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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29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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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주님은 하늘을 지으셨네.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2022년 12월 29일 (목)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요한1서 2,3-11)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릅니다.

  • 오늘 복음
    (루카복음 2,22-35)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29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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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눈부신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혀 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외아드님의 영광스러운 탄생을 저희가 한목소리로 찬미하게 하소서.

 

 

복음
루카 2장 22-35절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29일 (목)
김강룡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29일 (목)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29일 (목)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님 탄생의 의미

 

루카 복음 2장은 예수님의 탄생(1-20절)에 이어서 새로 태어난 아기의 할례와 작명(21절), 등장(22-40절)을 보도합니다. 이러한 이야기 순서는 1장에서 소개된 세례자 요한의 탄생, 할례와 작명, 등장(57-80절)과 평행을 이룹니다. 오늘 복음은 아기 예수님의 등장을 전하며, 성전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부모를 맞이하는 시메온이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시메온은 아기를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시메온의 노래’라고 불리는 이 찬미가는 2장 8-20절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해석하면서 그 의미를 설명하고, 아기가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목적을 수행할 것이라는 예고(11-12절 참조)를 분명히 합니다. 시메온은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된 하느님의 구원을 직접 보았고, 그 구원은 그의 예고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모든 민족들에게 유효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시메온의 시선은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께 향합니다. 그는 마리아께 예언자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시메온은 은유적이며 상징적인 단어를 사용하면서 예수님께서 반대자의 표적이 되리라고 예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메온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이 이스라엘 안에서 갈등을 불러오고 반대자들은 그분을 거부하며 위기로 몰아가리라고 미리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시메온의 예언은 앞선 찬송과 함께 앞으로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독자를 기다리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시메온의 눈으로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가 예고한 예수님의 여정에 참여하도록 초대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길 위에서 예수님의 뒤를 따를지, 아니면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손가락질하며 돌을 던질지, 그 선택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실패와 사랑의 완성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완성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다른 사람이 짓다 만 건물을 내가 마저 완성하고, 다른 사람이 찬 골이 골대 맞고 튀어나온 것을 내가 집어넣는 것처럼 결핍이나 결함이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내가 완성하는 그런 뜻일까요? 

하느님의 사랑은 충만하여 그 한 방울로도 우리를 충만하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여 아무 결함이 없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씨로 치면 열매를 맺는 것, 

약으로 치면 병이 낫는 것, 

말씀으로 치면 들은 대로 실천하는 것, 

사랑으로 치면 사랑이 거부되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것, 

그래서 사랑받은 사람이 그 사랑으로 행복해지는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씨를 소중히 여겨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까지 맺는 것, 

하느님께서 주신 약을 소중히 여겨 매일같이 빠트리지 않고 먹어 병이 낫는 것, 

하느님이 하신 말씀을 소중히 여겨 마음에 간직할 뿐 아니라 실천까지 하는 것, 

하느님의 사랑을 모든 것보다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사랑을 받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하느님 사랑이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일 겁니다. 

여러분도 그런 적이 많으시겠지만, 저의 경우 제 딴엔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에겐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사랑이 불완전하여 사랑의 말이 충고가 아니라 잔소리로 받아들여지고, 강요로 받아들여지곤 하는데 제 사랑에 가난과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달리 말하면 제 사랑에 욕심이나 교만의 불순물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이 불완전할 리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아무 욕심과 교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하느님 사랑이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랑의 불완전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 사랑보다 다른 사랑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거나 하느님의 은총을 사랑이 아닌 벌로 오해하기 때문이거나 그리고 앞서 얘기했듯이 욕심과 교만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하다거나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세상 욕심과 교만을 비우는 것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되는 첫걸음이겠습니다. 

그런 다음 세상 욕망을 하느님 갈망과 이웃 사랑의 열망으로 바꾸는 다음 단계를 밟아야 합니다. 

그러나 욕심과 교만을 우리 안에서 비우는 것도, 욕망을 갈망과 열망으로 바꾸는 것도, 우리의 의지적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은총이 필요한데 은총이 필요하다는 겸손한 의지를 우리가 지닌다면 하느님의 은총이 햇빛처럼 우리의 의지를 감쌀 것이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기다리게 하시는가?

 

관상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신성을 보는 기도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관상기도에서 ‘거둠의 기도 – 고요의 기도 – 일치의 기도’라는 세 단계를 말합니다. 거둠의 기도는 마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에서 다른 세상 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그분의 자취가 있는 곳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 않으면 거둠의 기도가 불가능합니다. 고요의 기도는 마치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시듯 그 기다림이 끝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성령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깨닫고 인내롭게 기다리는 일입니다. 기다림이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다림의 대명사가 나옵니다. 바로 시메온 예언자입니다. 그가 기다릴 줄 알았던 이유는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루카 2,25-26)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는데도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셨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기다림이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했던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물론 묵상기도에서도 기다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나로부터의 정화를 이루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해 본인 스스로 제사를 지내어 결국 그 이유로 왕권을 잃게 됩니다. 기다림은 시간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알게 하여 주도권을 내가 아닌 하느님께 드리게 만듭니다. 

기다림이 주제인 대표적인 작품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습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가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고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조차 분명치 않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그들은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봅니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질문하기, 되받기, 욕하기, 운동하기, 장난과 춤추기…. 지루함과 초조, 낭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지껄이는 그들의 광대놀음, 그 모든 노력은 고도가 오면 기다림이 끝난다는 희망 속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루해가 다 지날 무렵, 그들의 기다림에 한계가 왔을 때 나타난 것은 고도가 아니라 고도의 전갈을 알리는 소년입니다. 소년은 고도가 오늘도 오지 않을 것이란 전갈만 주고 갑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포조와 럭키를 만납니다. 포조는 주인이고 럭키는 포조의 줄에 목이 메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노예입니다. 

