는 기회가 되는 걸로 족해요. 그런데 서로 자기가 더 매출을 올리려고 하고 있잖아요. 내가 2~3년 안에 망하지 않으면 손에 장을 짖어요.”
코로나의 영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네티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망하는 집 이유 있고, 흥하는 집 이유 있다. 15만 원 임대료 내면서 150만 원 임대료내는 프랜차이즈 가게처럼 비싼 가격으로 장사하다니. 팔아주러 갔다가 헛웃음 나오고 오만 정 다 떨어졌다.”

누가 망하고 싶을까요? 하지만 사람이 함께 살아가다 보면 그래도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살아남으려면 천상 남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니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은 비단 작은 청년몰의 경우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가 그러하고, 전 세계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악이란 것이 외부의 영향이 아닌 자기 자신들 안에서 나온다고 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예수님은 이러한 나쁜 생각들과 행동들이 나쁜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사람의 마음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없는 세대가 오면 세상이 멸망하게 될 이유입니다. 우리라도 나쁜 생각이 아닌 좋은 생각이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백종원 대표의 말을 들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물리쳤고 결과는 함께 망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김여환 의사의 『천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에 ‘임종 전 죽음을 예고하는 다섯 가지 증상’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어떤 증상들이 있을까요?

1. 먹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집니다. 삶의 의욕을 더는 붙잡고 있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잠자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3~4일을 내리 자다 문득 일어나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다시 긴 잠에 빠지기도 합니다. 

3. 몸이 편안해집니다. 고통이 덜해지며 구토감이 없어지고 더는 기침도 나오지 않습니다. 

4.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말하신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오후에 내가 시내에 마지막으로 볼일이 있거든. 외출을 허락해줬으면 좋겠어.”

5. 갑자기 기운을 차려 가족들에게 추억거리를 얘기하거나 덕담을 건네기도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나면 사실 가족들보다 본인이 더 자신이 마지막 때임을 느낍니다. 곧 죽는다고 느끼면 이렇게 육체적인 욕망도 사라지고 집착도 사라집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몸도 편안해지고 나를 위해서가 아닌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해지는 이유는 살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몇 번이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백 대표의 말은 함께 살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백 대표의 말을 받아들일 겸손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복음의 여인은 예수님께서 그녀를 거의 죽이다시피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 7,29)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이에게는 마귀가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겸손이란 죽은 상태입니다. 겸손은 말 그대로 땅을 상징합니다. 땅은 모든 죽은 생명들의 마지막 상태입니다. 

‘삼사라’란 영화에서 자기 육체의 욕망을 없애고자 몇 년 동안의 고행을 했지만, 결국 사라지지 않아 파계한 스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살다 보니 다시 도망쳐 스님으로 살고 싶어집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에서 돌아가시기 얼마 안 남으신 분들은 이미 자신이 죽었다고 믿습니다. 믿음의 효과는 마치 플라시보 효과처럼 내가 그렇다고 믿어버리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었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죽었습니다. 믿으면 효과가 나타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다고 합니다. 믿으면 효과가 생겨납니다. 

죽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 힘으로 죽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 말 안에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믿음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절도 못 죽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죽은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분은 정말 우리 인성을 끌어안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이미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 안에서 악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임종 직전의 환자처럼 좋은 것만이 나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라는 믿음의 효과가 이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혼자 있으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겠다." 

오늘 창세기는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다 좋다고 하신 하느님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즉시 떠오르는 것이 요즘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서 혼족이니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말이 유행이고, 방송도 이런 세태를 반영하여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엔터테인먼트 식으로 방영하기도 합니다. 젊은 사람 중에 그런 프로를 보고 즐기는 사람이 많나 봅니다. 

또 즉시 떠오르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고립의 정신’을 크게 걱정한 내용입니다. 

물론 혼자 사는 사람이 다 ‘고립의 정신’의 소유자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혼자 살지만, 고립을 살지 않고 가족에게 매이기보다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런 경우 그것은 고립의 정신을 사는 것이 아닐뿐더러 혼자 살 줄 모르고 의존적으로 사는 사람보다 훨씬 잘 산다고 해야겠지요. 

의존적인 행복은 의존적인 불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말이 있듯이 혼자서도 잘하는 것은 이런 의존적인 불행과 미성숙을 넘어서는 행복한 성장의 표시이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보기에 좋지 않은 ‘혼자’는 고독이 아니라 고립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립 특히 고립의 정신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혼자’를 말하는 것이고, 부담감이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공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할 것이 무언인지. 사람을 두려워할 것인지 아무도 없는 것을 두려워할 것인지. 

가끔 죽음 이후를 생각할 때 저는 하느님도 안 계시고 아무도 없는 저 캄캄한 우주 공간을 생각하고 저 혼자 떠도는 것을 상상합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있으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러다 누구 하나를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사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고 외톨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사랑이라는 것을 놓치는 순간 사람이 두려워질 것이고, 반대로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사랑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다시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공존을 선택할 것인가? 고립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두려움을 선택할 것인가? 같이 있을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혼자 있는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 

혼자 있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혼자 있으면 기뻐할 일도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뜨겁고도 간절한 믿음을 봅니다. 믿음은 작은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진심어린 감사에서 믿음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감사입니다. 흩어진 감사의 부스러기를 한 데로 모으니 믿음이 됩니다. 

믿음을 정화하는 감사입니다. 욕심의 찌꺼기가 아니라 감사의 부스러기들 입니다. 오히려 부스러기로 우리를 건져올리시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부스러기같이 작은 것에 충실한 삶입니다. 가득차다라는 의미 또한 부스러기의 간절한 힘입니다. 부스러기가 되어도 행복한 주님의 종입니다. 무디어져 가는 우리 마음을 오히려 부스러가가 뜨거운 칼날이 되어 우리의 일상을 깨웁니다. 

오늘도 우리가 놓치고 볼 수 없는 수 많은 은총의 부스러기들이 우리의 하루를 채워줍니다. 믿음은 이와 같이 부스러기의 수 많은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우고도 남습니다. 

믿음은 있습니다. 감사의 부스러기로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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