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하느님께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주님,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2025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세계 병자의 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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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세계 병자의 날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1,20―2,4ㄱ)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의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오늘 복음
(마르 7,1-1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오늘 말씀 카드
(창세 1,29)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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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 1,20―2,4ㄱ
오늘 제1독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의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20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에는 생물이 우글거리고, 새들은 땅 위 하늘 궁창 아래를 날아다녀라.”
21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큰 용들과 물에서 우글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22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워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닷샛날이 지났다.
2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5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집짐승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3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2,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3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4
하늘과 땅이 창조될 때 그 생성은 이러하였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마르 7,1-13
오늘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2월 11일
이원희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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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살아 움직이는 전통 새롭게 만들기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자주 대립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 집단의 특징은 목적과 수단을 뒤바꾼다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사람의 관계가 그렇고,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전통과 계명, 입술과 마음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스스로 사회 지도층이라는 그들은 왜 그렇게 본래의 목적을 무시하고 수단에 집착할까요?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율법과 전통을 지키는 척하지만 ‘코르반’이라는 주술적 공식 하나로, 곧 하느님께 바친다는 명분으로 부모에게 줄 것을 빼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숨은 지향을 꿰뚫어 보시기에, 자기네 사리사욕을 위하여 사람의 전통을 내세워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전통은 ‘어떤 집단에서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사상이나 관습, 행동 등이 계통을 이루어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습은 ‘굳어진 개별적인 행동 양식이나 습관’을 말합니다.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져 전해 내려오는 모든 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대마다 자기 시대에 바람직하고 유익한 것을 살려 가면서 창의적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발전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많은 전통과 관습이 있습니다. 박물관과 고문서고에 갇힌 전통이 아니라 이 시대 신앙인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며 복음과 인간의 구원이라는 목적에 봉사하는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기 좋을 대로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오늘 복음은 창세기 1장의 후반부입니다. 그런데 우리 전례가 1장을 어제와 오늘에 이어 둘로 나누어 읽은 것은 단지 길이가 길기 때문이 아니라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창세기는 무생물의 창조 얘기입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생물이 아니고 번식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내릴 대상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동물이 아닌 무생물은 번식하고 번성하도록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주시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이런 구분에 대해 저는 유감이 없지 않습니다. 돌덩이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 것에 유감이 있습니다.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생물만 번식하고 번성해야 할 존재로 여기고 복을 주셨다는 얘기인데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삐딱하게 얘기하는 것인데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뒤 참 좋았다고 하신 것에 관해서도 왜 참 좋다고 하시는 건지 생각됩니다.
그리고 번식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주시는데도 그 복을 거부하며 번식하고 번성하려고 하지 않는 오늘날 신인류가 뭐가 보기 좋다고 하시는 겁니까?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셨는데 오늘날 인류가 어떤 면에서 하느님 모습을 닮았으며 온갖 피조물을 잘 다스리고 있다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인간과는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와 같이 갈수록 교만해지고 하느님 사랑은 닮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피조물을 다스립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다스려야 하는데 자기 좋을 대로 부려 먹는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이것이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되는 자기중심의 죄이고, ‘하느님 보시기 좋을 대로’에 불순종하게 하는 교만의 죄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이점을 꼬집으십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데 인간의 전통을 근거로 그리고 하느님을 핑계 대며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코르반’이란 어떤 물건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아무나 사용치 못하게 한 것인데 ‘코르반’을 핑계로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당대 전통과 사람들을 꼬집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라고 꾸짖으시는데 오늘 이 말씀이 제겐 ‘레오나르도, 너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라는 말로 정확히 들립니다.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되는 이 ‘자기 좋을 대로’ 곧 자기중심을 오늘 우리는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방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3,22절에 나옴)로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곧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이는 단지 위생이나 청결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구전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전통관습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습을 앞세우는 어긋난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의거하여 음식물만 깨끗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잘못 적용하여 손을 씻는 예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7-9)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규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규범’이나 ‘자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정신’과 ‘하느님의 뜻’을 묻고 그분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7,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은 아이처럼 희망하라.
어렸을 때 들었던 뉴스인데 충격적이어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아내가 버스 추락사고로 죽었던 그곳에서 남편이 며칠 뒤에 투신하여 자살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살은 죄라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여인이 없으면 못 살겠다는 순정남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어떤 이들은 그 잃은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끙끙 앓으며 평생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희망’한 것이 아니라 ‘욕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희망과 욕망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병자들과 그 가족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병이 낫기를 희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희망한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병이 치유되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망하지 않고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희망하는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해도 포기가 빠릅니다. 아이가 엄마 옷자락을 잡고 이것저것을 사달라고 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것은 사 주고 저것은 사주지 않습니다. 엄마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금방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이렇게 희망하는 대상이 창조자가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포기할 줄 모릅니다. 못내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합니다. 희망은 바라기도 잘하지만,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곧 포기하고 다른 것을 희망합니다.
