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2022년 12월 27일 (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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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요한1서 1,1-4)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 오늘 복음
(요한복음 20,2-8)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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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느님, 복된 요한 사도를 통하여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계시하셨으니 저희에게 슬기를 주시어 생명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복음
요한복음 20장 2-8절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27일 (화)
김성현 마르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27일 (화)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27일 (화)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첫 번째 부활 이야기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첫 번째 부활 이야기입니다. 20장 1절에서 언급된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은 안식일 다음 날,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앞선 수난 이야기와 시간적 간격을 유지하면서 예수님 부활 이야기의 시작을 알려 줍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빈 무덤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합니다(20,1-18 참조).
오늘 복음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하여 증언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베드로보다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하였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는 베드로가 도착하기를 기다렸고, 그에게 빈 무덤을 먼저 확인할 기회를 줍니다. 여기에는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베드로가 자리하는 ‘첫 번째’ 위치, 곧 그의 권위와 역할(6,68-69; 21,15-19 참조)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의 첫 번째 부활 이야기에서 무덤에 먼저 도착한 다른 제자의 위치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20장 8절에서 “보고 믿었다.”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가시적 현실을 넘어 부활의 초월적인 신비 현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사람’으로 밝힙니다.
교회의 전통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요한 사도와 같은 인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복음 속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의 모습을 통하여 요한 사도가 증언한 믿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에게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식의 사랑과 우리 식의 사랑
요한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하고, 최후 만찬의 복음에서는 "그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요한뿐이었겠습니까? 오늘 같이 무덤에 달려간 베드로는 주님께서 사랑치 않으셨고, 열두 제자 중 다른 제자들은 주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다 사랑하셨어도 혹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혹 인간 중에는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은 그럴 리 없다는 것이 예수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유일하게 얘기하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나 예수님의 '사랑받은 제자'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이겠습까?
사랑을 주고받는 데 두 가지가 있고,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데 주지 않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와 사랑을 주는데도 받지 않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후자의 경우 정확히 얘기하면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는 거지요.
그러므로 누가 사랑을 받는 것은 양쪽이 일치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지요. 받고 싶은데 주고 싶지 않다고 하면 받을 수 없고 주고 싶은데 받고 싶지 않다고 하면 줄 수 없는 거지요.
그런데 사랑에는 기울기가 있습니다. 똑같이 사랑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와 자식 간에는 사랑의 기울기가 있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자식의 사랑보다 훨씬 크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자식을 사랑하는데 자식은 엄마만큼 사랑하지 않고, 심지어 엄마보다 이성이나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합니다. 이성이나 다른 사람의 사랑이 엄마의 사랑보다 못한데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랑을 받는 것이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줘도 내가 받아야지 받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받지 못함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거겠습니까? 하느님 식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 식의 사랑은 우리 식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고 그래서 귀로 고백을 들으며,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껴안으며 아무튼 감각되어지는 사랑입니다. 남녀 간에 '꼭 말로 표현해야 알아?'라고 하면 '말로 표현해야 할지!'라고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도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임을 강조하여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오신 분은 볼 수 없는 하느님이 볼 수 있는 분, 만져볼 수 있는 분으로 오신 거라는 얘기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와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너무도 감동과 감탄을 하며 감사드리며 그 사랑을 눈으로 보고 또 보고 싶어서 성탄 구유를 만들어 베틀레헴의 성탄을 재현하기까지 하였잖아요?
그러나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줘도 받아야 받는 것처럼 보여주셔도 봐야 보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려고 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기도, 관상기도.
오늘은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가장 사랑받는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 지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히 관상하는 단계에까지 올랐습니다. 요한 묵시록에 이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요한 1,17-18)
요한은 그리스도와 3년을 함께 하였고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어 비밀스러운 것까지 물을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리스도의 신성을 뵈니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이렇게까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고 정확히 기록한 이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보는 것을 우리는 ‘관상기도’라 합니다.