며칠 뒤에는 주인이 눈이 먼 상태로 럭키를 끌고 갑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타라공은 고도를 기다리며 그 넘어진 주인을 일으켜 세워주고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소년은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전갈을 남깁니다. 그렇게 연극은 막을 내립니다. 

고도가 도대체 누구일까요? 작가가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만약 알면 책에 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타라공은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고도가 오리라는 약속을 믿고 매일 기다립니다. 하지만 포조와 럭키는 내가 주도적이건, 혹은 끌려다니건 바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자가는 도대체 그렇게 살면 뭐가 좋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이 오기를 4천 년이나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이 정화되었습니다. 시간의 주인이 하느님임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영성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놀이는 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기다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기다릴 수 없으면 오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올까요? 믿음에서 옵니다. 두 번째는 나에게 기다려도 시간 내에 끝까지 갈 수 있다는 능력이 있음을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움직여야 할 때는 움직이는 결단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으면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분명히 죽기 전에 메시아를 본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기다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나타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준비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분명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놀이에서 놀이하는 사람은 술래의 목소리와 모습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에 대한 신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으려면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준비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나는 모른다는 믿음 때문에 생깁니다. 사울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기다릴 줄 모르는 게 문제였습니다. 기다릴 줄 몰랐던 이유는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더 믿었기에 기도와 제물을 바침이 의미를 잃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다릴 줄 알기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제물을 잘라놓고 하느님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 기다림을 통해 아브라함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제물을 불사르는 성령께서 그에게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관상기도는 내 안의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집중하는 시간, 곧 ‘거둠의 기도’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고요의 기도’입니다. 고요의 기도는 평화가 오는 시간입니다. 기다리던 분이 오시는 시간입니다. 마치 마시멜로 실험처럼 기다림을 통해 성령에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평화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평화가 옵니다. 성령은 이렇게 기다릴 줄 아는 이에게 오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서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다음엔 ‘일치의 기도’입니다. 다시 그리스도께서 보이시지 않고 그분의 ‘뜻’이 남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복이 되어야 하는 소명이 주어졌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소명 안에서 계속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그 뜻으로 나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을 때는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머무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머무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안에 들어가면 ‘하나’가 되어 상대를 볼 수 없습니다. 볼 필요도 없습니다. 성모님은 태중의 예수님을 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분의 뜻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이것이 일치의 기도입니다. 

관상기도는 항상 이 세 단계를 거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집중해야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보여주심을 믿고 그분의 현존에 집중하며 기다릴 줄 아는 능력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기다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심을 위해 가장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믿고 기다리고 기도함이 나를 온전히 정화했다면 그분이 분명 나를 사로잡을 고요의 기도로 올라가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게으른 개미

 

우리는 개미를 쉬지 않고 일하는 성실의 아이콘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개미가 실제로 성실한지, 2002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의 한 생물학 교수가 90마리의 개미를 3개 조로 나눠 실험했습니다. 인공 개미굴에 실험 카메라를 설치해서 개미의 일상을 관찰한 것입니다. 그 결과, 각 조 개미 30마리 중 20%는 일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거나 개미굴 주변만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는 이 개미를 ‘게으른 개미’라 지칭했습니다. 
 
이제 연구진은 ‘게으른 개미’들에게 먹이를 차단했습니다. 그런데 부지런히 일하고 있던 개미들이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게으른 개미’가 새로운 먹이를 찾아 움직이자, 다른 일개미들이 어떻게 할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게으른 개미’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즉, 정찰을 위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돌발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성실하게 땀 흘려 몸을 움직여 일하면 다 잘살게 될까요? 그런 사람도 필요하지만, 관리자를 비롯한 각자의 역할에 맞는 역할도 중요합니다. 이렇게 상대의 역할을 존중하며 살아갈 때, 균형 있는 발전 속에서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아직 말씀도 하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상태이십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 곁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지키고 계셨고, 오늘 성전에 가서 예수님을 봉헌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메온 예언자의 예언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직접 보게 된 시메온은 예수님이 모든 민족들에게 계시의 빛이 되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임을 밝힙니다.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각자의 역할에 의해 구원 역사가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생활한다면 하느님의 일은 완성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의 일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에 맞게 행동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뜻은 사랑에 있고, 그 사랑의 일을 계속해서 실천해야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신뢰하면 그들도 너를 진심으로 대할 것이다. 누군가를 훌륭한 사람으로 대하면, 그들도 너에게 훌륭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이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열 수 없는 문을 하느님께서 활짝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다양한 모습으로 시작되고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때로는 칼에 꿰찔리는 영혼의 아픔도 겪으며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은 우리를 쓰러지게도 하시고 일어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하느님의 구원이십니다. 계시의 빛으로 또 백성의 영광으로 우리들 한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듣는 최고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은 하느님의 빛이 되고 하느님의 체온은 하느님의 사랑이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이렇게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통해 흘려보내야 할 것을 흘려보내는 봉헌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망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하느님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눈(目)은 무엇을 보며 살고 있는지를 반성하는 성탄 축제의 빛입니다. 사랑한 시간보다 미워한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제 미움을 봉헌합니다. 성탄 속에서도 사랑하지 못한 마음을 눈물을 봉헌합니다. 하느님께서 제 영혼의 문을 열고 먼저 들어 오십니다. 이것이 사랑이며 이것이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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