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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2/10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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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는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네.

주님, 복된 동정녀 스콜라스티카를 기억하며 비오니 그를 본받아 저희가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주님 사랑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3년 2월 10일 (금)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3,1-8)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 오늘 복음
    (마르코 7,31-37)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2월 10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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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은 이!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은 이!

제 잘못을 당신께 아뢰며, 제 허물을 감추지 않았나이다. “주님께 저의 죄를 고백하나이다.” 당신은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셨나이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은 이!

당신께 충실한 모든 이들이 곤궁할 때 기도드리나이다. 큰물이 닥친다 하여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하리이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은 이!

당신은 저의 피신처. 곤경에서 저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은 이!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복음
마르코 7장 31-37절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10일 (금)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56

📌 강론시작 07:0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10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6:18

📌 강론시작 14:30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10일 (금)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4

📌 강론시작 09:2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가장 위험한 뱀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끝없는 욕망이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죄를 짓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뱀의 존재를 말하기에 앞서 뱀의 교활함은 매우 놀랍습니다. 

뱀은 주 하느님의 말씀(계명) 가운데 오직 부정적인 말씀만 가져다 씁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뱀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다른 모든 선물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한계(금지)의 말씀이 사실은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있음을 망각하게 합니다.

뱀의 질문에 여인이 대답합니다. 언뜻 보면 여인이 뱀의 유혹에 당당히 맞서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여인이 뱀의 논리에 따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산의 중심에는 생명나무와 뱀이 주장하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함께 있었지만(창세 2,9 참조), 결국 여인의 마음에는 생명나무가 없어지고 금지된 계명만 남습니다. 여기에다 여인은 하느님의 금지 계명을 하나 더 늘립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어서도’ 안 되지만 ‘만져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뱀은 분명히 자기 욕망을 분출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뱀은 언어의 마법사입니다. 말의 모호함을 이용하여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말로는 죽음에서 사람을 구해 줄 것처럼, 그래서 자신이 사람을 지켜 줄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지배하려 합니다. 

뱀은 사람에게 친구처럼 다가오지만 오히려 불행의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자라게 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여인이 뱀의 제안을 바라고 열망하였음을 드러내려고 반복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여인의 눈이, 그의 마음이 바라고 탐합니다. ‘바라다’와 ‘탐하다’의 조합은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둘 다 아주 강하게 집착하는 사람의 욕망을 표현합니다(시편 78[77],29-30; 잠언 7,25; 미카 2,2 참조).

세상에는 우리를 꾀는 뱀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위험한 뱀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끝없는 욕망이 아닐까요? 오늘도 뱀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살피며 하느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말씀에 기대어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변하지 말아야 할 것.

 

어렸을 때 살았던 집에서의 기억이 많습니다. 단층 주택이었고 넓은 마당에는 나무와 꽃도 많았습니다. 형제가 많아서 저녁 식사 때면 늘 북적대던 기억, 겨울에는 너무나 추워서 가족 모두가 함께 이불을 덮고 서로의 체온으로 매서운 추위를 이겨냈던 기억, 마당에서 키우던 동물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려집니다. 
 
언젠가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이 집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어딘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파리를 ‘시간이 멈춘 도시’라고 부릅니다. 100년 전 헤밍웨이가 걷건 거리와 현재의 파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53년 이후 이렇다 할 재개발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찾아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무척 반가울 것 같습니다.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행복을 다시금 간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와 비슷한 감사의 인사를 받곤 합니다. 20년 넘게 써 왔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 때문입니다. 제 글을 보다가 어느 순간 보지 않았는데, 아는 지인이 저의 묵상 글을 보내줘서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묵상 글을 보면서 예전의 순수했던 마음이 생각나고,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계속 지켜줘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사랑, 평화, 기쁨, 희망, 믿음 등의 소중한 가치가 담긴 마음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늘 그 자리를 지켜주십니다. 특히 당신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변함없이 계속해서 나눠주십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그냥 손만 얹어 주셔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에파타!”라고 말씀하시지요. 손만 얹어도 충분히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행동을 하셨을까요? 
 
