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02/07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2. 7.
반응형

 

어서 와 하느님께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주님,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2023년 2월 7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1,20-31, 2,1-2,4ㄱ)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의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오늘 복음
    (마르코 7,1-1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2월 7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복음
마르코 7,1-1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7일 (화)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2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7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04

📌 강론시작 16:11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7일 (화)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09

📌 강론시작 08:4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세상

 

오늘 제1독서에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시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하면 “남성과 여성” 또는 “수컷과 암컷”이라고 옮기는 편이 낫습니다. 이 표현이 구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 대부분 짐승과 관련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창세 6,19; 7,16; 레위 3,1; 3,6 참조). 적어도 이 표현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창세기에서 사람의 창조는 여섯째 날 동물이 창조된 날에 함께 이루어집니다.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동시에 동물의 본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닌 이러한 동물의 본성은 개별적 차원을 넘어 집단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동물에 비유하는 것이나(창세 49,17.27 참조), 또한 다니엘서에서 바빌로니아의 정복자가 짐승의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규정된 것은(4,13 참조) 우연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뒤에 곧바로 그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면서 소명을 주십니다. 그것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고 땅과 바다와 하늘의 동물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라는 소명입니다. 또한 그분의 창조에는 온유함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자유와 책임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기대되는 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그분의 통치 원리를 따라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 전체에서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영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렇다면 사람도 하느님을 닮고자 말씀과 영의 온유한 힘으로 자기 생명의 원동력을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없다면 사람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세상에 폭력의 씨를 뿌리고 세상을 파괴하고 죽음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소명에 올바로 응답하기를, 그래서 인간이 이 땅의 동물들과 피조물들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자신에게 내재된 동물의 본성을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 영의 힘으로 다스리는 겸손한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는”(이사 11,6) 세상,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세상을 우리 마음에 품고 이를 이루려고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알코올 중독자 중 홍조 현상이 나타나는 사람은 몇 %일까요?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함께하며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세트알데하이드라고 하는 독성 화학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더 오래 있고 싶어도 그렇지 못함을 불만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세트알데하이드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으면, 얼굴도 붉어지지 않고 더 오래 좋은 자리를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시아 인구의 절반이 얼굴 홍조 현상과 같은 유전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유전적 결함이 오히려 더 고마운 것임을 일본의 한 연구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1,300명의 알코올 중독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연구에서는 알코올 중독자 중 홍조 현상이 나타나는 사람의 숫자를 파악했습니다. 몇 %나 홍조 현상을 드러냈을까요? 깜짝 놀랄만한 결과였습니다. 0%였습니다. 단 한 명도 홍조 현상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인구 절반이 홍조 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상인데, 알코올 중독자 중에서는 단 한 명도 홍조 현상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홍조 현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알코올 중독에 빠질 확률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잘 생각해보면 좋은 것이 아닐까요?
 
불만스러웠던 얼굴 홍조 현상도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왜 이렇게 술 마시기 힘들까?’ 하며 힘들었는데, 이 역시도 하느님의 배려이고 선물일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하느님의 배려와 선물이 아닌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단점이 오히려 장점도 될 수 있으며, 싫어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유익한 것도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조건 거부하고 나쁜 것으로 단정을 지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뿐인 종교를 따르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자체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거룩함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로 향한 내적 지향이 있어야 합니다. 단지 외적인 모습을 가지고 거룩함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어디에서나 계신 하느님의 손길을 찾았다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항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런 모습을 많이 취합니다.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들, 그 모습 안에서 하느님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는 살아가면서 사람의 행동을 비웃지도, 한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며 오직 이해하려고만 했다.

- 스피노자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늘의 법을 세상 법과 타협시키는 교회라면?

 

여러분들은 언제부턴가 자녀의 상태가 사이코패스처럼 나중에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범죄자가 될 것임이 거의 확실해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는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괴물들의 어머니’(Mother of monsters: 2020)는 이러한 발상으로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심한 장난을 치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폭력을 일삼는 아들을 감시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온 집안에 CCTV를 설치해 놓고 아들이 하는 행동을 감시합니다. 집에서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의 폭력을 행사했던 아들은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드디어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이 아들의 소행이라고 확신한 어머니는 아들을 아버지 집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가지 않고 어머니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CCTV와 녹화본들을 봅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의 책임을 줄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아들이 어머니에게 복수할 차례입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 자신이 사이코패스였음을 녹화하게 시킵니다. 그리고는 결국 아들을 의심한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몰아갑니다.

엄마는 기지를 발휘해서 묶여 있는 곳에서 탈출하여 아들을 칼로 찌릅니다. 드디어 아들의 사이코패스적인 행동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아들의 핸드폰에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보복으로 사이코패스라 취급당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느껴보게 하고 싶은 것뿐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습니다. 실제로 어머니를 죽일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법을 철저히 지키면 되는 줄 압니다. 이 세상의 법으로 될 것 같았으면 주님께서 새로운 법을 주러 오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법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사이코패스처럼 보이더라도 자기의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자녀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위 영화에서 어머니는 아들이 사회 심판을 받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이코패스였던 사람이 자신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의 법은 사실 사이코패스로 살면서도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그러한 법입니다. 이 세상의 법은 각자의 생존을 위한 법입니다. 그 법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자녀를 낳지 않아 인구가 줄고 또 자신의 나라 이익을 위해 하는 전쟁을 합법화하며 자연 파괴의 책임을 누구에게도 지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을 따릅니다. 해적선에서는 해적의 법을, 경찰서에서는 경찰의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을 준수해야 그곳에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 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면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법은 해적선의 법일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그 배 안에서는 질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사랑에 어긋나는 법입니다.

