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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1/26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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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 당신께 돌아오는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주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일깨우시어 저희가 거룩한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며 주님의 자비로 더욱 큰 은총을 받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1월 26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다니 5,1-6.13-14.16-17.23-28
오늘 제1독서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1 벨사차르 임금이 천 명에 이르는 자기 대신들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벌이고, 그 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2 술기운이 퍼지자 벨사차르는 자기 아버지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은 기물들을 내오라고 분부하였다. 임금은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그것으로 술을 마시려는 것이었다. 

3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 곧 하느님의 집에서 가져온 금 기물들을 내오자, 임금은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4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금과 은, 청동과 쇠, 나무와 돌로 된 신들을 찬양하였다. 

5 그런데 갑자기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촛대 앞 왕궁 석고 벽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임금은 글자를 쓰는 손을 보고 있었다. 

6 그러다가 임금은 얼굴빛이 달라졌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그를 놀라게 한 것이다. 허리의 뼈마디들이 풀리고 무릎이 서로 부딪쳤다. 

13 다니엘이 임금 앞으로 불려 왔다. 임금이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대가 바로 나의 부왕께서 유다에서 데려온 유배자들 가운데 하나인 다니엘인가? 

14 나는 그대가 신들의 영을 지녔을뿐더러, 형안과 통찰력과 빼어난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드러났다는 말을 들었다. 

16 또 나는 그대가 뜻풀이를 잘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그대가 저 글자를 읽고 그 뜻을 나에게 설명해 줄 수 있다면, 그대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고 이 나라에서 셋째 가는 통치자로 삼겠다.” 

17 그러자 다니엘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임금님의 선물을 거두시고 임금님의 상도 다른 이에게나 내리십시오. 그래도 저는 저 글자를 임금님께 읽어 드리고 그 뜻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임금님께서는 

23 하늘의 주님을 거슬러 자신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주님의 집에 있던 기물들을 임금님 앞으로 가져오게 하시어,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그것으로 술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은과 금, 청동과 쇠, 나무와 돌로 된 신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는 신들을 찬양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임금님의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찬송하지 않으셨습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손을 보내셔서 저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25 그렇게 쓰인 글자는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입니다. 

26 그 뜻은 이렇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27 ‘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28 ‘프레스’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21,12-19
오늘 복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26일
유재선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39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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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카 21,18). 

오늘 복음에서 저에게 와닿은 구절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날 불쑥 ‘내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려받을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후하게 우리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6,38 참조).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오만방자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오늘 독서의 벨사차르 임금에게서 봅니다. 임금은 천 명에 이르는 대신들을 거느리고 큰 잔치를 엽니다. 그러고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온 금은 기물들을 내오게 하여 그것으로 호기롭게 술을 마시려 합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가 나타나 벽에 글을 씁니다. 하느님께서 그 왕국의 날수를 헤아리셨고, 그 임금을 저울로 달았더니 무게가 모자라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만, 그는 하느님 앞에서 그저 가벼운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향한 세상의 박해를 예고하시면서도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21,14)라고 하십니다. 영원과 부활을 확신하며 오늘을 충실히 살라고 하십니다. 구상 시인의 “오늘”이라는 시를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내에 대한 성찰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박해받을 때 인내로서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인내를 생각하다 보니 두 가지로 묵상이 되었습니다. 두 가지란 인내심과 인내력으로서 이것을 가지고 이해하면 인내가 무엇인지 더 잘 이해가 되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인내로서 생명을 얻으려면 먼저 인내심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내심(忍耐心)이란 말 그대로 인내하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말의 마음가짐이란 말이 참 좋은 말로 다가옵니다. 마음가짐이란 마음을 가지는 것이고 그래서 마음이 없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인내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이 인내하면 다시 말해서 인내하려는 마음이 없이 억지로 인내하면 인내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어쩌면 인내도 아니고, 그런 인내로는 생명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얻으려는 목적의식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럴 때 생명을 얻기 위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인내심을 갖게 되어 마침내 생명을 얻게 되고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는 이렇게만 하면 되는데 실제로는 인내하려는 능동적인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도 인내라는 것이 본래 고통을 인내하는 것이기에 그 마음이 꺾이기가 쉽지요. 그렇기에 인내심에 더하여 견디는 힘 곧 인내력도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고통을 감수할 뿐 아니라 감당할 힘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감수(甘受)한다는 말이 달게 받아들인다는 말인데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명을 목적으로 달게 받아들이지만 그 고통이 큰데다 오래가면 인내력은 바닥나고 한계에 부닥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이 인내력을 어떻게 지니고 자라게 하느냐 그것인데 하나는 기도를 통해 힘주시는 하느님께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내하면서 인내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반성을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인내력을 주십사고 기도한 적이 있는지. 기도와 함께 인내하면서 인내력을 키우려고 노력했는지. 사실 우리는 남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드물고, 재물을 달라고는 혹 기도해도 힘을 달라는 기도는 거의 하지 않으며 힘을 달라고는 혹 기도해도 인내력을 달라는 기도는 더 하지 않지요.

