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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
21년 8월 4일 (수)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1786년 프랑스 리옹의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1815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겸손하고 충실한 목자로 존경받았습니다. 그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습니다.
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산 그에게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전해집니다. 1859년 선종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시성하고, 4년 뒤에는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찰한 뒤 이스라엘 자손들이 투덜거리자,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하고 광야에서 최후를 맞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위해 자비를 청하는 가나안 부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딸을 고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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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주님, 당신의 사제들이 의로움의 옷을 입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환호하게 하소서.
제1독서
민수 13장 1-2절, 25-33절 / 14장 1절, 26-30절, 34-35절
그들은 탐스러운 땅을
업신여겼다.
그 무렵 주님께서 파란 광야에 있는
1
모세에게 이르셨다.
2
“사람들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찰하게 하여라. 각 지파에서 모두 수장을 한 사람씩 보내야 한다.”
25
그들은 사십 일 만에 그 땅을 정찰하고 돌아왔다.
26
그들은 파란 광야 카데스로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왔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과 온 공동체에게 그 땅의 과일을 보여 주면서 보고하였다.
27
그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우리를 보내신 그 땅으로 가 보았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곳 과일입니다.
28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곳에서 아낙의 후손들도 보았습니다.
29
아말렉족은 네겝 땅에 살고, 히타이트족과 여부스족과 아모리족은 산악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족은 바닷가와 요르단 강 가에 살고 있습니다.”
30
칼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진정시키면서 말하였다.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31
그러나 그와 함께 올라갔다 온 사람들은,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하면서,
32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기들이 정찰한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그 땅은 주민들을 삼켜 버리는 땅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땅에서 본 백성은 모두 키 큰 사람뿐이다.
33
우리는 또 그곳에서 나필족을 보았다. 아낙의 자손들은 바로 이 나필족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
14,1
온 공동체가 소리 높여 아우성쳤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26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7
“이 악한 공동체가 언제까지 나에게 투덜거릴 것인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에게 투덜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28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29
바로 이 광야에서 너희는 시체가 되어 쓰러질 것이다. 너희 가운데 스무 살 이상이 되어, 있는 대로 모두 사열을 받은 자들, 곧 나에게 투덜댄 자들은 모두,
30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34
너희가 저 땅을 정찰한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너희는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 그제야 너희는 나를 멀리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35
나 주님이 말한다. 나를 거슬러 모여든 이 악한 공동체 전체에게 나는 기어이 이렇게 하고야 말겠다. 바로 이 광야에서 그들은 최후를 맞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죽을 것이다.”.
화답송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조상들처럼 저희도 죄를 지었나이다. 불의를 저지르고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저희 조상들은 이집트에서, 당신의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였나이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그분의 업적을 어느새 잊어, 그분의 분부를 따르지 않았네. 사막에서 그들은 탐욕을 부리고, 광야에서 하느님을 시험하였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이집트에서 위대한 일을 하신 분,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잊었네. 함족 땅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갈대 바다에서 이루신 두려운 일들을 잊었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당신이 뽑은 사람 모세가 아니라면, 그들을 없애 버리겠다 생각하셨네. 모세는 분노하시는 그분 앞을 막아서서, 파멸의 진노를 돌리려 하였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알렐루야!
복음
마태 15장 21-28절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영성체송
행복하여라, 주님이 돌아와 보실 때에 깨어 있는 종! 주님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기시리라.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요한 마리아를 기리며 받아 모신 천상 음식으로 저희가 힘을 얻어 믿음을 온전히 간직하며 구원의 길을 충실히 걷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4일 (수)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4일 (수)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4일 (수)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모든 이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십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로,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자마자 마귀가 호되게 걸린 딸을 둔 가나안 부인이 나타나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나안 부인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다윗의 자손’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주님’이라는 호칭을 한꺼번에 사용하며 간청합니다. 얼마나 다급해서였을까요? 그녀는 예수님 일행을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매달립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복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선민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교도인 가나안 여인이 자비를 얻으려면 수모를 참고 받아야 하거나, 유다인 자녀들이 먼저 배불리 먹은 뒤에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 이야기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가르침(마태 15,1-20 참조) 다음에 나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음식 규정을 무색하게 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를 암시합니다. 또한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졌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 그녀의 딸을 고쳐 주시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는 민족이나 종교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
오늘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공동체적인 열등감에 빠져 메뚜기 같다고 자신을 비하하고 자기들은 이방인보다 약하니 싸움도 전에 그들을 이길 수 없다며 패배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열등함과 열등감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객관적인 사실로서 열등한 것이 사람에게는 다 있고, 민족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키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크다거나 이방인의 군대가 이스라엘보다 숫자적으로 많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기에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이 열등한 것은 분명하지만 열등감은 아주 나쁜 것이고 그래서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며 패배주의에 빠져서는 더더욱 안 될 것입니다.
