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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24 (토) 성탄전야미사 생중계

by 평화다방 2022.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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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나는 내가 뽑은 이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노라.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 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

 

2022년 12월 24일 (토) 주님성탄대축일 성탄전야 밤미사 생중계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24일
주님성탄대축일
성탄전야미사 생중계

주님성탄전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62,1-5)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 제2독서
    (사도행전 13,16-17.22-25)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오로의 증언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1,1-25)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24일 (토) 성탄전야미사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성탄대축일 성탄 전야 밤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구원을 기다리는 저희에게 해마다 기쁨을 주시니 저희를 구원하러 오시는 성자를 기꺼이 맞이하여 심판하러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움 없이 뵈옵게 하소서.

 

 

복음
마태오복음 1장 1-25절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25 
그러나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성탄전야미사 평화방송 명동성당 생중계

 

 

2022년 12월 24일 (토) 23시 45분
성탄전야미사 명동성당 생중계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성탄전야미사 바티칸 생중계

 

 

2022년 12월 25일 (일) 새벽 3시 20분
성탄전야미사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생중계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성탄전야미사 분당 팔로티회 생중계

 

 

2022년 12월 24일 (토) 저녁 7시
팔로티회 분당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성탄전야미사 홍천 팔로티회 생중계

 

 

2022년 12월 25일 (일) 새벽 0시
팔로티회 홍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님의 족보

 

마태오 복음서의 첫 자리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있습니다. 1장 2-17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의 역사를 요약하여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복음의 중심 주제인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떼 내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이스라엘 역사의 연속성을 긍정합니다. 이 구원의 역사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으로 이어지고, 그다음 다윗에서 바빌론 유배를 거쳐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1장 2-17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펼쳐진 구원의 여정을 그려 내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족보는 이스라엘 역사의 불연속성을 긍정하는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계 중심으로 구성된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그 대표적 증거입니다. 마리아를 제외한 네 명의 여인(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밧세바])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 민족 출신입니다. 

다윗 계보에서 발견되는 이방 여인은 예수님의 ‘비정상적’ 탄생을 암시적으로 예고하면서, 동시에 예수님 부활 이후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를 준비합니다. 이러한 불연속성의 요소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제한된 범위와 경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선교를 위한 근거로 작용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무질서와 죄악에도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우리도 그분의 구원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발견한 희망은 어떻게 구체적 사건으로 실현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다 받은 사람이 되게 하시려 오신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은 천사들의 알림을 통해 예수님 탄생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성탄은 무엇이었을까요? 삶을 바꿔주는 놀라운 기쁜 소식이었을까요? 그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고통이고 여전히 어둠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어쩌면 이전보다 더욱 혹독한 박해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는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외부 환경을 변화시켜주지는 못하지만, 이 환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줍니다. 만약 어둠이 없다면 빛을 볼 수 있을까요? 어둠 속에서만 빛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둠이 감사함으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내가 미운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것이 사람이건 사회이건 나라이건 세상이건 상관없습니다. 내가 용서하려면 그것들이 나에게 와서 용서를 빌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럼 계속 미워하며 살아야 할까요? 이 어둠을 어떻게 극복할까요? 더는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됩니다. 

최보기 작가의 ‘국수가 우습니?’란 글입니다. 

엊그제는 서울과 인천 사이에 끼어있는 부천시에 취재하러 갈 일이 있었다. 오후 2시 가까운 시각이었는데 약속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는 데다 마침 점심을 거른 터라 간단한 분식 정도로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40년 전통 온달 할매국수’란 조그만 간판에서 왠지 모를 내공이 느껴져 그 집으로 향했다. 간판에 쓰인 대로 80세가 넘은 것 같은 백발의 할머니가 주방에서 국수를 끓이고 있었는데 텅 빈 홀임에도 불구하고 손길이 무척 바쁜 게 이상했다. 주방에 주문을 전달한 사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손님, 죄송한데요. 잠시 후면 예약된 단체 손님들이 몰려오실 텐데 괜찮을까요?”

“뭐 어때서요? 식당에 단체 손님 오면 좋은 것 아닌가요?”

