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22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22.
반응형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 안에서 제 마음이 기뻐 뛰고, 주님 안에서 제 얼굴을 높이 드나이다.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에, 제 입은 원수들을 비웃나이다. 힘센 용사들의 활은 부러지고, 비틀거리던 이들은 힘차게 일어선다. 배부른 자들은 양식을 얻으려 품을 팔고, 배고픈 이들은 더는 굶주리지 않는다. 아이 못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 아들 많은 여자는 홀로 시들어 간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2022년 12월 22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무엘기 상권 1,24-28)
    한나가 사무엘의 탄생을 감사드리다.

  • 오늘 복음
    (루카복음 1,46-56)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22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굽어살피시고 저희를 구원하시려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구세주의 강생을 경축하며 마침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복음
루카복음 1장 46-56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46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22일 (목)
박형준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22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22일 (목)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마리아의 노래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노래’를 소개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면,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칭송에 노래 형식으로 응답합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역사를 찬양하면서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주님을 향한 찬송으로 시작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송하고 그분을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큰일을 완성하시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당신의 강함을 보여 주시려고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를 누리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셨으며, 부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는 낮은 이들을 높이시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는 자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리라고 예언합니다. 

하느님의 최종 목적은 세상의 권세와 부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권세에 취하여 교만하고 부유한 이들이 당신의 구원 계획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을 낮은 위치에 두고자 하십니다. 자신을 비천한 종으로 낮추신 마리아께서 하느님께 순종하시어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를 통하여 실현된 ‘역전’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하느님 체험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낮은 이가 되어 하느님의 위대함과 자비를 찬양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감사를 넘어 찬미하는

 

오늘 복음의 마리아 찬가는, 어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엘리사벳의 마리아 칭송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찬가에서 마리아는 자기의 기쁨을 감추지 않고 토로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리아를 보면서 우리도 기쁨 찬미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탄을 앞둔 우리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기뻐할 일도 찬미할 일도 없다면, 그리고 기쁘더라도 그 기쁨이 그리 크지 않다면 우린 불쌍하고 대림절을 잘못 살고 무엇보다 한 해를 잘못 산 것일 겁니다. 

아무런 기쁨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표시이고, 한 것이 있어도,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에게 기쁜 일이 있다면, 우리는 그 기쁨을 감추거나 누르지 말고 마리아처럼 감사와 찬미로 토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고, 기쁨을 사유화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은 한해의 기쁨이 자기가 이룬 기쁨이거나 기껏해야 이웃과 함께 이룬 기쁨이지 하느님께서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이룬 기쁨이고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 기쁨이라면 이 기쁨은 반드시 감사와 찬미로 이어지고 표출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기쁨 중에 이기주의적인 기쁨이 얼마나 많습니까? 같이 이룬 것을 자기가 다 이룬 것인 양 열매를 혼자 다 따먹고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자랑은 하지만 감사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이룬 것이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덕이 있는 사람이 감사한다면 신앙이 있는 사람은 찬미할 것입니다. 

찬미는 하느님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에 이루신 선과 나와 우리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신 선이 다 하느님 덕분이라고 감사드리는 것이요 감사를 넘어서 칭송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먼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큰일 곧 구원을 찬미한 다음 자기에게 베푸신 자비가 자기를 넘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침을 찬미합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러니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있다면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고, 우리끼리 이룬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협력을 통해 이루신 것이며, 공동체를 통해 내게 이루신 것이요 나를 통해 공동체에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미는 마리아의 찬미처럼 개인의 구원과 공동체의 구원을 모두 찬미하는 노래가 되어야겠습니다. 

내일과 모레는 강론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25일 성탄 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남은 대림 시기 잘 보내시어 기쁜 성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기쁨의 노래, 마니피캇을 노래합니다. 이 노래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잉태하셨을 때, 혹은 낳으셨을 때, 혹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셨을 때가 가장 기쁘셨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때도 기쁘셨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신 것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입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성모님의 참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기쁨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기쁨은 존재론적 기쁨입니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없고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것만큼 큰 고통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를 찾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려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평화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평화가 오게 만드는 것은 부모가 주는 사랑의 증거, 곧 사랑의 선물입니다. 

저는 저의 부모가 나의 참 부모임을 믿으려 할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주는 사랑의 증거들, 예를 들면 날 위해 일하셨을 부모의 발에 박인 굳은살을 볼 때 참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때가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잃고 무덤에 홀로 앉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기쁨에 찼습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 기쁘지 않습니다. 다른 기쁜 무엇을 찾아도 일시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계시고 나의 창조자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원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50회에 기괴한 장면이 나왔었습니다. 바로 엄마가 아이 둘을 쌍 수유하는 장면입니다. 여섯 살 딸과 모유를 먹어야 하는 갓난아기 동생을 동시에 모유 수유를 하는 것입니다. 여섯 살 아이는 분명 애정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 사랑을 느끼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엄마의 모유를 원합니다. 

