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하느님께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주님,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2025년 2월 13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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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2,18-25)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오늘 복음
(마르 7,24-30)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오늘 말씀 카드
(마르 7,29)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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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 2,18-25
오늘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5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너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라. 그 말씀에는 너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
마르 7,24-30
오늘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2월 13일
박민준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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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서로 기대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
오늘 창조 이야기는 며칠 전 들은 사제계 전승의 창조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전개 방식을 보입니다. 야훼계 전승에 따른 이 창조 이야기에서는 인간 창조, 특히 여자의 창조 이야기가 두드러집니다.
먼저 여자가 창조된 동기와 그 과정을 눈여겨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고자 하십니다.
알맞은 협력자는 종속된 자도 아니고 지배하는 자도 아닌 동등한 관계로서, 히브리 말로는 ‘말 없는 대화로도 가능한 직접적 관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든 온갖 짐승과 새들은 사람에게 알맞은 협력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서 그와 동등한 존재를 만들어 그에게 데려다주십니다. 결국 동등한 남자 사람의 뼈로 지어진 여자는 흙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존재인 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정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15년 필라델피아 세계 가정 대회). 이는 인간이 혼자서는 온전한 피조물이 아니고 다른 인간과 맺는 협력 관계 안에서, 곧 친교 안에서만 온전한 인간일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인간’(人間)의 한자 말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서로 기대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의 깊은 의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상호 관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이 되는 친교의 신비가 성삼위의 친교를 닮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극을 받고, 보고 배우라고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것이 맞을까? 맞는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을지라도 복음사가들이 이 복음은 빼고 전해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복음을 그대로 전해준 뜻은 뭘까?
실제로 이방인을 상대로 쓴 루카 복음은 이 얘기를 빼고 전해주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신 뜻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저는 ‘먼저’라는 말에 처음으로 눈길이 갔습니다. 지금까지 이 복음을 정말로 여러 차례 읽었지만 실로 처음으로 ‘먼저’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먹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들을 먼저 먹이시겠다는 뜻이고, 그런 다음 이방인들도 먹이시겠다는 뜻입니다.
저희 식당을 예로 들면 봉사자들이 손님보다 먼저 식사합니다. 그것은 먼저 먹고 봉사하라는 뜻이고 먼저 먹고 힘을 내어 봉사하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주님께서도 유대인을 편애한 것이 아니고, 이방인을 홀대한 것이 틀림없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강아지 운운한 것은 너무 모욕적인 것이 아닐까요?
이것도 모욕주신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고 그렇게 믿어야 할까요? 그리 믿어야겠지요. 주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믿어야겠지요.
어떤 깊은 뜻이? 그것은 여인의 참 겸손과 큰 믿음을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 그의 참 겸손과 큰 믿음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당시 이교도 여인이 유대 남자를 지나가다가 만난 것이 아니라 찾아와서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그녀의 겸손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각오했던 것이고 주님의 모욕도 감수하게 하였던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하는데, 소문만 듣고도 예수님을 외간 남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믿었을 겁니다.
자기의 청을 지나치시지 않을 분이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강아지라고 하는 이교도 여인의 이런 겸손과 믿음을 하느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사가도 후대의 우리에게도 여인의 이런 겸손과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을 겁니다.
자극을 받으라고.
보고서 배우라고.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 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개”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로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7,28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주님!
거절당할 때
꼬인 문제가 더 꼬여갈 때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배신감이 들 때
실망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냉대와 무시에도
겸손과 끈기와 믿음으로
오히려 간절하게 하소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변화는 희망을 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좋은 청을 곧바로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묵상하려 합니다.
마르코 복음 7장 24-30절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악령에 사로잡힌 딸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하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 딸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자라도록 하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희망을 지속하게 하시는 이유는 결국 ‘하고 싶다’가 ‘할 수 있다’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성장하면,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세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은 믿음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우리는 그것 없이는 결코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희망이 지속될 때, 그것이 점점 더 깊은 믿음으로 자라나며,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사울 왕의 이야기는 믿음과 희망이 부족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여 왕위를 잃게 됩니다. 반면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거절당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간청했고, 결국 믿음이 드러나면서 딸이 치유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희망이 결국 믿음을 키우고, 믿음이 행동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은 처음에는 단순히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준비하며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화합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감옥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며 작은 도서관을 확장시킵니다. 도서관을 키우기 위해 교도소장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교도소장은 이를 허락하게 되고, 죄수들에게 지식을 나눌 기회가 생깁니다. 앤디는 또한 한 죄수의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도와줌으로써, 희망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이후 그는 감옥의 방송 시스템을 해킹하여 전 교도소에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틀어주며, 감옥 안의 모든 죄수들에게 자유와 희망의 순간을 선물합니다.