“그게요…. 식사를 하시는 분들이 그냥 드시는 분들이라서….”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얼른 이해가 안 갔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잔치국수 한 그릇 먹는데 뭐 이거저거 따질 필요는 없으니까. 

가벼운 생각으로 후룩후룩 국수를 먹는데 주방의 할머니가 사내에게 “이제 들오시라고 해”라고 하자 사내가 문밖으로 목을 내밀더니 “들어들 오세요!”라며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일군의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그들은 잠시 전 식당에 들어올 때 봤던, 빈터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 모두가 중장년과 어르신들이었는데 살기 넉넉한 사람들은 아닌 것이 남루한 행색들에서 금방 드러났다. 눈치가 9단이라 절에서 새우젓 얻어먹을 위인인 내가 척 보기에 노숙인이나 가난한 분들에게 제공하는 무료 급식임이 분명했다.

‘아, 그래서 그런 질문을….’

카운터에서 국숫값을 계산하던 나는 기자다운 호기심이 생겨 사내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무료 급식을 하시는 건가요?”

“아, 네…. 정확히 말하면 무료는 아닙니다.”

“그럼 돈을 받는 건가요?”

“그게…. 후원을 받는 거라서….”

“아, 독지가가 계시군요. 날마다 이렇게 하시나요?”

“네, 일요일은 저희도 쉬어야 해서 일요일은 닫습니다.”

“누가 후원을 하는 거예요?”

사내가 잠시 나를 쳐다봤다. ‘누구신데 이렇게 질문을 꼬치꼬치 하시는가?’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저, 실은 제가 신문사 기자예요. 이런 일을 보면 꼭 사정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 직업병이라서요.”

“아, 기자분이세요? 전 또….”

사내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한 10년 전쯤 일이었어요. 그때는 어머니 혼자서 이 식당을 했었죠. 지금은 제가 식당을 물려받기 위해 같이 있고요. 어느 추운 날 오후 늦게 옷을 반듯이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와 칼국수를 시켰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국수를 다 먹은 후에 냅다 도망을 쳤대요. 골목 입구에 파출소가 있으니까 더 다급하게 도망을 치더랍니다. 어머니는 젊은 사람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럴까 싶어 오히려 저러다 넘어져 다치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한 달 후쯤 행색이 초라한 남자가 오후 늦게 들어와 칼국수를 주문하는데 딱 봐도 그때 그 남자였답니다. 어머니는 모른 척하며 칼국수를 내주었죠. 국수 양도 곱빼기로 푸짐하게 넣고, 김치도 큰 사발에 담았답니다. 가만히 보자니 국수 먹는 모습이 몹시 불안해 보여 이번에도 또 도망칠 것이 뻔해 보였답니다. 어머니는 그 남자가 국수를 거의 다 먹었을 때 사내 눈에 안 띄도록 주방에 앉아 ‘이번에는 뛰지 말고 그냥 걸어가, 괜찮아. 살다 보면 다 그럴 때가 있어’ 하시고는 화장실 가는 척 주방 뒷문으로 나가셨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들어오니 사내가 안 보이더랍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8년도 지난 재작년 어느 날 풍채가 눈에 띄게 좋은 남자가 양복을 번듯하게 차려입고 들어와 칼국수를 주문했답니다. 국수를 다 먹은 사내가 주방에 계신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여기 막 나올 때라 잘 알죠.”

“어르신,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지요?”

주방에서 나온 어머니는 ‘이 사람이 누군고?’ 하는 표정이셨습니다.

“글쎄요. 모르겄는디라?”

“제가 실은 8년 전 겨울에 여기서 칼국수를 먹고 두 번이나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오늘 국숫값 갚으러 왔습니다.”

“아…. 허허허, 그런 분들이 한둘이어야지라…. 뭐 그럴 수도 있는 건데….”