정약용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세종대왕, 이순신 다음으로 큰 인물이 될 수 있었고 사실 그렇게 큰 인물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정조의 아버지는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입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영조와 신하들의 등쌀 밑에서 자랐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고 그 방법으로 집현전이란 학문 연구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해 왕권을 굳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정약용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놀리기까지 하며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정조의 숙원사업인 수원성을 축조할 때 정약용이 짓게 맡긴 것은 그만큼 그를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조의 노력을 싫어했던 정치 세력들은 어떻게 하면 새로운 세력을 몰아낼까 궁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발견된 것이 천주교입니다. 정조가 키운 남인과 실학자들이 천주교에 엮인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정약용은 배교함으로써 간신히 죽음은 면했습니다. 그러나 관직을 떠나있어야 했습니다. 정조는 시간이 지나면 그를 다시 부르겠다고 조용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궁궐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들어가기 하루 전에 정조가 죽습니다.
절망할 수도 있는 정약용은 계속 살길을 모색하지만, 이번엔 더 큰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정작 그는 배교했음에도 그의 가문은 벼슬길이 막히는 폐족이 되고 정약용은 무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좌절했을까요? 그는 18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는 엄청난 책들을 씁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이 유배 생활하는 동안 이룬 것입니다. 그가 쓴 책이 몇 권인지 아십니까? 무려 500여 권에 달합니다. 약 2주에 한 권씩 책을 쓴 셈입니다.
그가 온종일 양반다리로 앉아 책만 썼기에 복숭아뼈가 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앉아서는 책을 쓸 수 없어서 일어서서 책을 썼습니다. 그의 가문에 폐족이 되었지만,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누명이 벗겨질 테니까 희망하며 공부하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자녀들은 늦게나마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원나라에 항복하겠다고 고려의 세자가 황제를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의 40년간 버틴 것도 대단하지만 황제에게 노쇠한 임금의 아들이 대신 간 것입니다. 이때 몽골의 황제는 죽고 두 인물이 서로 황제가 되기 위해 힘을 겨루는 중이었습니다.
이때 고려의 세자는 많은 정보를 수집해 앞으로 황제가 될 한 인물을 선택하여 그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이는 황제가 되는 중요한 입지를 주는 항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자도 이것을 이용해 고려는 원나라의 변발과 같은 것을 따르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항복하는 중에도 협상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고 희망해야 할 것은 희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희망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희망하는 자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을 희망합니다. 희망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갖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파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모든 것을 다 줄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실제로 희망과 믿음을 지닌 신앙인이었다고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의 우상은 무엇일까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란돌프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삼촌은 베네딕토회 몬테카시노 수도원 원장이었고, 성인의 부모는 그가 귀족 집안의 아들로서 교회에 들어가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삼촌의 자리인 수도원 원장 자리를 이어 받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세속적인 영광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대신 청빈한 삶과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에 입회하려 했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완전히 버리는 삶이었습니다.
부모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을 성에 가두기도 하고, 매춘부를 고용해서 성인을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결국 도미니코회에 들어가 세속을 벗어난 학자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충족시켜 주지 않는 우상을 섬기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돈, 권력, 즐거움, 영광…. 성인은 이런 우상이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셨고 또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우상보다 주님만을 따라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성인의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제자들이 더러운 손으로 음식 먹는 것을 따집니다. 왜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사실 조상들의 전통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조상들의 전통이 결코 하느님의 뜻보다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이사 29,13)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기 위해서는 조상들의 전통에 충실한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 마음이 중요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따르지도 않으면서, 아니 그 뜻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조상들의 전통만 지키면 그만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 지키는 조상들의 전통은 하나의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성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자기를 변화시킬 깊은 성찰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나의 우상은 무엇일까요? 주님보다 첫째 자리에 놓이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모습들이 행복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오늘의 명언
시간은 금이다. 당신의 시간을 어디에 쓰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라
- 벤자민 프랭클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를 헛되이 섬긴다.
우리 자신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고 살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 물음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반성입니다.
신앙의 빛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정신으로부터 옵니다. 저마다 복음의 자리에서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계명의 진정한 첫걸음입니다.
그것이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우리의 위선에서 벗어나는 참된 길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계명은 마음 깊숙히 존재하는 사랑을 만나게 합니다. 계명의 무게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의 무게입니다.
가벼운 전통은 쉬이 왜곡되어 너무 빨리 다른 길로 빠져나가 버립니다. 좋은 전통도 좋지만 정신을 곧추세우는 주체는 언제나 계명의 정신입니다. 계명의 정신은 공동체를 살립니다.
계명은 지식이 아닌 생명입니다. 생명의 발동이 하느님을 섬기는 진정한 계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이란 하느님의 계명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한 시대를 유행했던 전통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폐기될 수 없고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계명입니다. 영원한 사랑으로 영원하신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사랑의 새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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