그만큼 인내는 싫어하기도 하고 쉽지 않다는 표시이니 그럴수록 우리의 기도 의지와 실천 의지가 필요하고, 그럴 때야 주님께서도 맞갖은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담화, 곧 ‘종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박해와 박해 가운데에 있게 될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그러나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루카 21,12-15) 

‘박해’가 오히려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깨우치십니다. 곧 박해를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눌변인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탈출 4,11-12.15-16).

그러니 박해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신앙이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기의 순간은 가장 좋은 기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8)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실 것이니,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움 받거나 배척받게 되면 힘들어 합니다. 고난과 시련, 어려움이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힘든 것은 피하고, 편하고 좋고 즐거운 것, 듣기 좋은 말에 더 맞들이고 쉽게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19)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성 베네딕도 역시, ‘인내’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수도규칙 머리말 50)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다.”(필립 3,10;로마 8,17).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1,17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습니다 : 배교자의 비참함

서기 320년, 로마 제국의 리키니우스 황제 치하의 춥고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튀르키예의 세바스테(Sebaste)라는 곳에 주둔하던 로마의 최정예 부대, '제12군단' 병사들 중 마흔 명이 얼어붙은 호수 한가운데로 내몰렸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발가벗겨진 채 살을 에는 혹한 속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호수의 얼음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살을 파고드는 추위는 뼈 속까지 사무쳤습니다. 그들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갔고, 몸은 제어할 수 없이 떨렸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희 마흔 명이 경기장에 들어왔으니, 마흔 명 모두가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해주소서." 

그런데, 그들을 고문하던 총독 아그리콜라는 아주 잔인한 유혹을 준비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바로 옆, 눈에 빤히 보이는 곳에 ‘뜨거운 물이 펄펄 끓는 목욕탕’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그 목욕탕 문틈으로만 따뜻하고 붉은 불빛과 하얀 김이 새어 나왔습니다.

"누구든지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만 하면, 지금 당장 저 따뜻한 물에 들어갈 수 있다!" 

살을 찢는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결국 한 병사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기도를 뒤로한 채, "나는 예수를 모른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호수를 뛰쳐나갔습니다. 그는 비틀거리며 그토록 원하던 따뜻한 목욕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병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행복을 찾았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극한의 추위에 얼어있던 혈관이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려 심장마비가 온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피하려다 육신의 생명도 잃었고, 잠시의 안락을 탐하다가 영원한 영혼의 생명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를 기다린 건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가장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이었습니다.

반면, 끝까지 호수에 남아 추위를 견딘 39명에게는 하늘에서 찬란한 빛과 함께 천사들이 내려와 면류관을 씌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교자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던 경비병 하나가 그 광경에 감화되어, "나도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외치며 옷을 벗고 그 빈자리를 채우러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기어이 40명의 숫자를 채워 순교의 월계관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다가 배교하면 처음부터 안 믿던 이들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추운 곳에 있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따듯한 곳에 있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에는 박해가 두려워 신앙을 타협한 '호세 신부'가 등장합니다. 그는 사제로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가 사제들을 처형하자, 신부는 살기 위해 정부가 시키는 대로 결혼을 하고 사제직을 버립니다. 그는 연금을 받으며 안전한 집에서 배불리 먹고 삽니다. 불신자의 눈에는 '운 좋은 생존자'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알았던 그에게 그 삶은 지옥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를 "호세 신부님!" 하고 부르며 조롱했고, 아내는 그를 경멸했습니다. 어느 날 밤, 숨어 지내던 동료 사제가 잡혀가며 고해성사를 청했을 때, 호세는 아내의 "가지 마요!"라는 호통에 겁을 먹고 나가지 못합니다. 그는 안전한 방구석에서 홀로 울며 기도합니다.

"하느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하느님을 알고 난 뒤에 그분을 배신하고 사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려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 고통까지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등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2베드 2,21)

아예 하느님을 몰랐다면 세상의 쾌락을 즐기며 잠시나마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하늘의 맛'을 본 사람들입니다. 빛을 본 사람에게 어둠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라 감옥입니다. 신앙인이 박해나 고통이 힘들다고 해서 세상으로 도망치면,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영혼의 질식'입니다.