“제가 그때 두 번째 왔을 때 어르신께서 국수를 다 먹기를 기다리시다가 ‘뛰지 말고 걸어가라. 몸 다칠라. 그럴 때가 있지’라고 허공에다 말씀하시며 자리를 슬쩍 비우셨던 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날 그 말씀 때문에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아들의 말에 따르면 인천에서 가구공장을 하던 그 사내는 뜻밖의 부도를 크게 맞아 경찰과 채권자들을 피해 도망 다니던 신세였는데 그날 하도 배가 고파 어머니 혼자서 운영하는 식당을 골라 들어왔다고 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부도 문제가 해결이 잘 돼 다시 재기할 기회를 얻었고, 죽을힘을 다한 결과 오히려 부도 전보다 회사를 키우는 데 성공을 거둬 어머니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어르신, 비용은 제가 능력 되는 날까지 매달 댈 테니 십 년 전 그때 저처럼 배고픈 사람들에게 국수를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돈까지 대신다는데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걸 거절하겄소. 나도 이제 죽으면 극락에 가고 싶소. 재료비 원가만 대시오.”

그런 인연으로 시작해 오후 2시가 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배고픈 사람들에게 국수를 끓여준 지 벌써 2년이 됐는데, 오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순번을 정해 하루 서른 명 선을 유지하는 질서까지 생겨났다고 했다. 

[출처: ‘국수가 우습니?’, 최보기 작가, 블로그 ‘최보기의 책보기’]

하루에 같은 죄를 490번 용서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가 저지르는 잘못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용서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 용서는 어떤 힘으로 이루어질까요? 바로 자신도 부모로부터 용서받으며 자란 사람이고 자신이 부모로서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국수를 먹고 도망쳤던 그 사람은 세상에 대한 원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당연히 그렇게 해도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용서를 받고 나서는 이제 용서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용서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만약 이런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할머니의 희생은 무가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목자들에게 세상은 비정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을 만나게 해준 은혜로운 곳이 됩니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변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이고 성탄을 맞는 자세입니다. 믿음의 변화. 

어떤 ‘성탄 영상’이 유튜브에 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성탄절에 자녀들과 손주들로부터 메시지를 받습니다. 다들 바빠서 이번에도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들입니다. 몇 년을 그렇게 홀로 성탄절을 보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탄 전에 자녀들은 아버지의 ‘부고’를 받습니다. 자녀들은 그동안 부모에게 잘하지 못한 것에 가슴 아파하며 모두 집으로 모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아버지는 살아계십니다. 

“너희를 다 모이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더구나!”

형제들은 아버지와 함께 모여 다 함께 기쁨의 성탄을 즐깁니다. 세상 근심 걱정은 모두 잊고. 

이 짧은 영상이 어쩌면 성탄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주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그 이전에는 자녀들이 돈 버느라고 바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이제 다 받은 사람들이 됩니다. 아버지의 뜻만이 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우리를 모으시기 위해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습니다. 이 죽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 것을 잊고 하느님 자녀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행복에 참여합니다. 

제가 강론을 매일 쓰는 이유는 어머니께서 한 끼도 굶기신 적이 없기 때문이고 봉성체나 병자성사를 나가 조금이라도 더 충실하여지려는 이유는 홍수가 졌을 때 아버지께서 남겨진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강을 헤엄쳐 건너오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받은 사람입니다. '다' 받은 사람입니다. 받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줄 수 없습니다. 못 받은 사람에서 이제 다 받은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느님을 받으면 다 받은 것입니다. 다 받은 사람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구유의 그리스도를 만나고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 그분께서 우리 것이 되러 오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기다림 뒤에 성탄이 옵니다. 떠나지 않고서는 하느님 성탄의 참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너무나 크면 성탄으로 사랑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하느님께서 드디어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우리 삶의 자리에 구원자가 태어나셨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우리가 큰 빛을 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우리는 맛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믿지 않는다면 성장과 부활도 없습니다. 

성탄은 하느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시간이 이 땅에서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살아볼만한 삶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제발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부정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소식을 먼저 전하십니다. 말씀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였을뿐인데 가장 좋은 성탄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하느님을 믿습니다.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느님께 이 마음을 내어드립니다. 

사람의 본성 안으로 하느님께서 탄생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심으로 모든 마음은 희망의 길이 되었습니다. 평화의 성탄이 춥고 아픈 이웃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성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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