왜냐면 감정이란 부분을 전체로 확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는 천하를 다 가진 것처럼 좋다가도 뭐 하나 잘못되면 기분 전체가 잡쳐버리고 그래서 기분 잡쳤다고 하지요.
열등감도 감정이기에 전체를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키가 작다면 키만 작은 것일 뿐 존재가 열등한 것이 아닌데 미성숙 할 때는 키 때문에 존재적인 열등감을 가지게 되고 작은 키 콤플렉스도 가지게 되어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자신감 있게 뭣을 하지도 못하게 하지요.
아무튼, 열등감이란 열등한 것 한두 가지 때문에 존재 전체가 열등하다거나 우리 민족이 열등하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전체를 보지 못하게 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그르치게 만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열등감의 미숙함을 갖게 되는 걸까요?
미성숙은 대체로 교만에서 비롯되고 열등감의 미숙함도 우월감의 미숙함과 마찬가지로 교만 때문입니다. 그러니 겸손하면 할수록 성숙하고 그래서 자신의 단점이나 장점을 그대로 인정하며 그로 인해 존재가 위축되지도 우쭐하지도 않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자는 이방인임에도 매우 겸손하고. 매우 겸손하기에 매우 성숙합니다. 자기와 딸이 강아지 취급을 받을 때 '그렇습니다'라고 하고 그러나 곧 이어서 '그러나'라고도 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과 성숙함은 '그렇습니다'와 '그러나'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그럼에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특히 주님 사랑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자비를 포기치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스라엘의 열등감의 문제는 단지 인간적인 미성숙의 문제만이 아니고, 영적인 결함이나 미성숙이 더 문제입니다.
설사 모든 면에서 자기들이 이방인들보다 열등하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지요.
모든 면에서 우리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함께 계십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겸손과 믿음을, 그러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의 겸손과 믿음을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여자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거짓말하지 마!”와 “난 거짓말을 싫어해”의 차이 : 사람을 바꾸려 하지 말고 새로 태어나게 하라.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이방 여인이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며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이때 그 여인은 개라도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하며 자기 믿음을 증명합니다.
믿음은 분명 자신을 낮추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자아가 강하면 믿지 못합니다. 반면 믿으면 자아가 죽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인의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왜냐하면, 나의 죽음으로 타인을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일본강점기에 평안도 신천에 유명한 깡패가 있었습니다. 김익두입니다. 사람들은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김익두가 예수님을 믿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매일 동네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아, 저 사람은 얼만 전에 깡패였는데.” 그러면,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아주머니가 김익두 목사를 시험합니다. 문 앞에 와서 “예수 믿으세요.” 할 때, 설거지물을 얼굴에 확 뿌려버렸습니다.
“죽었나 살았나 보자.”
김익두 목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합니다.
“내가 죽었으니 당신이 살았지, 내가 만일 살았으면 당신은 벌써 죽었을 것이오.”
믿음은 우리 자신을 죽입니다. 개라는 말을 듣고도 감정이 상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나안 여인이 발끈하여,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창조하신 백성을 ‘개’로 비유하시는 것은 좀 아니죠?”라고 말했다면 그 여인의 믿음은 거기까지였을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믿었기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이해되지 못하는 행동과 말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사람들을 못마땅해하고 교정해주려는 것은 어쩌면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믿지 않으니까 가르치려 들고 고치려 드는 것입니다.