가리옷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스승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배에서 뛰어내려 '은돈 30냥'이라는 구명조끼를 챙겼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3년 동안의 허송세월을 보상받은 현명한 처세술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했던 유다는 그 돈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불에 덴 듯 괴로웠고, 결국 그 돈을 성전에 내동댕이치고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신앙인이 뒤로 물러서면 갈 곳은 지옥뿐입니다. 되돌아갈 다리는 이미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 '앞으로 나아가는 인내'뿐입니다. 고통과 박해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기적은 시작됩니다.

음악의 어머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그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지만, 56세에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맞았습니다. 오페라 사업은 파산했고, 빚쟁이들은 감옥에 넣겠다고 위협했으며, 뇌졸중으로 반신마비까지 왔습니다.

그는 도망치거나 신을 저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구덩이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며 오직 성경 말씀과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고통을 음표 하나하나에 쏟아부었습니다. 24일 후, 그가 작곡을 마쳤을 때 하녀는 그가 눈물 범벅이 되어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앞에 하늘이 열리고 위대하신 하느님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찬양인 『메시아』 중 '할렐루야'입니다. 헨델이 파산과 질병이라는 박해를 피했다면, 그는 그저 빚쟁이에 쫓기는 노인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신앙으로 그 자리를 지켰기에(인내), 그는 천상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억울한 오해를 받거나, 손해를 보거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때 마귀는 속삭입니다. 

"그만두면 편해져. 적당히 타협해. 저 따뜻한 목욕물(세상)로 돌아가."

하지만 속지 마십시오. 신앙을 버리고 얻은 평화는 호세 신부의 비참함이요, 유다의 밧줄일 뿐입니다. 이미 빛을 본 여러분에게 세상은 더 이상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면 죽습니다. 앞으로 나아가, 지금 겪는 이 시련을 뚫고 나가십시오. 헨델처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스테파노처럼 박해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때, 그곳은 우리를 죽이는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지성소가 될 것입니다. 인내하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몇 년 전, 경주의 왕릉을 찾아갔었습니다. 이 왕릉을 찾아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아마 얼마나 대단한지를 이 행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행사의 이름은 이것입니다. 
 
‘신라 임금 이발하는 날’
 
매년 하는 이 행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왕릉 벌초 행사입니다.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자그마치 1,000명 이상입니다. 그만큼 엄청난 규모의 왕릉입니다. 지금 현대인은 묻힐 땅이 없어서 조그마한 봉안당에 안치되는데 말이지요.
 
이 왕릉의 규모로 당시의 권세를 예측할 수는 있지만, 지금은 그저 단순히 관광지에 불과합니다. 이 왕릉에 묻힌 왕에게 존경과 사랑을 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 왕이 누구인지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큰 왕릉에만 관심 있을 뿐입니다. 죽어서까지 누구는 높고, 또 누구는 낮더라는 계급 자체가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 분명히 다릅니다. 주님께서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도 하느님 나라에 걸맞은 사람으로 사라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높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인정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상에서의 상하 관계, 하느님 나라에서는 역전되고 맙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와 베드로 등이 겪게 될 실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박해가 재앙이 아니라 기회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법정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할 수 있는 가장 공적인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박해는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의 붕괴도 이끕니다. 신앙 때문에 가장 신뢰하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제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미움받는 원인을 제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이름’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주십니다. 16절에서는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18절에서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체적 상해를 입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철저한 보호 아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과 구원은 결코 빼앗길 수 없다는 영적인 보존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박해 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근거가 됩니다. 
 
지금은 박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많은 유혹이 현대의 박해가 될 것입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희망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철저한 보호 아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그대의 꿈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가엾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말 가엾은 것은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에센바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영혼의 여정은 인내의 여정입니다. 인내는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고, 관계를 살리고, 생명을 지키는 신앙의 참된 길입니다. 그 인내의 깊음 속에서 우리의 참된 생명이 드러나고 성장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갚는 우리 삶의 진실한 실천이 인내입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때와 하느님의 길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구원은 삶 전체로 이어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인내는 우리 자신을 성장시키고 관계를 성장시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영적 자세가 인내입니다. 인내는 신뢰에서 나오고, 그 신뢰가 영혼을 살립니다. 하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삶의 방식이 인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하느님을 향해 서 있는 희망의 행위가 인내입니다. 인내는 우리를 소진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생명을 깊게 빚어 가시는 은총의 값진 시간입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는 한 해의 값진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인내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루카복음 21장 19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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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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