계속된 접촉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단순히 말로 위로 하는 것보다,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 일회적인 사랑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변함없는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모든 것에 인내하라. 자신의 결함을 자책하며 용기를 잃지 마라. 하지만 지체하지 말고 그 결함을 고치기 시작하라. 그 노력을 매일 새롭게 시작하라.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받은 은총을 언제까지 함구해야 할까?

 

백종원의 골목식당 ‘초심 잃은 거제도 도시락집’의 내용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백 대표는 거제도에서 작은 식당을 하며 거의 망해가는 세 집을 살려놓습니다. 특별히 가장 믿은 집은 거제도 도시락집입니다. 

손님이 없는 열악한 상권에서 몇 명 안 되는 낚시꾼들을 위해 새벽부터 일하며 고생하는 도움이 절실한 사장님 부부를 위해 백 대표는 자신의 특별 비법이 들어간 톳김밥과 거미새라면을 만드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가게는 대박을 냅니다. 

그런데 10개월 만에 재방문한 상황은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김밥에 톳의 양이 줄었고 맛도 배지 않은 톳을 썼습니다. 거미새 라면에는 통새우가 아닌 새우를 갈아서 넣었습니다. 그리고 홀에서 음식을 먹으려면 1인 1라면을 반드시 먹어야만 합니다. 또 김밥 하나는 카드 결제가 불가합니다. 카드 수수료 때문에, 몇 개 안 되는 식탁의 회전율 때문에 등으로 핑계를 대지만 백 대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처음엔 절실했는데, 지금은 욕심이 들어온 거죠.”

주인은 욕심 때문이었다는 말에 반박하지 못합니다.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은 변할까요? 하지만 그 초심을 잃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백 대표는 말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했는데…. 초심을 잃은 가게가 맛이 유지될 리가 없습니다. 초심에 드리워진 욕심을 걷어내야만 멀리 볼 수 있고 오래오래 많은 손님에게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가세요. 왜 이 좋은 기회를 발로 차요? 갈게요. 10개월 전의 절실함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갈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시던 차라 그도 이방지역에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을은 세상은 상징하는데 이 세상은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이 지배합니다. 고쳐진 그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를 고쳐주신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하지만 이방 민족과 섞여 살던 그는 자기 마을을 지배하던 어둠의 세력의 강력함을 무시하였습니다. 저절로 자신에게 그것이 스며들어 은총을 받고도 상태가 더 안 좋아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일을 알렸습니다. 마치 백종원 대표가 자신들을 찾아와 비법을 알려주었음을 선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백 대표를 위함이 아닌 그것을 위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도 처음엔 사마리아 지방이나 이방 민족들에게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지역을 지배하는 악의 힘이 너무 강력하여 당신 제자들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께 은총을 받고는 바로 복음을 전하는 데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라비아 지방으로 가서 3년을 수련하고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은총을 받고 3년 정도는 함구하며 그 은총의 씨앗을 열매 맺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받은 뒤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봅시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갈라 1,15-18)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뵈옵고 바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아랍 땅에 머물렀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는 그 시간 동안 수련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어디로 돌아왔을까요? 예루살렘의 교회의 수장을 찾아갔습니다. 수련의 결과는 결국 교회의 수장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만나 다시 교회에서 파견받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돌아가실 때,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여러 체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교회에 온전한 순명이 가능할 수준이 되었을 때면 복음의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신앙 체험을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바오로는 신앙 체험 3년 뒤 교회로부터 파견받습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사도 13,1-3)

성령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파견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잘 들어보면 성령께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셔서 교회가 그들을 파견한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첫 신앙 체험을 사도행전에만 세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체험을 전하면서도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에 순종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만해지지 않게 잡아줍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고 교회에 순종할 줄 안다면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주님께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수도회 사제까지 되었고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에 순종하기까지 그 은총을 키우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 주님의 교회를 둘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종파만 수천, 수만에 이릅니다. 

