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는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네.
주님, 복된 동정녀 스콜라스티카를 기억하며 비오니 그를 본받아 저희가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주님 사랑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5년 2월 10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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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1,1-1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 오늘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오늘 말씀 카드
(마르 6,56)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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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 1,1-19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15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마르 6,53-56
오늘 복음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2월 10일
주세환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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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피조물을 정성껏 돌보시는 하느님
기후 위기로 말미암아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말하는 우리 공동의 집 지구가 생태 위기에 놓인 시대에 읽는 창조 이야기가 가슴 아리게 다가옵니다. 오늘 읽는 창조 이야기에서는 사제계 전승의 특징대로 하느님의 창조 활동 전반부가 규칙적인 반복에 따라 질서 있는 작업으로 드러납니다.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창세 1,2) 심연 위를 감도는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혼란(카오스)을 질서(코스모스)로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창조 질서가 인간의 죄로 훼손된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것들을 버려두시지 않고 계속 돌보십니다. 창조의 하느님께서는 또한 섭리의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을 정성껏 돌보시는 하느님을 잘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마다’ 병자들을 데려오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됩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서 돌봄의 임무를 위임받은 인류는 그 책임을 소홀히 한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 종류대로”(1,11) 조화롭게 땅에 돋게 하신 “푸른 싹”(1,12)을 뒤섞어 유전자 변형이나 종자 조작 등으로 창조 질서를 혼란에 빠트렸고, 기후 위기는 종자 위기로, 식량 위기로, 인류 생존의 위기로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충실한 청지기로서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구원의 보편 성사로 교회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창조도 하시고 구원도 하시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지난 몇 주 그러니까 연중 1주부터 우리는 히브리서를 내내 들었고, 오늘부터 또 몇 주 그러니까 연중 7주까지 우리는 창세기를 듣는데 오늘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얘기를 우주의 기원 얘기로만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의 형제들을 창조하신 얘기로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나의 창조와 시작 얘기로만 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구원도 하실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겐 어떤지 모르지만 창조 얘기가 오늘 제게는 하느님께서 별로 성의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나도 너무 쉽게 무성의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너무 쉽게 그러니까 생기라 하면 바로 생기는 그런 구조로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창세기 2장처럼 손도 안 쓰고, 머리도 안 쓰고, 애도 안 쓰고 그저 말 한마디로 창조하신 것 같지 않습니까? 도자기공이 도자기를 만드는 것보다도 더 쉽게 만드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분이나 약하게 태어난 분들은 사랑도 없이 애쓰지도 않고 불량품으로 나를 만들어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그러셨을 리 없다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내지르신 분이 아니라고 믿어야 하고, 그것이 진정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고 우리의 올바른 믿음입니다.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세기의 표현은 사랑이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크신 능력으로 창조하셨음을 얘기하려고 함이고, 앞에서 인용한 지혜서는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다.”라고 얘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받았다.”
이들은 치유만 청했을 뿐인데 하느님은 구원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연중 감사송은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하느님은 사랑 없이 창조하지 않으시고, 창조만 하고 사랑을 거두지도 않으시며, 사랑으로 창조하신 당신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인자로이 구원하십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의 병자들처럼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오늘 <독서>는 태초의 ‘창조’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의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설교집).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곧 ‘믿음으로 새롭게 창조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6,56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은 아이처럼 희망하라.
어렸을 때 들었던 뉴스인데 충격적이어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아내가 버스 추락사고로 죽었던 그곳에서 남편이 며칠 뒤에 투신하여 자살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살은 죄라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여인이 없으면 못 살겠다는 순정남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어떤 이들은 그 잃은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끙끙 앓으며 평생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희망’한 것이 아니라 ‘욕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희망과 욕망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병자들과 그 가족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병이 낫기를 희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희망한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병이 치유되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망하지 않고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희망하는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해도 포기가 빠릅니다. 아이가 엄마 옷자락을 잡고 이것저것을 사달라고 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것은 사 주고 저것은 사주지 않습니다. 엄마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금방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이렇게 희망하는 대상이 창조자가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포기할 줄 모릅니다. 못내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합니다. 희망은 바라기도 잘하지만,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곧 포기하고 다른 것을 희망합니다.
