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고운 가락을 내며 환성 올려라.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
2022년 12월 21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아가 2,8-14)
보셔요, 내 연인이 산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 오늘 복음
(루카 1,39-45)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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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기도
주님, 사람이 되어 오시는 외아드님의 탄생을 기뻐하오니 주님 백성이 드리는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그분께서 위엄을 갖추고 다시 오실 때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게 하소서.
복음
루카복음 1장 39-45절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21일 (수)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21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21일 (수)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오늘 복음은 앞선 두 이야기, 곧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관한 보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엘리사벳(루카 1,41.44 참조)과 마리아의 잉태 사실(1,42 참조)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두 이야기들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의 방문에 대한 엘리사벳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1장 42절과 45절의 ‘복 선언’은 마리아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구절입니다. 먼저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그의 아기에게 복을 빌어 줍니다. 마리아께서 복된 여인으로 칭송받으시는 까닭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1,28.30 참조).
마리아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그 아기를 낳으실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님의 어머니”로 인정하고 있으며, 복 선언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 대한 순종을 드러냅니다.
엘리사벳의 두 번째 복 선언은 마리아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음을 전제합니다(1,38; 8,21 참조). 마리아께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에 복된 여인이라고 칭송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와 매우 대조됩니다.
1장 45절의 두 번째 복 선언은 2인칭(‘당신’)으로 사용된 첫 번째 복 선언과는 달리 3인칭(‘믿으신 분’) 주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복음서 저자는 축복의 대상이 마리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모두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가의 연인처럼
오늘 독서는 아가이고 연인을 만나는 설렘을 묘사합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주님의 오심을 코앞에 둔 지금, 그리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복음을 듣는 오늘 이 아가의 말씀을 듣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우리 전례는 왜 아가를 오늘 독서로 배치했을까요?
짐작컨대 그것은 주님께 대한 우리의 기다림과 주님과 우리의 만남이 이러해야 하지 않은지 일깨우기 위함이고, 우리의 기다림과 만남의 실제는 어떤지 성찰케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림은 주님을 사랑하는 기다림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다림은 연인의 기다림만큼 설레입니까?
저는 이 점에 있어서 열등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기다리고 만나는 것이 다른 아무 이유가 없고 오직 사랑하기에 만나고 싶고 기다리는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거나 저의 사랑이 뜨겁지 않고 미지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보고 하느님 사랑하지 않냐고 물으면 단언컨대 지체함 없이 사랑한다고 그리고 모든 것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남자이기 때문인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사랑하는 것 같고, 마르타와 마리아 사이에서 저는 마르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열등감은 마리아에 대한 마르타의 열등감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감히 얘기한다면,저의 열등감은 보통 사람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라 성인들에 대한 열등감이고 성령을 모시지 못한 자의 열등감입니다.
주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성인들은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느님의 일도 열정적으로 하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의 일이 별개가 아니고, 하느님 사랑에서 하느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일을 하게 합니다.
성탄을 앞두고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성인들,,성모 마리아도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충만한 분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 오심을 기다리다가 오시는 주님을 아가의 연인처럼 맞이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따라야 할 유일한 모델, 마리아!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물이 담긴 컵에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물이 담긴 컵에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컵에 담긴 물이 빨간색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바다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바닷물이 빨간색이 변할까요? 아니었습니다.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양의 잉크를 섞어도 공간이나 부피에 따라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바다는 부피가 너무 커서 잉크를 섞었을 때의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마음의 크기가 적은 사람은 어떤 말과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크기가 큰 사람은 말과 행동에 어떤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마음의 크기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커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가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우리 마음의 크기가 커져서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기준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바다와 같은 큰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다가 모두를 포용하듯 사람들을 인정하고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바다와 같은 큰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셨던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분이 뱃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찾아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교통이나 치안이 좋은 시절이 아니었는데, 당신 아들의 날을 준비할 엘리사벳 뱃속의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가십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찾아가는 것, 그만큼 큰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엘리사벳도 놀라 말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이 넓은 마음은 엘리사벳의 말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라고 믿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마음의 크기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내 마음의 크기를 넓혀야 합니다.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바다와 같은 마음을 주님 안에서 키워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대체 어디를 걷고 있는가? 그곳이 다른 누군가의 길은 아닌가? 그렇기에 걷기 힘들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제 자신만의 길을 걸어라. 그러면 멀리까지 갈 수 있다.
- 헤르만 헤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행복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복을 여시는 주님이십니다. 말씀으로 행복을 깨우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다른 행복에게 하느님을 전합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펼쳐지는 행복입니다. 행복을 키우는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말씀으로 믿음의 시간이 펼쳐집니다. 마리아도 엘리사벳도 믿음의 여인들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묻고 하느님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삶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믿음의 여정과 행복의 여정은 똑같습니다. 아무 것도 믿지 않았던 우리가 하느님을 믿게 되는 행복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말씀과 믿음으로 우리의 일상을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하느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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