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
하느님, 복된 예로니모 사제에게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맛들이게 하셨으니 저희도 하느님 말씀에서 생명의 샘을 찾고 구원의 양식을 얻어 더욱 풍요로이 살아가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즈카 8,20-23)
많은 민족들이 주님을 찾으러 예루살렘에 오리라. - 오늘 복음
(루카 9,51-56)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즈카 8,20-23
오늘 제1독서
많은 민족들이 주님을 찾으러 예루살렘에 오리라.
20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민족들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오리라.
21 한 성읍의 주민들이 다른 성읍으로 가서 “자, 가서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자. 나도 가겠다.” 하고 말하리라.
22 많은 민족들과 강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에서 만군의 주님을 찾고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러 오리라.
23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그때에 저마다 말이 다른 민족 열 사람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루카 9,51-56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30일
오재우 미카엘 신부
✚ 성 예로니모 소개 00:06
✚ 미사시작 01:34
✚ 강론시작 07:53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그분 얼굴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예고하신 대로 고난과 죽음을 겪으실 것입니다. 억울한 죽음을 향한 여정이기에 슬프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루카 9,51)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영광으로 건너가실 것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춘 표현이기에 희망에 차 있습니다. 동시에 하느님 계획 안에서 이 죽음과 영광이, 그때가 자리매김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해서 신뢰에 차 있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운명을 느끼시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9,51). 이 구절을 굳이 루카 복음사가가 표현한 글자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자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기로) 얼굴을 고정하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 얼굴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곳을 보시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께 맡기신 사명만을 보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이 표현이 히브리 말 표현이고 루카 복음사가의 신학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이사 53장 참조) 모습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50,7).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한 덕분에 당신의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주님의 종의 모습은,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예수님 마음속 숨겨진 힘을 우리에게 밝히 드러냅니다. 그분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의 꿍꿍이속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어저께 대천사 축일을 맞아 치품천사(세라핌 천사)를 주십사고, 그리고 저도 치품천사가 되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오늘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환대를 거절한 사마리아인들을 불살라 죽이려는 얘길 들으니 즉시 불을 어떻게 써야 하나 그것과 연결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늘의 불은 엉뚱한 데 써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불사르는 데 써야 올바로 쓰는 것이지요. 분노에 쓰지 않고 사랑에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불을 사랑에 쓰면 성령의 불이 되고, 분노에 쓰면 악령의 불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불을 분노에 쓰라고 주님께서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걸 보며 느낀 것은 제자들이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는 것은 야고보 요한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우리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해 화가 납니다. 그리고 앙심을 품고 어떻게든 앙갚음하고 싶습니다. 이것도 문제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약점이라고 봐줄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주님도 자기들과 같으실 거라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가르침은 이빨도 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6장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하라,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기껏 가르치셨고, 당신 말씀을 꼭 실행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그 가르침이 이들에게 하나도 먹히지 않은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과 같은 9장에서 그러니까 지난 주간 복음에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신 다음 두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며 “귀담아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도 하나도 먹히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에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라고 하는데 죽으려고 예루살렘에 가시고 하늘에 오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신다고 아무리 수난 예고를 해도 그 말씀이 조금도 먹히지 않습니다.
다 자기식대로 이해하고 자기 꿍꿍이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님은 죽으러 그리고 하늘에 오르려고 예루살렘에 가시는데 그들은 거기서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꿍꿍이속입니다. 주님과 꿍꿍이속이 다른 우리는 아닌지, 주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먹히지 않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기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 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을 굳히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는 말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했던 그리짐산을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고자 하시기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이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걷는 길이 비록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9.54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소서.
응징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시고
보복이 아니라 감싸 안게 하소서.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도모하게 하시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더하여 갚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감정변화가 너무 잦다면?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 9장 51-56절을 통해 예수님의 참으로 인상 깊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 9,51) 이 말씀은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하루로 치자면 저녁, 곧 삶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잠이 죽음과 같듯이, 예수님은 당신 삶의 마지막, 죽음과 부활이라는 큰 목적을 향해 단호히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려 하셨을 때,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려 하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은 분노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그들은 작은 일에 쉽게 분노하고, 감정에 휩쓸려 무모한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지만, 이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룻동안 얼마나 자주 작은 일에 감정의 노예가 되고, 일희일비하며 평화를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오늘 이 강론을 통해, 우리가 하룻동안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예수님처럼 의연하게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서른아홉 살 젊은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이 마비되는 절망적인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의사는 그에게 남은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할 것이며, 정치 경력은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앞날이 창창했던 한 청년의 꿈과 희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이 그를 덮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과 좌절감에 사로잡힐 만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루스벨트는 여기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미국 국민을 위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굳건한 신념은 단순히 개인적인 강인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뉴욕 주지사 시절부터 '작은 사람들을 위한 큰 정부'라는 명확한 정치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아마비로 고통받으며 스스로 약자의 입장을 경험한 것이, 그를 더욱 확고하게 '모든 시민의 복지를 책임지는 정부'라는 대의명분에 헌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국가의 위기 극복과 국민의 삶 안정'이라는 명확한 최종 목적을 향해 의지를 굳건히 하며 흔들림 없는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수많은 비난과 역경에 직면했지만, 그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육체적 고통이나 당장의 언론 비판, 정치적 공격에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국민을 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목표에 집중했습니다. 개인의 감정이나 불편함에 휩쓸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삶은 개인의 고통과 외적인 역경에도 불구하고, 더 큰 목적을 위해 감정을 통제하고 나아간 지도자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명확하고 굳건한 목적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매일의 감정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의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다 27년간의 긴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부당함과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그는 감옥 안에서도 분노나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틈틈이 공부하고 운동하며 '자유로운 남아공의 대통령'이라는 확고한 최종 목적을 향해 자신을 단련했습니다.
그가 출소 후 자신을 억압했던 간수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도, 개인적인 복수심보다 '남아공의 화합과 용서'라는 더 큰 대의명분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굳건한 의지는 당장의 감정을 초월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노인이 된 라이언이 전우들의 묘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아내에게 묻습니다.
"나... 잘 산 것 같아?"
그리고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는 평생을 고생하며 가족을 위해 살다가 늙어 아버지가 입던 옷을 껴안고 독백합니다.
"아버지... 저 잘 살았죠? 그런데 억수로 힘들었어요..."
이 두 장면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묻고 답합니다. 그들의 삶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라고 하신 말씀과는 다르지만, 그들 나름의 충실한 삶의 마무리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마지막'이 있었기에, 그들은 살면서 겪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 그리고 당장의 감정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삶의 최종 목적이 명확했기에, 지금의 고통이나 분노가 그들의 길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마지막'이라는 목적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이 모든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의 감정에 너무나도 쉽게 휘말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야고보와 요한처럼, 작은 분노에도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적들을 없애버리려 할 만큼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은 '마지막'이라는 목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끓어오르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라고 하셨던 것처럼, 삶의 궁극적인 목적, 곧 하느님과의 만남이라는 마지막을 향해 마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이 마지막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의 감정에 너무나도 쉽게 휘둘리고, 작은 일에도 분노하며, 평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대학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문제집 몇 문제 틀렸다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습니다. 마지막 시험이 있다는 말은 사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루엔 잠이고, 일생엔 죽음입니다. 이 시험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은 오늘 감정에 휘둘릴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명언
.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즈카르야서 8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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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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