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 십자가의 말씀이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이다.
만물의 기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 복된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기까지 성자의 십자가를 충실히 따르게 하셨으니 그들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전하며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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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다니 1,1-6.8-20)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 오늘 복음
(루카 21,1-4)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다니 1,1-6.8-20
오늘 제1독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1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통치 제삼년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2 주님께서는 유다 임금 여호야킴과 하느님의 집 기물 가운데 일부를 그의 손에 넘기셨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신아르 땅, 자기 신의 집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기물들은 자기 신의 보물 창고에 넣었다.
3 그러고 나서 임금은 내시장 아스프나즈에게 분부하여,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을 데려오게 하였다.
4 그들은 아무런 흠도 없이 잘생기고, 온갖 지혜를 갖추고 지식을 쌓아 이해력을 지녔을뿐더러 왕궁에서 임금을 모실 능력이 있으며, 칼데아 문학과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5 임금은 그들이 날마다 먹을 궁중 음식과 술을 정해 주었다. 그렇게 세 해 동안 교육을 받은 뒤에 임금을 섬기게 하였다.
6 그들 가운데 유다의 자손으로는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가 있었다.
8 다니엘은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자기가 더럽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내시장에게 간청하였다.
9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 내시장에게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 주셨다.
10 내시장이 다니엘에게 말하였다. “나는 내 주군이신 임금님이 두렵다. 그분께서 너희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정하셨는데, 너희 얼굴이 너희 또래의 젊은이들보다 못한 것을 보시게 되면, 너희 때문에 임금님 앞에서 내 머리가 위태로워진다.”
11 그래서 다니엘이 감독관에게 청하였다. 그는 내시장이 다니엘과 하난야와 미사엘과 아자르야를 맡긴 사람이었다.
12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시고 또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13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14 감독관은 그 말대로 열흘 동안 그들을 시험해 보았다.
15 열흘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들이 궁중 음식을 먹는 어느 젊은이보다 용모가 더 좋고 살도 더 올라 있었다.
16 그래서 감독관은 그들이 먹어야 하는 음식과 술을 치우고 줄곧 채소만 주었다.
17 이 네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에 능통하게 해 주셨다. 다니엘은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18 젊은이들을 데려오도록 임금이 정한 때가 되자, 내시장은 그들을 네부카드네자르 앞으로 데려갔다.
19 임금이 그들과 이야기를 하여 보니, 그 모든 젊은이 가운데에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20 그들에게 지혜나 예지에 관하여 어떠한 것을 물어보아도, 그들이 온 나라의 어느 요술사나 주술사보다 열 배나 더 낫다는 것을 임금은 알게 되었다..
루카 21,1-4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24일
박결 마티아 신부
✚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소개 00:06
✚ 미사시작 01:06
✚ 강론시작 10:3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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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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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하느님께 전부를 맡긴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모습을 유심히 보시고는 말씀하십니다. 그 과부가 바친 헌금은 비록 액수는 적었지만, 부유한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이 바친 것이었다고요. 다른 이들은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바쳤지만,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생활비를 송두리째 바쳤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를 바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그들은 하느님께 참으로 감사하는 이들일 것입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 이름 부르리라’(시편 116[114─115],12-13 참조). 어느 신부님의 서품 성구입니다. 갚을 길 없는 사랑과 은혜를 입었다면, 남은 삶도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신다는 강한 믿음이 있다면 내가 가진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바친 이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작은 집 한 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재개발되어 보상금을 받았다면서 봉헌하고, 고생하며 꽃 농사를 짓던 부부는 그 일을 정리하면서 꽤 큰 액수를 봉헌하였습니다. 제가 늘 병자 영성체를 해 드리던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은 자신의 전 재산 가운데 절반을 교회에 흔쾌히 봉헌하였습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삶의 변화를 맞이하면서, 깊은 회심 끝에 자신의 모든 자유와 기억과 지성,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가진 모든 것을 본디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받아 주십사 간청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겸손히 청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을 다 바치고 겨울나무처럼 서 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시선이 따뜻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오늘 복음은 부자보다 적게 넣은 과부의 봉헌이 가진 것을 다 봉헌했기에 일부를 봉헌한 부자보다 더 많이 봉헌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받은 과부처럼 우리도 가진 것을 다 봉헌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한 많이 봉헌해야 한다는 묵상을 할 수도 있지만 오늘은 과부의 이런 봉헌을 귀하게 여기신 주님의 평가를 묵상하고 싶습니다.
과부의 가난한 봉헌도 무척 칭송할만하고 진정 제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부의 적은 봉헌도 귀하게 평가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제게는 더 부족하고 그래서 더 본받아야 할 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이것도 교만인지 모르지만저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 사랑이 작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저의 사랑을 갉아먹는 것이 늘 교만이고 교만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박하고 따듯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떤 회개를 더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어떤 회개를 더 바라실까요? 더 가난해지는 회개와 더 겸손해지는 회개 중에서 어떤 것을? 어떤 회개가 사랑에 있어서 더 중요하고 더 먼저여야 할까요?
