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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28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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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물살이 우리를 덮치고, 급류가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거품을 뿜어내는 물살이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

 

2022년 12월 28일 (수)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요한1서 1,5―2,2)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2,13-18)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28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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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죄 없이 살해된 아기 순교자들이 말도 배우기 전에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으니 저희도 오늘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복음
마태 2장 13-18절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28일 (수)
장승필 안드레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28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28일 (수)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구원 역사는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고, 지금 우리를 통하여 지속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동방 박사들의 아기 예수님 방문 사건(2,1-12 참조)에 이어서 예수님 가족의 피신과 사내아이들의 학살 사건을 보도합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헤로데의 적개심과 화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사건의 원인은 앞선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장이 전하는 예수님 이야기는 탈출기 1-2장이 전하는 모세의 어린 시절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으로 모세도 죽을 위험에 놓였지만, 그는 파라오의 딸에게 입양되어 죽음을 면하고, 뒤에 이스라엘의 탈출을 돕는 인도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경우와 조금 다릅니다. 헤로데 임금의 악의와 적개심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해치려는 적대자를 피하여 죽음을 모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하여, 곧 피를 흘려 ‘많은 이’를 구원하시려고 살게 되신 것입니다(1,21; 26,26 참조).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죽음으로, 죄 없이도 죽어야 하셨던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죽음으로 그들의 운명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 이야기에서 하느님 약속이 완성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 약속은 모세의 탄생과 구출에 관한 이야기로 예고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2장은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이자 새로운 모세로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고난과 희망의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보고, 예수님께서 맞으실 고난과 영광의 사건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었지만, 그 역사는 지금 우리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정렬된 인생.

 

언젠가, 묵상을 하던 중 프란치스코가 몇 살에 돌아가셨는지 따지다가 저는 너무 많이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이 있는지, 언젠가 죽을 것인데 왜 사는 것인지, 오래 사는 사람은 왜 오래 사는 것이고 일찍 죽는 사람은 왜 일찍 죽는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오래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일찍 죽는 것인지, 이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하면 훌륭한 삶이고 그렇지 않으면 삶을 잘못 산 것이지. 

그런데 많은 일, 업적, 장수, 이런 것을 생각하니 왠지 다 그런 것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고 오래 산다는 것도 추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것을 초월하는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가치랄까, 가치 기준이랄까, 그런 것이 꼭 있을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 세상사는 동안 남겼다 해도 결국 죽고 마는데 자기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결국 죽고 마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잘 살고 못 사는 것의 절대적인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그리고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잘 죽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화로운 삶이었어도 죽을 때 잘못 죽으면, 다시 말해서 최후가 좋지 않으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지요. 그리고 젊어 아무리 칭송받는 삶을 살았더라도 변절한다면 그 인생도. 

그렇다면 다시,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이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 묻게 되는데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죽음이 잘 죽는 죽음이고 그리고 그것은 또 영원하신 하느님 손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시간적으로는 영원을 향하여 정렬되어 있어야 하고, 인격적으로는 하느님을 향하여 정렬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당장의 이익과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인생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안 되고, 대열이 흩어져서도 안 되며, 이 사람에게 끌려가고, 저 사람에게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겠지요. 

오늘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은 하느님께 직행한 아기들의 죽음입니다. 헤로데에 의해 죽었지만 실은 주님 때문에 죽은 아기들이고, 그래서 오래 살아 죄에 오염되는 일 없이 하느님께 직행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축일의 의미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교회의 답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에게서 어떻게 세상의 죄와 악이 나오는지? 사랑이신 하느님이신데 어찌 세상에 고통이 있으며 죄 없는 사람과 착한 사람이 고통을 더 받는지? 

하느님은 사랑하시기에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자유를 주셨기에 죄를 짓기도 하고, 죄로 인한 악도 발생하며, 자유를 주셨지만, 유한한 이 세상에서는 한계를 주셨기에 유한한 이 세상에서 유한한 인간이 겪는 것이 고통과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통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다만 그 고통과 죽음이 영원과 하느님을 향한 고통과 죽음이냐 아니냐, 하느님을 위한 고통과 죽음이냐 아니냐가 다를 뿐이고 관건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은총에 요행을 바라지 말자.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흉은 흉으로 끝나지 않는다.

 

중학생 때, 등하교를 같이했던 동네 친구가 있었습니다. 집이 가까워서 학교까지 함께 걸어갔고, 집에 올 때도 같이 걸어왔습니다. 아마 중학생 때 제일 친했던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날, 함께 걸어오면서 학교의 반 친구 흉을 제가 말했습니다. 이 친구는 자기 공부만 하고, 너무 이기적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말을 들은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네가 더 심해.” 
 
이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아 인상을 쓰자, 착한 친구는 “농담이야.”라면서 얼버무렸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를 떠올리면서 흉을 봤던 친구보다 분명히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가 바로 저였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당시에는 왜 이렇게 남에 대해 흉을 많이 봤나 싶습니다. 사실 남 험담하는 사람이 공통점은 자존감이 낮다고 하지요. 자신에게 불만이 많고 열등감이 심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하게 된다고 합니다. 제가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흉이 흉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주는 대로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칭찬은 칭찬을 낳고, 험담은 험담을 낳습니다. 때로는 여기에 이자가 붙어서 돌아오기도 합니다. 
 
적대감을 가지고 하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이 아닌,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 가득 담긴 긍정적인 말과 행동이 우리의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이자까지 더해서 더 좋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기념합니다. 갓 태어나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린 헤로데 대왕은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요? 어린아이를 죽인 것은 자기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였지요. 하지만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로, 절대 적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실제로 이 악행을 저지르고 얼마 못 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못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끝까지 행복할 수 없었던 헤로데 대왕이 만약 사랑으로 아기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늘 나라에서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나의 욕심과 이기심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말과 행동에 늘 사랑을 가득 담아야 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은 나의 현재다. 현재는 나의 전부이고, 모든 것이다.

- 로시 조앤 헬리팩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이 땅에서 아기가 죽어갑니다. 살아야 할 생명이 죽어갑니다. 자신의 죽음도 모르채 죄 없는 아기들이 죽어갑니다. 예수님의 성탄 앞에 살아야 할 아기들의 시간까지 우리가 죽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립니다. 멈추지 않는 아픔과 절규입니다. 뻔뻔함을 멈추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아기들의 죽음에 관하여 물을 수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 절망을 위로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아기를 죽입니다. 아기의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입니다. 아기와 함께할 수 없다면 하느님과도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왕도 사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중한 생명이 있을뿐입니다. 하느님 성탄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성탄을 찾는 이유는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고싶은 이유입니다. 

성탄의 기쁜소식은 아기들을 돌보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성탄의 좌표는 사랑입니다. 죄 없는 사랑을 죽이지 마십시오. 사랑이 전부가 되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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