앤디는 말합니다. “희망은 좋은 것이고, 아마도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희망이 단순히 개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변까지 밝히는 힘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마더 데레사 또한 처음에는 한 명의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작은 희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녀는 거리에서 굶주린 이들을 보며 돕고 싶었고, 이 작은 희망이 그녀의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를 가난한 이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라는 희망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 사람에게 밖에 사랑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일을 위대한 사랑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도회를 세우게 되었고, 그녀의 봉사는 전 세계로 확산하였습니다. 그녀의 희망이 믿음으로 변화되었고, 그 믿음은 결국 사랑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사명에 동참하며 함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작은 희망이 어떻게 믿음이 되고, 믿음이 결국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어릴 적 시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품었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녀의 불굴의 의지는 결국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화하였고, 헬렌 켈러는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위대한 교육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을 품는 순간 우리는 이미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개인적인 극복을 넘어서 장애인을 위한 교육과 인권운동을 펼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희망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행동으로 이어져 사랑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는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1코린토 13,13)
베드로 사도는 희망했습니다. 물 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잘 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믿음을 성장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을 본 다른 사도들을 변화시키는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끝까지 희망하기를 바라시며, 그 이유는 믿음을 성장시켜 결국 세상을 더 밝히는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사랑으로 성장하여 세상을 밝히는 존재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100km라 생각했을 때, 시속 20km로 날아가는 비둘기는 서울에서 천안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답은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철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6시간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 선생님께서는 한숨을 내쉬며 “틀렸지. 100을 20으로 나누니 5시간이 정답이지. 이렇게 쉬운 것도 틀리면 어떻게 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철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비둘기도 서울에서 천안까지 날아가려면 중간에 한 시간 정도는 쉬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선생님 5시간이 정답일까요? 아니면 아이의 6시간이 정답일까요? 아이의 상상력이 더한 대답이 더 정답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대답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세상의 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만 진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눈과 귀를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만 하느님의 지혜 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을 예수님 소문을 듣고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셨고, 또 사랑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부인을 외면합니다. 단순히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말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이 부인은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교도로 무시하고, 개로 비유하며 멸시하던 민족 출신의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했던 대로 예수님도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아마 이 부인 역시 이런 무시와 냉대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지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의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부인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간절히 주님께 매달릴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다면 주님께 굳이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체면만을 생각했다면 모욕적인 수치심에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사랑이 믿음을 만들어 하느님 안에 머물게 해 줍니다.
오늘의 명언
도전은 인생을 흥미롭게 만들며, 도전의 극복이 인생을 의미있게 한다
- 조슈아 J.마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소중함이 있을 뿐입니다. 부스러기같은 작은 것들이 만들어가는 소중한 세상입니다. 단지 부스러기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뿐인데 먹고사는 일이 거룩한 성체성사처럼 거룩하게 다가옵니다.
이방인 한 여인의 간절한 믿음이 딸아이를 온전하게 되돌려놓습니다. 겸손한 부스러기의 믿음은 과장되지 않습니다. 셀 수 없는 부스러기의 믿음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부스러기의 역사입니다. 큰 것에만 길들여진 우리를 부스러기의 겸손함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우리를 초대하며 참된 믿음을 일깨워줍니다.
부스러기는 예수님으로부터 가까이 있습니다. 부스러기조차 버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시각의 변화이며 부스러기의 일상이 모여 따뜻한 사랑의 일상이 됩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안 보려 하기에 못 보는 것입니다. 부스러기까지 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부스러기까지 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은총의 부스러기와 함께 주님의 겸손과 사랑을 배우는 은총의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부스러기의 믿음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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