막상막하지만 적어도 제게는 겸손이 더 중요하고 먼저입니다. 겸손이 없으면 가난할수록 저는 더 교만해지곤 했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영적 우월감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주님 앞에 나와 머리를 꼿꼿이 들고 세리와 달리 자기는 단식도 봉헌도 더 많이 했다고 자랑하였듯이 저도 그 짓을 많이 하였지요. 사랑한다면서 말입니다.
밑에서 받드는 사랑이 아닌 사랑은 위에서 군림하고 평가하는 사랑이니 사랑이 아니거나 참사랑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교만은 사랑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앞에서 교만이 저의 사랑을 갉아먹었다고 얘기했지만 실은 겸손이 사랑의 기초인 것처럼 교만은 제 사랑의 바탕을 허무는 것입니다.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겸손을 전하면서 이렇게 중요한 얘기를 합니다.
“겸손은 온갖 덕의 보호자요 장식이다. 영적 건물이 겸손의 바탕 위에 세워지지 않을 때는 올라가는 듯하다가도 무너지고 만다.”
이놈의 교만이 언제 제 안에서 사라져 우월적 시선이 없어질지, 언제 제가 참으로 겸손해져서 이웃의 보잘것없는 행위를 주님처럼 귀하게 평가하는 따듯한 시선이 생길지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먼저 바치는 믿음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심 깊은 가난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는 비록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쳤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다의 과부(1열왕 17,12)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전부를 예물로 바침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내맡김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는 표현이요,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는 표시였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내놓은 그 값진 두 데나리온과 같을 것입니다(루카 10,35).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앞세워야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봉헌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다 쓰고 남은 조각을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딱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곧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맨 먼저’ 앞세워 바쳤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소중하고 귀한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주군이신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바로 그러한 분을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소중하고 귀한 분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 가는지, 혹은 퇴색되거나 변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가난하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한 이 “과부”에 대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표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 저는 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하여, 나의 삶이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혹은 전부를 바치고 있는지를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1,4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려놓음과 봉헌의 차이
법정 스님의 유명한 수필집 『무소유』에는 스님이 가장 아끼던 난초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님은 지인에게 귀한 난초 두 분을 선물 받아 정성껏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 난초가 어느새 기쁨이 아니라 스님의 '상전'이 되어버렸습니다.
한번은 스님이 외출했다가 햇볕이 뜨거워지자, 난초가 말라 죽을까 봐 허둥지둥 절로 돌아왔습니다. 여행을 가서도 난초 걱정에 잠을 설쳤습니다. '무소유'를 수행한다는 수행자가 고작 풀포기 하나에 매여 안절부절못하게 된 것입니다. 깊은 고민 끝에 스님은 결단을 내립니다.
"이 난초가 내 수행을 방해하는구나."
스님은 난초를 쓰레기통에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난초를 정말로 아끼고 잘 기를 수 있는 친구에게 '주어버렸습니다'. 친구에게 난초를 건네주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 스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때 비로소 날아갈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이 일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내 방에 난초를 두고 "신경 쓰지 말자, 마음을 비우자"라고 다짐하는 것은 고문일 뿐입니다. 하지만 친구에게 주어버리면, 그때부터는 그 난초의 주인이 내가 아닌 친구가 되기에 더 이상 내 마음을 졸이게 하지 않습니다. 소유권이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흔히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대상을 내 품에 둔 채 마음만 내려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눈앞에 보이면 다시 잡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어설픈 내려놓음으로 파멸한 두 가지 슬픈 사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무엘기 상권에 나오는 엘리 사제입니다. 그에게는 홉니와 피네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제물을 가로채고 성전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망나니였습니다. 엘리는 그들을 단호하게 하느님의 법대로 치리하거나 봉헌(심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서의 정에 매여, 그저 "얘들아, 왜 그러느냐"라며 나약하게 타이를 뿐이었습니다.