반면 성 프란치스코를 봅시다. 같은 개혁자였지만, 자기가 받은 은총을 전할 수준까지 오른 분은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도회를 어렵게 교회의 인가를 받고 세울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순종할 수 있기 전까지는 함구합시다. 오히려 그리스도께 해가 됩니다. 가장 큰 해를 입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초심을 잃지 않도록 은혜를 교회를 통해 주시고 교회에 순종하게 하심으로써 그 초심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무엇을 바랄것인가 

 

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열리다’는 말이 같이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릴 것이라는 뱀의 유혹이 나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은 주님께서 귀먹고 말을 더듬는 이의 귀와 혀를 열어주시는 얘기입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두 ‘열림’을 보고 즉시 정반대의 열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는 열리지 말아야 할 죄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고, 복음에서 장애인의 경우는 열려야 할 은총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반대의 열림이 있게 된 것은, 정반대의 요인 때문임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뱀 곧 사탄의 유혹과 주님의 구원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아담과 하와는 유혹을 받고 복음의 장애인은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욕망이 있었고 복음의 장애인에게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오늘 창세기에는 욕망이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무 열매가 탐스러웠다는 말에서 탐욕을 유추할 수 있고 그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압니다. 욕망이 없으면 유혹도 없다는 것을. 

사실 배가 불러 식욕이 전혀 없으면 음식 냄새는 결코, 유혹이 되지 않고, 내 아내를 너무도 사랑하면 어떤 여자의 유혹도 유혹이 되지 않지요. 

그러니 욕망이란 결핍을 채워 더 만족하게 되고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인데 이것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자의 배부른 결핍이지요. 

아담과 하와는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 외에는 다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다 가질 수 있었고 가지고 있었습니다. 

딱 하나 못 가진 것이 있었고 그러나 평소에는 쳐다보지 않았는데 뱀이 그것을 가리켜 보게 하자 그만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쳐다보지 않았으면 되는데 쳐다보는 바람에 그리된 것이지요. 홈 쇼핑을 보지 않으면 되는데 보는 바람에 충동 구매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밖에서 사탄이 보라고 해도 보지 않으면 되는데 안에 욕망이 있으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어도 못 가진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욕망이고, 이때 못 가졌다고 느끼는 결핍이 바로 욕망의 결핍입니다. 

이런 욕망의 결핍과 반대되는 것이 갈망의 결핍입니다. 욕망은 있는데도 더 바라기에 결핍을 느끼는 것이지만 갈망은 정말 없고 그래서 생존 또는 존립에 결핍이 있는 것입니다. 

적절한 예가 될는지 모르지만 욕망은 이미 많이 먹었는데도 더 맛있는 것을 탐하는 것이라면 갈망은 며칠을 한 끼도 먹지 못해 정말 죽 한 그릇이라도 먹고 싶은 겁니다. 

갈망은 살기 위한 것이고, 욕망은 만족을 위한 것이며 그것도 끝없는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갈망은 살기를 바람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고 욕망은 더 큰 만족을 바람으로써 유혹을 받게 하며, 갈망은 구원자를 만나 은총의 세계에 들게 하고 욕망은 사탄을 만나 죄의 세계에 들게 하는 것이다. 

구원과 만족 중에 무엇을 바랄 것인가? 

갈망과 욕망 중에 무엇을 가질 것인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어떻게 사는 삶이 건강한 삶인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는 삶이 제대로 걸어가는 삶이며 건강한 삶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듣고 잘 말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제대로 듣고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는 것이 제대로 지켜나가는 건강한 관계의 참된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여정 또한 제대로 듵으시고 제대로 말씀하시는 사랑의 여정이었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귀먹게 하고 말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거짓 사랑에 사랑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귀와 입이 열려야 제대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가장 아픈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열리면 예선보다 훨씬 밝아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건강한 울림이 치유입니다. 기도도 에파타 삶도 에파타입니다. "에파타!"곧 "열려라!"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열리듯 사람이 열려야 할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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