사랑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회 질서가 유지되게 만드는 것이지 온전한 사랑의 법은 아닙니다. 위 영화에서 아이의 어머니가 지닌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면 모두가 적이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법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에게 몸을 맡기는 법입니다. 어머니의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을 깨우쳐주기 위해 희생한 아들이 오히려 하느님 법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예수님은 사람들의 규정을 교리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십일조를 내라는 것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니 교리 차원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규정들을 앞세워 우리는 이 교리를 폐기하였습니다.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에게 법적인 처벌을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미움이 들어옵니다. 위 영화의 엄마처럼.

만약 내가 바다에 빠졌을 때 나는 튜브가 없고 다른 사람은 튜브에 타고 있다면 어떨까요? 튜브는 두 사람이 잡고 있으면 가라앉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튜브를 잡은 사람은 병약한 노인입니다.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이 튜브를 빼앗아야 합니다. 이것이 크게 보면 세상의 법입니다. 세상의 법도 결국엔 생존이 목적입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배가 자신을 구해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병약한 이의 튜브를 빼앗아 생존했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 배에 올라서도 그러한 법에 적용받으면 어떨까요?

배를 빼앗기 위한 일을 벌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배에서는 물론이요, 그 배가 향하는 곳에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미리 자신이 탄 배에서 그 도착하게 될 나라의 법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배에 타서 하느님 법을 익히며 삽니다. 하느님 법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이 훈련을 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세상 법에 지배당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한 하느님 나라의 법이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지 않고서는 이 세상 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인지, 아니면 배에 탄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녀만 들어갑니다. 하느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어야 그 나라에 머물기 위한 사랑의 법이 의미 있게 됩니다.

내가 바다에 빠져있으면서 괜한 사랑의 법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위선 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법은 하늘에 속한 이만 지킬 수 있습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배에 탄 사람처럼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늘에서 온 분과 같은 지위에 올라가 있음을 믿고 그분이 되어 그분 나라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완전하지 않다면 자꾸 지상의 법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지상의 법을 버리고 천상의 존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법이 지켜집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 하느님 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사랑이 증가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마음으로 아무리 사랑을 증가시키려고 해봐야 물에 빠진 사람이 억지로 사랑하는 척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법은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만 지킬 자격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중요하다 그러나 중심은 아니다.

 

인간은 참 소중합니다. 어떤 피조물보다 소중합니다. 그래서 오늘 창세기에서도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신 다음에는 그저 “보시니 좋았다.” 정도였는데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고 합니다. 

나는 참 소중합니다. 그런데 나는 다른 누구보다 소중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나는 물론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중요해도 나는 중심이 아닙니다. 

사실 내가 없으면 해도 소용없고 달도 소용없으며 하느님도 소용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없으면 내가 살 수 없고, 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내가 있어야 그 모든 것이 내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란 존재가 소중하고 중요해도 그렇다고 내가 중심은 아니고 내가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이어야 하고, 자기중심은 더더욱 아니 되고 하느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인간이 중요하고 내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그리고 내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느님의 피조물을 잘 다스리고 그래서 모든 것이 번성하도록 보살피라는 소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인데 인간중심이 되고 자기중심이 되면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파괴할 것입니다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 하느님 창조 질서의 파괴는 이런 인간중심과 자기중심이 초래한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오늘 복음과 관련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조상들 전통인 정결례를 주님과 제자들 잘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하자 주님은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전통을 꼬집으십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의 전통을 가지고 저버리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핑계로 저버린다고 하시는데 이것이 다 자기중심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요. 

엄마가 야단치면 아버지한테 가고, 아버지가 야단치면 엄마한테 가며, 엄마가 잘해주면 엄마한테 가고, 아버지가 잘해주면 아버지한테 가는 것처럼 이기주의이고 자기중심이지요. 

나는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심은 아닙니다.,이런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이러한 짓들을 많이 한다.

 

하느님 앞에서 죄송하고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짓들을 우리는 많이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신앙의 기준점 마저 바꾸려 듭니다.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이래선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진리는 진리를 낳습니다. 합리화와 자기변명에 용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것을 실천하는 용기와 결심이 중요합니다. 세례를 받고도 하느님 사랑을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쏟는 투신이 필요합니다. 

계명에서 삶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계명의 이탈자는 생명의 이탈자이기도 합니다. 생명이 아름다운 것은 창조주께서 주신 질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신앙의 간판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의 실천이 계명을 완성합니다. 소멸과 소생의 전통이 아니라 사람의 참모습을 되찾게 하는 계명을 따릅니다. 

심장에 새겨진 계명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고 이웃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살고 계시는 이 땅에 계명이 있습니다. 계명의 빛이 하느님의 빛입니다. 하느님의 빛이 오늘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밝혀 주십니다. 계명의 길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