우리가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까닭은 그래야 그분처럼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상기도는 하느님의 신성, 곧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보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의 굳은살을 관상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부모님을 보는 것과 그분이 고생한 흔적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님이 아닌 부모님의 사랑, 곧 부모님의 영광을 보아야 부모처럼 성장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느님의 영광, 곧 사랑의 표현, 어쩌면 표징이라 부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1코린 3,17-18)
이는 분명 관상기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곧 ‘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분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피조물 본성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변하는 방법은 ‘보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세처럼 얼굴에 너울이 씌워져 있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어땠어야 할까요? 부모님의 영광, 곧 부모님의 사랑을 보았어야 합니다. 처음에 부모님을 의심할 때는 부모님처럼 되지 않습니다.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리 밑으로 진짜 어머니를 찾으로 가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굳은살을 통해 부모님의 영광을 볼 때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 사랑을 믿고 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도착합니다. 물론 젊은 요한이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궁금하기도 했을 테지만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보고 나서야 요한도 들어갑니다.
요한도 분명 무언가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장으로 뽑아주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이 능력이 오히려 관상기도를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관상기도는 사실 원하는 사람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믿지 못하면서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보면 애정결핍으로 부모의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부모를 괴롭히는 금쪽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아이들이 부모를 괴롭히는 이유는 단 하나, 불안함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녀임을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부모는 더 지쳐갑니다. 그래서 더 조를수록 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지적 장애가 있는 아버지가 아들이나 딸을 혼자 키울 때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힘들게 자신을 키운 부모의 손을 잡아주고 발톱을 깎아주고 어깨를 주물러줍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더 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힘이 냅니다. 그렇게 더 높은 사랑의 표징이 나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표징을 주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모든 것은 내어주시는 하느님은 지칩니다. 그러면 그들을 관상으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관상기도는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해서 더 요구할 것이 없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먼저 지금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려 하지 않으면 하느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영광은 발밑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모님의 발을 만져보고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면 그 영광을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볼 때는 라면 한 그릇도 그분들의 살과 피가 섞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분들께서 주시는 모든 사랑 안에서 그분들을 찾아내게 됩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두 분이 써 보내신 편지는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부모의 영광은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것에 담겨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따라서 내가 겸손하여지지 않으면 그분들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위만 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지면 그분의 영광을 봅니다. 제가 어머니께 드린 용돈을 어머니는 쓰셨을까요? 저에게 다시 주기 위해 하나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다 모아놓으셨습니다. 감사해야 그분이 지치지 않고 더 큰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 하였습니다. 무덤은 그저 그분께서 묻혔고 지금은 부활하셔서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그분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무덤뿐입니다. 그녀는 무덤에서 한없이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분이 남긴 자취가 무덤뿐이었기에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남겨놓은 사랑에 머무를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관상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 영광을 찾으려 해야 할까요? ‘성체’입니다. 보잘것없는 밀떡이지만 그 밀떡 안에 완전한 하느님 신성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았냐고 물으면 신자들은 못 보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려는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직접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육체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남겨놓고 간 흔적에서 그분을 발견하려고 머물러야 합니다. 이 겸손함이 진정 하느님을 보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감옥에서 탈출하는 방법
나의 자유를 가로막는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감옥 간수를 매수해서 탈옥한다.
2) 가장 실력 좋은 변호사를 선임해서 감옥에서 벗어난다.
3) 다른 수감자들과 친해져서 탈옥을 함께 계획하고 실행한다.
아마 대부분 두 번째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법대로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의 감옥만을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의 자유를 가로막는 감옥에 갇혀 있게 만드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도록 나를 가둬놓고 있습니다. 돈, 명예, 욕심, 죄….
이런 것에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감옥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매일 ‘돈’만을 외치고 생각하고 있다면 ‘돈’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매번 ‘명품’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명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가득하다면 ‘미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탈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만을 바라보며,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라고 알려진 요한 사도는 오로지 주님 안에만 있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늘 예수님 곁에 있었고,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무덤 앞으로 뛰어갔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무덤 안에 먼저 들어가는 것을 베드로에게 양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제자이니 무덤에 먼저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먼저 무덤에 도착했으니 그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베드로를 존중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 안에서만 머물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세상의 틀이 아닌, 오로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가 선포하신 ‘영원한 생명’(1요한 1,2 참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걱정은 출처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를 약화시키는 것이요, 용기를 앗아가는 것이요, 인생을 단축시키는 것이다.
- 존 란카스터 스팔딩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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