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2022년 12월 25일 (일) 주님성탄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25일
주님성탄대축일
성탄미사 생중계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52,7-10)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제2독서
(히브리서 1,1-6)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복음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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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복음
요한 1장 1-18절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평화방송 성탄미사
2022년 12월 25일 (일) 주님성탄대축일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신부 집전
명동성당 성탄미사
2022년 12월 25일 (일) 명동성당 11시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성탄미사 생중계
2022년 12월 25일 (일) 명동성당 낮 12시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팔로티회 성탄미사
2022년 12월 25일 (일) 주님성탄대축일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요한 복음의 서문에 해당하는 ‘로고스 찬가’로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강론 지침』, 115항 참조). 요한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을 하느님과 함께 “한처음”에 계시던 분, 곧 이전부터 존재하시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1장 14절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사건, 곧 강생의 신비를 설명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 문장을 원문에 가깝게 옮긴다면,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살펴볼 표현은 ‘사람’보다는 ‘살’이나 ‘육체’라는 의미에 조금 더 가까운 그리스어 명사 ‘사륵스’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신성을 가진 말씀의 육화 사건을 강조합니다. 이와 함께 ‘장막을 치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 동사 ‘스케노오’가 등장합니다.
‘장막’은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성전과,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그들과 맺으신 계약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장막 안에 현존하신다고 믿었습니다(탈출 25,8-9; 40,34; 1열왕 8,10-11.27 참조).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은 말씀이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그 육신 안에 머무르게 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이 동사를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 성탄 대축일을 보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을 통하여 드러난 구원의 신비를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도록 요청합니다. 본기도는 예수님 탄생의 이유와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교환에 참여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이 성탄절에 교회는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이 성탄절에 교회는 창조와 구원을 왜 같이 노래합니까?
그것은 창조 때의 신성을 상실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 상실한 우리의 신성을 되찾아 주러 오신 것이 주님의 성탄이고, 이 성탄의 신비에 우리가 참여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제, 밤 미사 예물 기도도 비슷하게 노래합니다.
“주님, 오늘 인간의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결합되었으니 이 축제의 제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시어 저희가 이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하소서.”
이것으로 교회 전례는 성탄 축제가 교환의 신비를 기리는 축제,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교환됨을 기리는 축제임을 거듭 얘기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사제가 포도주와 물을 섞을 때 하는 기도와도 같습니다.
“이 물과 술의 신비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케 하소서.”
그러므로 이 성탄 축일에 교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성탄 축일에 아무런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탄 축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 축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환입니까? 그것은 위치 교환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위치에 오시고 우리는 주님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위에서 내려오시고 우리는 위로 오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시소와 같이 주님이 내려오시자 우리는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우리는 하늘로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오시어 우리를 건져내신 것이요, 수렁으로 들어오시어 수렁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교환은 또한 신분 상승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는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여입니다. 신성에 대한 갈망도 없고, 신성에 참여할 의지가 없으면 그 교환은 물 건너갑니다.
여전히 땅에서 살고만 싶고, 여전히 인간적으로 살고 싶어 하면 우리는 주님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수렁에서 구출하지도 못하시고 우리를 인성에서 신성으로 끌어올리지도 못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 교환의 신비에 참여함은 마치 구출하러 온 소방관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잡듯이 불구덩이 속에 있고 수렁에 빠진 우리가 구원자 주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산타클로스가 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되새기는 날
사람의 성격은 어떻게 형성될까요?
환경에 따라 형성됩니다.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자녀는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의 환경은 정글과 같게 됩니다. 정글에 살면서 착해질 수는 없습니다. 피해받지 않으려고 움츠러듭니다. 일단 모든 사람을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으로 봅니다. 누군가 그의 환경을 바꿔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착해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MBN 특종세상 290회에 ‘서울 도심 폐가에 홀로 사는 수십억대 부자’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내용이 있습니다.
70대 초반의 한 어르신이 서울 금싸라기 땅 한 복판에 시가 70~80억 되는 땅에 세워진 폐가에서 쥐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분의 일상은 새벽에 나와 지하철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무료 급식과 약간의 돈을 받아 밤에 폐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사는 데는 자신의 땅이 자기 것이 아니라 누나들 것으로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누나들이 자신들의 명의로 다 찢어놓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누나들도 재산 때문이었는지 동생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나서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나들은 다 이민을 가서 법적으로 그 땅을 동생에게 넘겨준 상태입니다.
