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당신은 가련한 저를 굽어보셨나이다.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2022년 12월 26일 (월)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6,8-10; 7,54-59)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10,17-2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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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님,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에 거행하는 신비를 저희가 삶으로 드러내게 하시고 숨을 거두면서도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
복음
마태 10장 17-22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26일 (월)
장승필 안드레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26일 (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26일 (월)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신앙의 본보기
마태오 복음 10장은 예수님의 파견 설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5-7장이 첫 번째 담화인 ‘산상 설교’를 전하였다면, 파견 설교는 두 번째 담화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담화의 일차 청중이었던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청중의 위치에서 머무르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가 되도록 요청받습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선발(10,1-4), 파견과 그들을 위한 가르침(10,5-15)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파견 사명을 수행하면서 마주할 수 있는 박해와 고난을 예고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구성으로 제자들의 선교에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또한 이러한 종말론적 경고가 제자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두 가지 상황을 예고하십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외부, 곧 유다인들과 이방인 권력자들에게 박해받는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집안의 가족들이 분열되는 상황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다가올 고난 또는 분열만 예고하시는 것이 아니라 위로의 약속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영, 곧 성령과 사람의 아들은 고난과 박해의 상황에 놓인 제자들을 위로할 것입니다(10,19-20.23 참조).
오늘은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스테파노가 놓인 박해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박해하는 적대자들에 대한 스테파노의 반응(제1독서 참조)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스테파노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 예수님의 운명을 함께 나눈 순교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신앙의 본보기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참으로 부러운 자유.
어제 저는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로 오르게 되는 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말씀드렸고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의 신비를 잘 사는 것은 이 교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도 말씀드렸습니다.
이 교환의 신비에 참여한 사람의 탁월한 본보기 가운데 하나가 스테파노이고, 그 결과로 스테파노가 순교하게 되었는데 그 순교는 주님의 지상 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 탄생의 교환이라는 점을 우리 교회는 오늘 기념하는 겁니다.
성탄 팔부 축일 첫날 왜 우리 교회가 스테파노의 순교 축일을 지내는지 우리가 의아해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스테파노는 죽어 하늘에 올라 천상에서 탄생했을 뿐 아니라 그 전에 이미 하늘을 본 사람이고, 자기만 하늘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하늘을 보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라는 하늘은 보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하늘로 눈이 향해 있는 스테파노와 스테파노에 눈이 꽂혀 있는 적대자가 비교되고, 하늘에 눈이 열려 있는 스테파노와 하늘에 귀를 닫고 있는 적대자가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적대자에게 대적하려는 마음이 애초에 없고, 그저 하늘을 향하고 하늘을 같이 보자고 초대할 뿐인데 그런 그를 적대자들이 적으로 삼고 적대시할 뿐입니다.
적대시라는 말을 우리는 오늘 새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적으로 대하는 눈 또는 시선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적대시합니까?
같이 하늘을 봤으면 적대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적대시하지 않았으면 하늘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오늘 독서에 묘사된 적대자들의 행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회당에 속한 몇 사람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스테파노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의 행위는 이렇듯 시선이 사람으로 향하고, 사람을 적으로 대하고, 달려들어 논쟁이나 벌이고, 화를 내고.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그런 것뿐입니다.
이런 그들과 달리 스테파노는 그들에게 말려들지 않고, 걸려들지 않습니다.
하늘에 시선을 둔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자고 초대하는 사랑은 있지만, 그들의 시비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들과 갈등할 이유나 싸울 이유는 없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부러운 스테파노의 자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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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당신이 그러고도 남편이야?
맞벌이 부부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 와 있는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직장 상사로부터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문제의 원인이 아내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먼저 잘못했네. 그 직장 상사를 욕하면 안 되지.”
남편의 이 말에 아내는 어떠했을까요? 더 화가 나서 “당신이 그러고도 남편이야?”라고 소리친 뒤에 남편과 한동안 냉전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아내 역시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에게 말한 것은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것이 아니지요. 앞으로 어떻게 관계 개선을 해야 할지 그 방법을 물은 것도 아닙니다. 즉, 해결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화난 감정을 풀어줄 남편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비결은 해결사나 재판관이 많이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보다 어떻게든 인정하고 지지하며, 정답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닌, 잘 들어주는 사람, 잘 경청해주는 사람이 많을 때 삶은 더 풍요로웠습니다.
오늘은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입니다.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도 그렇지만 많은 순교자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의 횡포에 의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인 생명까지도 자기 자리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그들의 자리는 하늘 나라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면서, 자기 생명보다 하느님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영광스럽게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끝까지 견딘 이는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순교자들을 박해했던 기득권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려는 모습으로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과 함께한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게 됩니다. 자기 말은 하지 않고, 하느님의 소리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유한하고 짧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보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무한한 시간이 보장되는 하느님 나라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 그 나라가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은 우리 삶에 우연히 찾아와 준 것들에 대한 발견이다.
- 최인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성탄 안에는 또 다른 성탄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교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순교의 사랑입니다. 성탄도 순교도 우리가 가야할 사랑의 길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목적지를 모르기에 삶의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성탄이며 모든 것을 버리는 순교입니다. 내려놓고 비우는 사랑을 해본적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이 시작되는 곳에 자아의 죽음도 어김없이 따라옵니다. 사랑하는 법을 성 스테파노 순교자를 통해 배웁니다. 기꺼이 가장 좋은 마음을 하느님께 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탄입니다. 사랑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사랑의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삶과 죽음을 잇는 사랑의 성탄입니다. 먼저 내려오신 예수님 성탄 앞에 우리가 드려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사랑입니다. 누가 성탄이고 누가 순교인지의 구분이 아닌 우리의 사랑을 새롭게 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성탄과 순교가 만나면 하늘 나라의 신비가 됩니다.
모든 시간은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구원의 주소지와 영혼의 현주소를 새롭게 만납니다. 영원하신 분이 유한한 우리의 목숨 안으로 들어오셔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해맑은 아기로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모든 구원의 역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이며 사랑의 역사입니다. 삶과 죽음을 여시는 구원의 성탄입니다. 성탄의 신비를 풀 수 있는 것은 용기(勇氣)있는 사람의 사랑입니다. 그 길을 최초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 순교자는 기쁘게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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