그는 자식을 하느님보다 더 소중히 여겨 꽉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느냐?"(1사무 2,29)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결국 전쟁터에서 두 아들은 한 날 한 시에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도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하느님께 맡기지 않고 내 손에 쥐고 있으려 했던 집착의 대가는 가문의 몰락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롯의 아내입니다. 소돔이 멸망할 때 천사는 "뒤를 돌아보지 마라"고 했습니다. 몸은 소돔을 떠났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곳에 두고 온 재물과 안락함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마비를 상징합니다. 손에 쥔 것을 완전히 놓지 못하면, 우리는 과거에 갇혀 한 발자국도 미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질긴 집착을 끊을 수 있을까요? 답은 '비움'이 아니라 '봉헌'입니다. 봉헌이란 소유권을 하느님께 완전히 이전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어야 쳐다보지 않게 되고, 그래야 집착이 끊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가난한 과부를 보시고 "저 과부가 가장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과부의 행동은 '상실'입니다. "저 돈이 없으면 당장 굶을 텐데..." 하며 걱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위대한 '봉헌'으로 보셨습니다. 과부는 돈을 길바닥에 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돈은 영원한 가치로 변합니다. 또 한 번 봉헌한 것은 다시는 손을 넣어 꺼낼 수 없습니다. 봉헌함은 돈이 들어갈 만한 구멍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법정 스님이 난초를 친구에게 주어버림으로써 해방되었듯, 우리도 우리를 짓누르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하느님께 주어버려야 합니다. 자녀 문제로 속을 썩이고 계십니까? 그 아이를 내가 조종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께 봉헌하십시오. "주님, 이 아이는 제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입니다. 당신이 키우십시오."라고 소유권을 넘겨드리십시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십니까? 그 걱정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십시오.
"주님, 제 앞날을 당신께 드립니다. 이제 제 걱정이 아니라 당신의 계획입니다."
우리가 쥐고 있으면 썩어버리거나 무거운 짐이 되지만, 하느님께 드리면 그것은 기적이 되고 은총이 됩니다. '내려놓음'이라는 막연한 비움이 아니라, '봉헌'이라는 확실한 드림을 선택하십시오.
오늘 이 미사 중에 예물과 함께 여러분의 가장 큰 집착을 봉헌하십시오. 빈손이 되어 돌아가는 여러분의 발걸음은,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하느님의 자유로 가득 찰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수저 계급론이 있습니다. 부모의 재산, 배경, 사회적 지위에 따라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비유하는 신조어입니다. 부모의 재산, 배경, 인맥이 좋아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면 금수저, 금수저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중산층 이상의 안정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은수저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가난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지원이나 배경이 전혀 없고,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경우를 흙수저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분을 들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이나 은도 원래는 흙 속에 있던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본인이 흙수저라고 희망이 없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흙 안에 감추어진 금과 은을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직 분리가 안 되어 흙만 있는 것 같지만, 얼마든지 노력에 따라 소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실 주님 안에서는 우리 모두 소중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금, 은, 흙으로 나눌지 모르겠지만, 주님께서는 흙 속에 감추어진 소중한 것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소중한 것을 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알 수 있습니다. 헌금함에 봉헌하는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당시 헌금함은 나팔 모양으로 되어 있어 동전이 떨어질 때 소리가 났는데, 부자들의 많은 헌금은 요란한 소리를 냈을 것이고, 과부의 동전은 아주 미약한 소리를 냈을 것입니다. 빈곤한 과부가 넣은 렙톤 한 닢은 그리스 화폐 단위 중 가장 작은 단위로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1/128에 해당하는 아주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자와 과부의 봉헌 소리는 큰 소리의 차이를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과부의 헌금 소리를 들으면서, 비웃었을 것입니다. 겨우 저렇게 적은 돈을 하느님께 봉헌하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그보다 그 마음을 보십니다. 우선, 두 닢을 넣었다는 것은 하나는 자기를 위해 남겨둘 수도 있었음에도 모두 바쳤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남는 것 중 일부를 냈지만, 과부는 부족함 속에서 전체를 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양이 아니라, 그 마음을 보신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계산법은 겉으로 드러난 숫자와 크기로 가치를 매기는 세상의 계산법과 다릅니다. 내일 먹을 양식조차 남기지 않고 바치는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는 마음을 더 크게 보십니다.
하느님의 계산법이 우리의 계산법이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판단이 아니라, 그 마음을 보고 함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모습입니다.
오늘의 명언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여러 진주알을 하나하나 줄로 꿰듯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인 것 같아(‘빨간머리 앤’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지고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 소중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느냐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께 자신 전부를 내어맡깁니다. 그래서 과부의 봉헌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의 봉헌입니다.
그녀는 여유로운 소유로 봉헌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으로 사랑이신 하느님께 봉헌한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을 내어드리는 비움의 행위입니다. 작지만 진실한 사랑이 오히려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십니다.
참된 봉헌은 양(量)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의 순수성이며 진정한 믿음의 가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의 진실한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참된 봉헌입니다. '얼마'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과부의 봉헌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해 열리는 풍요로운 행복을 체험합니다. 약함에서 힘이 나오고, 적음에서 풍요가 피어나며, 비움에서 참된 충만이 시작됩니다.ㅈ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사랑의 날 되십시오. 진실한 사랑이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깊은 예물입니다. 가장 좋은 오늘입니다.
루카복음 21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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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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