“네가 말을 더듬는 것은 네 생각의 속도가 혀의 속도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야.”
말더듬이인 아들에게 말을 더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 제너럴 일렉트릭(GE)사의 전 회장 잭 웰치 어머니의 말입니다.
잭 웰치는 미국 최고의 능변가지만 어린 시절에는 말더듬이로 친구들의 놀림감이었습니다. 식당에서 참치 샌드위치 한 개를 주문하면 언제나 참치 샌드위치 두 개가 나올 정도로 주문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말 더듬는 탓에 영어로 참치를 뜻하는 튜나(tuna)를 ‘투 튜나’(two tuna)로 발음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이 말에 잭 웰치는 곧 자신감을 되찾고 말을 더듬는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여겼고 스스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잭 웰치 어머니가 아들의 말 더듬는 버릇을 직접 고쳐주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들은 더 주눅이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어 아이가 스스로 하게 만들어야지 자신이 무언가 하게 만들려고 하면 아이는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저에게 공부하란 말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공부하란 말을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부모는 더 잘하라고 합니다. 이런 지적을 해서 공부를 잘하게 되면 그 공적은 부모에게 돌아갑니다. 부모는 마치 잔소리를 해도 되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여길 수 있지만, 잔소리는 자녀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무한으로 긍정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왠지 안 될 것 같은 부정이 끼어드니 자신이 개입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확실히 하느님을 믿으면 사람도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믿으면 상대를 고치려 들지 않습니다. 기다려줍니다.
『괜찮아 엄마는 널 믿어』란 책을 쓴 저자 김민경 씨는 이 책을 통해 부모와 대화 없이 자란 어린 날을 떠올리며, 내 아이만큼은 ‘잘하면 칭찬, 못해도 격려’의 마인드로 밝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자녀 교육서를 읽고, 코칭 리더십 등 다양한 강의를 통해 자녀 교육 노하우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믿는 만큼 자란다는 신념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믿으면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까요?
성호가 게임에 빠져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결국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때려주고 싶었지만, 차차 마음이 가라앉고 자신도 어렸을 때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댔고 군것질을 했고 남은 돈을 숨겨놓고 가슴 졸였던 기억을 떠올리니 웃음이 피식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엄마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김민경 씨는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엄마한테 말하지 그랬어. 엄마가 안 줄 것 같았어? 내일부터 2000원을 줄 테니까 1000원은 게임을 하고, 1000원은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러나 6시 전엔 꼭 들어와야 한다. 알았지?”
이렇게 아들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성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게임에 빠져 초등학생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반에서 거의 꼴찌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 2가 되자, 게임 때문에 학교를 자퇴까지 하겠다고까지 말하던 아이가 갑자기 마음을 잡고 공부를 시작하더니 전교 1등을 하고, 연세대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이가 원래 머리가 좋았을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가 자신의 가치가 얼마인지 엄마가 하는 행동을 통해 믿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엄마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생각이 자신도 자존감이 생기고 그 자존감을 증명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신부님도 가르치지 않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저도 개인적으로 각자의 삶을 판단하여 제 가르침을 적용한다면 분명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가르치면 그 사람의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넌 내가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 묵상을 나누는 것은 개인적으로 지적하고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는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바라시느냐만 말해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기가 걸음마를 하고 옹알이를 할 때 일일이 지적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걷고 말하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범은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는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적하여 고쳐주려는 행위는 상대를 믿지 못해 상대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행위이고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행위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거짓말하지 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엄마는 거짓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남을 지적하는 것은 변화시키려는 것이고 자신의 삶을 쫓아오게 만드는 것은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변화는 새로 태어남입니다. 남을 변화시키려고 해서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적질과 가르침의 차이입니다.
믿지 못하면 지적하고 믿으면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걸음마를 보여주는 것과 걸음마를 지적하고 교정하려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말의 모범을 보이는 부모는 있어도 옹알이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려 할 때 아이는 자존감을 잃게 됩니다.
