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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23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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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주님의 계약과 법규를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모든 길은 자애와 진실이라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와 사귀시고, 당신의 계약 그들에게 알려 주신다.

 

2022년 12월 23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말라키서 3,1-4.23-24)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 오늘 복음
    (루카복음 1,57-66)
    세례자 요한의 탄생.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23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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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강생하실 날이 가까웠으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이 되신 말씀 저희와 함께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부당한 종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복음
루카복음 1장 57-66절

 

세례자 요한의 탄생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23일 (금)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23일 (금)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23일 (금)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즈카르야의 불순종과 순종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 이야기(루카 1,5-25 참조)에 이어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루카 복음 1장 57-58절이 전하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사건은 천사를 통한 탄생 예고와 잉태 보도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뒤 아홉 달이 지났음을 알 수 있는 증거들은(1,24.26.36.56 참조)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보도는 짧습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둘러싼 논쟁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이었습니다(1,61; 1마카 2,1-2 참조). 그러나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과 아버지 즈카르야는 ‘요한’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요한’은 천사가 알려 준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과 사회 규범 사이의 충돌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풀립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천사에게서 아기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하였고, 이러한 의심으로 즈카르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1,18-20 참조). 즈카르야는 의심과 불순종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고, 뒤늦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분을 찬양합니다(12월 24일 아침 미사 복음 참조).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을 마주하는 두 가지 태도를 보여 줍니다. 이 상반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저마다 과거에서 현재로 변화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의 이름이 누구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 것인지 결정한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마리아처럼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집안에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요한의 집안에서는 요한을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즈카르야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이름은 자신에게서 오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대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제 요한은 즈카르야가 아닌 주님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 66)

이름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이름이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것인지 결정하는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개밥그릇을 가져온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사람 먹을 음식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사람 밥그릇을 가져와야 합니다. 밥만이 아니라 밥그릇도 자기 부모님이 주는 것입니다. 

노력하면 될까요? 노력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이가 노력하면 어른이 될까요? 노력이 아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모든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일까요?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을 받게 만드는 것이 자녀에게 해로운 일이 아닐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97회에 ‘분노 조절 불가 금쪽이’가 등장했습니다. 하도 불안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데 이 아이의 화풀이 대상, 혹은 자기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대상은 엄마입니다. 학교 갔다 와서 엄마가 없으면 아이는 분노를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욕은 물론이요, 폭력까지 쓰기도 합니다. 신호등 대기를 하는 중에 남이 스치기만 해도 나이 불문 화를 냅니다. 화가 통제가 안 되는 아이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일까요? 

자기 자신은 자기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그래서 도움을 찾습니다. 그게 엄마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처방을 내립니다. 그리고 마치 그 처방이 잘 된 것처럼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프로그램에서 하는 처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진짜 문제는 도움을 부모에게서 찾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속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엄마에게 좋은 아이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엄마는 아이 마음을 알고는 자기가 더 열심히 해주지 못한 것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열심히 아이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때 아이가 변했나요? 아이가 불안한 이유는 자기 안전을 부모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기 안전을 온전히 책임져줄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아이의 불안은 자기 생명을 책임져줄 수 없는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을 책임질 창조자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지 않았고 다시 줄 수도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는데도 책임지려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망칩니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새로운 도움을 줄 수 있는 창조자가 있음을 알려주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창조자가 주는 이름을 받는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 우승은 아르헨티나였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프랑스가 이긴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는 아르헨티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메시는 나이가 많음에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의 호날두가 비슷한 연령대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것과 대조됩니다. 메시는 ‘메갓’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메시를 응원하는 이들은 거의 그를 신처럼 떠받듭니다. 

물론 메시는 골의 영광을 무조건 하느님께 돌립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축구의 신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인정한 것이 호날두와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서명은 ‘전 요셉’을 휘갈겨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십자가 모양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삼용’은 죽고 ‘요셉’의 새 이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으로 저의 육체적 부모로부터의 도움을 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그분의 도움을 받는 사람임을 되새기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 이유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분명 자신의 이름이 왜 요한인지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 이후부터는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보살핌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정말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고 인간 중에 세례자 요한만큼 큰 인물은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으로 불러줍시다. 그러면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이름을 지어준 이를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을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나의 자녀가 누구의 손길 밑에서 자라게 할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 열릴까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서품을 받으신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의 서간집(1842-1860, 스승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을 읽고 있습니다. 순교하지는 않으셨지만,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셨습니다. 12년 동안 127개나 되는 교우촌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당신을 찾아오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찾아가셨습니다. 매년 7,000리(약 2,749km) 이상을 걸으며 어떤 고난과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신자들을 찾아 나셨습니다. 그 결과 탈진해서 만 40세의 한창나이에 병사하시지요. 
 
이런 사목적 열정이 서간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음을 신자들의 열성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제를 만나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석하기를 바라는 신자들을 외면하실 수 없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제는 훌륭한 신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은 과거와 달리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지 고해성사를 볼 수 있고, 미사 참석도 자기 편안한 시간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계속해서 편안한 신앙생활만을 추구합니다. 단적인 예로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때, 잠시 방송 미사를 허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계속 신앙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당에 가서 미사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당에 아예 나가지 않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어도 주님께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그 시대,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주님께 대한 열정보다 세상 것에 관한 관심이 더 많은 지금 시대 중, 누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실까요? 
 
주님께 대한 열정을 키워야 합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관점보다 주님을 더 윗 자리에 모실 때 가능합니다. 
 
즈카르야는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듣고 세상의 눈으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아이를 갖기에는 자기나 엘리사벳 모두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요.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즈카르야의 입을 닫은 것입니다. 
 
이제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관습대로 아버지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로 부르려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이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으면서, 세상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그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이 필요한 요즘이 아닐까요? 너무나 편하고 쉬운 신앙생활만 따르다가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게 입이 닫히고 혀가 굳어질지도 모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 스티브 잡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아기는 새로운 가족이 됩니다. 어루만져 주어야 할 생명은 아기로 시작됩니다. 어린 목숨은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품어주어야 할 우리들의 보살핌입니다. 보살핌을 통해 무엇부터 껴안아야 될지를 알게 됩니다. 

아기와 함께 자라나는 부모님들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기처럼 환상이 아닌 실체입니다. 성탄은 사랑이라는 실체(實體)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사랑의 실체는 사랑의 선물이 됩니다. 무엇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오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방치하지 않습니다. 사랑같은 아기의 새날이 펼쳐집니다. 몸과 마음이 자라나는 새날이 축복입니다. 서로를 축복하는 오늘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아기는 축복이 되고 기도가 되고 희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아기 안에 모든 긍정적인 희망이 다 담겨 있습니다. 희망은 이렇게 우리들 곁으로 오고야 말았습니다. 희망을 만날 기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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