재밌는 것은 엄마가 때가 지난 아이에게 모유를 수유하면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엄마로 자녀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게 기쁩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끊지 못합니다. 사실 아이보다 엄마가 더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엄마도 부모로부터 애정결핍의 감정이 있고 자녀에게 애정을 듬뿍 주면서 그 결핍을 채우려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117회에서는 더 기괴한 장면이 나옵니다. 모유 수유와 변을 닦아주는 것은 물론이요, 여섯 살짜리 딸을 엄마가 업고 다닙니다. 엄마는 젖을 떼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도 엄마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애정결핍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렸을 때 받은 어머니가 돌보아 주지 않은 상처를 자녀에게 주지 않으려는 행동입니다. 자녀는 엄마에게 업히고 젖을 먹으며 편안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에는 불안함에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참 기쁨은 부모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랑받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친교를 이루고 선교할 때 더 완성된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 안에서 관상까지 도달하여 주님의 사랑을 느낀들 무엇하겠습니까? 그것이 이웃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은 불안함에 휩싸입니다. 

결국 내가 느낀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부모의 사랑을 가장 확신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니 자녀에게도 참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젖을 떼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와 같은 짐승들은 때가 되면 단호하게 젖을 떼게 합니다. 더 큰 기쁨으로 새끼들을 보낼 줄 아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 그 기쁨을 전하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기쁨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기도만 하는 것보다 그 기도한 것을 전할 때 더 큰 기쁨을 느낍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인사를 건넸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하였고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었습니다. 곧 성모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셨을 때 가장 기쁘셨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을 때보다, 성령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하였을 때 가장 기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것보다 성령을 흐르게 할 때 기쁨이 완성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 뜻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기쁨으로 충만하고 다른 이를 성령으로 기쁘게 한다면 그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울증으로 자살 직전이었던 어떤 자매가 마더 데레사에게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그 여인에게 상담해 주지 않고 자신의 봉사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 달 만에 우울증이 가셨습니다. 성령님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힘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느끼는 기쁨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닉 부이치치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우울증은 타인을 기쁘게 해 줌으로써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요한복음 9장을 읽으면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태생 소경이 다 하느님 뜻이 있어서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이유가 있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령을 받아들이고 그 성령의 기쁨을 타인에게 전할 때 기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배우고 가야 할 유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동이 결과를 결정한다.

 

어느 젊은 청년이 카페에 들어갔다가 구석에 구부정하게 앉아 노트북에 푹 빠져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분명히 노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보다 더 빠른 속도에 감탄하였지요. 
 
‘무엇을 하시나?’하고 노트북 화면을 보니, 요즘 유행하는 최신 게임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게임 실력도 수준급이었습니다. 감탄한 청년은 이 노인과 이렇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가 아까부터 어르신을 지켜봤는데 컴퓨터를 정말 잘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잘하세요?” 
 
“그거야 하루에 12시간 이상 게임을 한 덕분이죠. 밖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게임만 하면 이렇게 될 수 있어요.” 
 
“굉장하세요. 그 나이에 정정하신데도 기계도 그렇게 잘 다루시다뇨. 실례가 안 된다면 연세를 여쭤봐도 될까요?” 
 
이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물여덟인데요?”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여기에는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행동이 결과를 결정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바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자기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행동보다 좋은 결과만을 생각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성녀를 만나시고, 성무일도에서 늘 바치고 있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이 노래의 한 가운데,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라고 고백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예수님 잉태는 처녀의 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무시무시한 간음법에 거부하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전능하신 분의 큰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런 행동이 바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게 된 것이고, 더불어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을 잘 떠올려 보십시오. 결과만을 바라보는 삶이 아닌, 자기 행동이 옳을 수 있도록 늘 성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히 좋은 결과가 따라올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좋은 세상은 고통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 온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공들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최고의 순간입니다. 이미 이 모든 것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큰일입니다.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 순간 모두가 가장 큰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체온을 먼저 나누십니다. 비천한 마음을 견디어 낸 우리를 당신의 체온으로 건져올리십니다. 사람들 속에서 큰일을 하십니다. 우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시는 은총의 주님이십니다. 

비천함이 은총이 되는 순간은 뜨겁습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영원히 잊지않고 기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비천함과 굶주림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엎드린 이들을 위로하시며 역사를 바꾸십니다. 작고 큰일도 모두 주님께서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믿음이 은총이 되는 큰일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은총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