믿음은 무한한 긍정입니다. 믿는다면 사람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그냥 믿음으로 내가 죽었음을 보여주십시오. 물론 믿어도 안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도 유다 한 명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바꾸려 해서 바뀌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조차 바꾸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란
고대 로마 제정기의 스토아 철학자이며, 네로 황제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세네카를 아십니까? 그는 비록 자신의 제자이고 황제이지만, 옳지 않은 길로 가면서 백성을 힘들게 한다고 암살할 계획까지 세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올바른 길로만 가려 했고, 그래서 늘 다른 이에게 떳떳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네카에게 와서 지금 누가 당신을 비난하고 있다고 고자질했습니다. 그러자 세네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약 제정신으로 저를 헐뜯었다면 혹 화를 내겠지만, 단지 마음이 병들어서 저를 헐뜯는 것이라면 성을 내서 무엇하겠습니까?”
사고를 당한 어떤 사람이 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날 따라 응급환자가 너무 많아서인지 아무도 다가와서 조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환자는 화를 낼까요? 내지 않을까요? 너무 아파서 힘든데, “다른 사람 먼저 모두 봐주신 다음에 천천히 저를 봐주세요. 바쁜데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사실 이렇게 화를 냈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프니까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아프면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세네카는 아프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세네카가 화를 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남의 말과 행동에 아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마귀에 들려서 힘들어하는 딸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서운한 말이 아니었을까요? 요즘 시대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내일 뉴스 1면에 큼직하게 이런 기사가 떴을 것입니다.
‘늘 사랑을 외치던 예수, 마귀 들린 딸로 인해 힘들어하는 불쌍한 가나안 여인에게 막말을 하다!!!’
어쩌면 이 여인을 시험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떤 말과 행동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굳은 믿음이 필요함을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요? 이 가나안 여인은 주님께서 고쳐 주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에, 상처가 되는 말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딸만 고쳐 준다면, 어떤 막말을 하셔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더 이상 아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의 행동은 눈에 보이지만 그 행동의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
- 카를 구스타프 융
작은 것에 분노하는 나의 쪼잔함
방에 파리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파리의 ‘앵앵’ 거리는 소리가 너무 신경 쓰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파리의 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파리를 쫓을 생각으로 창문을 열고 그쪽으로 유도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파리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또 들어왔습니다. 화가 나서 더 신경질적으로 파리 잡기에 집중했습니다.
잠시 뒤,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파리의 앵앵거리는 소리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어떤 고통과 시련을 참을 수 있을까?”
파리의 앵앵거림이 제 삶을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신경이 쓰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폭력적으로 변하는 제 모습에 고통과 시련을 참지 못하는 저의 성급함을 보게 됩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에도 분노하는 저의 쪼잔함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머리숙이는 삶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마태 15,28)
아프게 살아가는 우리들어게 가장 좋은 복음보다 더 좋은 위로는 없다. 복음이란 약함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따사로운 발걸음이다. 하느님의 발걸음처럼 따사로운 사제 비안네가 있다.
복음의 얼굴은 하느님께서 만들어가시는 하느님의 얼굴이다. 시련과 실패도 감사로 받아들이시며 자신의 약함까지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믿음의 삶이다. 아픈 시간들이 은총의 시간이 된다.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지고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믿음이다.
아픔도 내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것이었다. 사랑을 위한 아픔이었다. 아픔과 약함이 울림이 된다. 하느님을 다시 찾는 울림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오래 기억할 사제 요한 마리아 비안네가 있다. 먼저 다가와 가장 좋은 사랑의 복음을 내미는 사제가 있다.
복음을 찾듯 비안네 사제를 찾는다. 사람들 속에서 복음의 기쁨을 나누는 사제의 삶에서 길을 다시 되찾게된다. 십자가를 동반하는 믿음이다. 참된 믿음은 아픔과 약함까지 받아들이고 나누는 믿음이다.
이 무더위를 견디어 내는 풀잎 하나도 소중하다. 다시금 사는 법을 비안네 사제의 머리숙이는 삶에서 배우게된다. 삶은 믿음으로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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