정약용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세종대왕, 이순신 다음으로 큰 인물이 될 수 있었고 사실 그렇게 큰 인물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정조의 아버지는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입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영조와 신하들의 등쌀 밑에서 자랐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고 그 방법으로 집현전이란 학문 연구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해 왕권을 굳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정약용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놀리기까지 하며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정조의 숙원사업인 수원성을 축조할 때 정약용이 짓게 맡긴 것은 그만큼 그를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조의 노력을 싫어했던 정치 세력들은 어떻게 하면 새로운 세력을 몰아낼까 궁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발견된 것이 천주교입니다. 정조가 키운 남인과 실학자들이 천주교에 엮인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정약용은 배교함으로써 간신히 죽음은 면했습니다. 그러나 관직을 떠나있어야 했습니다. 정조는 시간이 지나면 그를 다시 부르겠다고 조용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궁궐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들어가기 하루 전에 정조가 죽습니다.
절망할 수도 있는 정약용은 계속 살길을 모색하지만, 이번엔 더 큰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정작 그는 배교했음에도 그의 가문은 벼슬길이 막히는 폐족이 되고 정약용은 무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좌절했을까요? 그는 18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는 엄청난 책들을 씁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이 유배 생활하는 동안 이룬 것입니다. 그가 쓴 책이 몇 권인지 아십니까? 무려 500여 권에 달합니다. 약 2주에 한 권씩 책을 쓴 셈입니다.
그가 온종일 양반다리로 앉아 책만 썼기에 복숭아뼈가 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앉아서는 책을 쓸 수 없어서 일어서서 책을 썼습니다. 그의 가문에 폐족이 되었지만,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누명이 벗겨질 테니까 희망하며 공부하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자녀들은 늦게나마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원나라에 항복하겠다고 고려의 세자가 황제를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의 40년간 버틴 것도 대단하지만 황제에게 노쇠한 임금의 아들이 대신 간 것입니다. 이때 몽골의 황제는 죽고 두 인물이 서로 황제가 되기 위해 힘을 겨루는 중이었습니다.
이때 고려의 세자는 많은 정보를 수집해 앞으로 황제가 될 한 인물을 선택하여 그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이는 황제가 되는 중요한 입지를 주는 항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자도 이것을 이용해 고려는 원나라의 변발과 같은 것을 따르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항복하는 중에도 협상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고 희망해야 할 것은 희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희망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희망하는 자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을 희망합니다. 희망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갖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파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모든 것을 다 줄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실제로 희망과 믿음을 지닌 신앙인이었다고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은 관점의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다.
30년 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친한 친구가 첫째 딸을 얻었을 때, 다른 친구들에게 얼마나 딸 자랑을 했는지 모릅니다. 너무 예쁘지 않냐고, 너무 똘망똘망하지 않냐면서 웃으며 친구들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었지요
“정말, 딸 바보다.”
30년이 지나서 정말 오랜만에 이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30년에 우리에게 보여줬던 딸 바보의 모습이 생각나서 물었습니다.
“그 예쁘고, 똘망똘망한 따님은 잘 계신가?”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웬수 때문에 내가 환장하겠다.”
관점이 바뀌면 인간을 보는 눈도 바뀐다고 합니다. 처음 연애할 때는 다 아름답고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투고 나면 어떨까요? 그렇게 아름답지도 또 멋지지도 않습니다. 나의 원수로만 보입니다. 관점이 바뀐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로 사랑이라는 감각을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멋지게 보입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관점의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데려왔고,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옷자락 술은 예부터 유다인들이 몸에 착용한 ‘성구갑’과 건물 문설주에 붙이는 ‘메주자’와 더불어 일상에 녹아 있는 신앙의 도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위한 증표였던 것입니다.
이제 옷자락 술에 손을 대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옷자락 술에 손을 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올라가셔서, “자~ 이제 내 옷자락 술에 손을 대어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려면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야 합니다. 자기를 낮춘 사람만이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기를 낮춰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의 변화를 통해서 구원의 선물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누구나 약속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이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사람의 출발지는 분명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이웃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사람 속에 구원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고 사람은 사랑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파본 사람은 압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치유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픈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사람들의 도움이 우리들의 따뜻하고 간절한 고백이 되고 기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서로를 치유하길 바라십니다.
치유는 치유로 이어집니다. 아픔을 모르는 치유가 없고 고통을 모르는 구원이 없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에는 인격의 여정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아픔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현실을 하느님께 진실로 맡기는 것입니다.
전부를 맡기는 소중한 날 되십시오. 사람의 오늘이란 하느님께 내맡기는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내맡김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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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8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08 |
25/02/07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07 |
25/02/0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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