이 상처가 사람과 담을 쌓게 했고 충분히 많은 땅을 보유하고도 자신이 땅을 팔면 누나들이 빼앗아 갈까 봐 쥐가 들끓는 전기와 물도 안 들어오는 이 집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안 그럴까요? 이분에겐 어머니가 전부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신에게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갑니다. 사람이 환경입니다. 이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입니다.
방송에서는 이 동네에 오래 살았던 누님과 같은 분이 밤늦게까지 기다렸다가 과자를 주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어르신은 고마움을 느끼고 할머니가 사 오신 과자 중 하나를 도로 주며 100세까지 사시라는 말까지 전합니다. 이렇게 조금씩 신뢰가 쌓이면 어떨까요? 그동안 자기 피만 빨아먹으려고 덤볐다고 믿는 사람들 틈에서 조금은 편안한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사람, 내 안에 있는 사람이 나의 환경이 됩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 따라 내가 형성됩니다. 누가 독사가 들끓는 정글에서 평안을 유지하고 살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원죄로 살기에 다 모기로 태어납니다. 아무리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해도 세상이 그렇지 못하니까 자기 환경을 에덴동산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한 가지 방법, 에덴동산에서 오신 분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도 함께 계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합니다. 아드님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구원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며 우리 환경을 에덴동산으로 바꿔주시려고 합니다. 나는 지금 정글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에덴동산에 살고 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에덴동산을 정글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쁜 사람, 곧 나뿐인 사람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 자체, 그것으로 내가 에덴동산에 살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선악과를 바치는 것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면 착한 사람으로 조금씩 바뀝니다.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 사랑을 바로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인간부터 받아들이게 해야 합니다. 인간을 통해 오는 사랑의 맛을 받아들이면 이제 하느님의 사랑까지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변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이웃에게 해야 합니다.
영화 ‘아일라’는 6.25 전쟁 때 한 터키 병사가 부모를 잃은 아이를 아일라(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아버지처럼 잘 대해주며 지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지만, 60년 만에 다시 재회하는 실화를 다루었습니다. 아일라는 전쟁통에도 이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산타클로스가 되는 일이 바로 이런 일일 것입니다. 산타클로스는 성 니콜라우스 주교의 별칭입니다. 성 니콜라스 주교님도 아이들에게 주님께서 보이지는 않지만, 함께 계심을 느끼기 위해 몰래 선물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환경을 변화시켜주는 일이 가장 큰 고통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행복임을 오늘 보여주셨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산타클로스가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첫인상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
Merry Christmas~~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기쁜 오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에이미 커디 교수는 여러 실험을 통해 첫인상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발표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모든 부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단지 첫인상을 통해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인상을 좌우하는 두 가지 요소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따뜻함과 유능함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따뜻함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따듯함으로 먼저 신뢰를 얻어야 유능함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첫인상이 좋다, 나쁘다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를 결정합니다. ‘따뜻함’이란 무엇일까요? 배려하고, 인정하고, 지지해주는, 바로 사랑의 말과 행동이었습니다. 이 첫인상이 영원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 오랜 시간을 첫인상이 결정하는 것을 볼 때 ‘따뜻함’을 간직하고 표현하는 삶은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누구나 원하는 ‘따뜻함’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 중요한 ‘따뜻함’을 간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었을까요? 나를 낮추지 못하고 높이려고만 할 때, 남을 이해하기보다 나만 이해받으려 할 때, 남과 나누기보다 나의 것을 더하는 데에만 온 힘을 쏟고 있을 때, 내 안에서 ‘따뜻함’이 과연 보일까요?
오늘 주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셨습니다. 난방이 제대로 되어 있는 화려한 궁전이 아닌, 가장 초라한 마구간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며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너무나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탄생에서 ‘따뜻함’을 간직하게 됩니다. 우리를 지배하러 온 힘 있는 군주가 아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취하신 사랑 그 자체이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서 당신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당신과 함께할 수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따뜻한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 모범을 따라 따뜻한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안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선택은 나의 성장과 행복에 직접 관련돼 있다.
- 빅터 프랭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말씀은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살아계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빛과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우리가 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어맡기라는 믿음의 말씀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탄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머물러야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제대로 들을 때 말씀은 제대로 우리 가운데 태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다름아닌 말씀의 방식입니다. 말씀의 방식은 믿음이며 실천의 방식입니다.
말씀이 함께 하지 않고서는 성탄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말씀의 성탄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씀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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