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5/10/03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0. 3.
반응형

 

주님,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짓고 당신 계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당신은 진실한 판결에 따라 저희에게 그 모든 것을 하셨나이다.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약속하신 그곳으로 저희가 달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0월 3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바룩 1,15ㄴ-22
오늘 제1독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거역하였습니다.

1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16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 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17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18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19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날부터 이날까지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20 주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려고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던 날, 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21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22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0,13-16
오늘 복음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3일
박민웅 요셉 신부

 

✚ 10월 교황님 기도지향 00:21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8:1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왜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를 좋아합니다. 모든 일을 빨리하려는 문화 덕에 전 세계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른 경제 발전을 이루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빨리빨리’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출세도 빨리하고 싶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도 쉽게 빨리 모으고 싶어 복권은 늘 동이 납니다. 차량 한 대가 차선을 위반하면 다른 차들도 줄지어 그 뒤를 따르고, 교통질서는 금세 흐트러집니다.

이런 문화는 자신이 놓인 상황을 눈치껏, 재주껏 해결하라고 우리를 부추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정작 자신은 손해를 보지는 않지만 규칙을 지키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힙니다. 또한 천천히 노력하는 것의 소중함을 잊게 만듭니다. 이렇게 노력하지 않고 잘되기만을 바라는 태도가 과연 우리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면 마음이 편할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주무대인 갈릴래아 호숫가의 도시들입니다.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가장 많이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도 가장 많이 들은 고을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하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곳이며,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을 살려 내신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카파르나움에 있던 사람들이 왜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까요? 아마도 그토록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도, 그저 하늘 나라에 가고 싶어 하기만 하였지 자신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곱씹고 되새겨 깨달은 바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장치가 고장난 불행

오늘 복음은 회개하지 않는 자의 불행을 자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다.”  

오늘 독서는 주님 말씀을 듣지 않았음을 자각한 자의 뉘우침입니다.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을 연결하여 성찰하면 바룩서처럼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면 행복의 길이 열리겠지만 코라진, 벳사이다처럼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그리 살면 불행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독서와 복음에서 잘못이 뭐냐 하면 듣지 않음, 받아들이지 않음입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요,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말씀을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코라진과 벳사이다에게 저주를 퍼부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미워하여 불행해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고 계속 그리 사는 것은 불행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시며 불행에서 행복으로 회개하라는 강력한 촉구입니다.  

불행이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듣지 않고, 사랑하셔도 그 사랑을 받지 않는 것인데, 왜 듣지를 않고 왜 받지를 않겠습니까? 사랑의 말이라고 생각했어도 받지 않았겠습니까? 다시 말해 사랑의 말로 받아들였으면 받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하느님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였을까요? 제 생각에 하느님 말씀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행이란 받아들이는 체계(System이)가 망가진 것입니다. 장치가 고장 난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해도 자기를 불행케 만드는 쪽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하는 말도 미워서 하는 말로 받아들이고, 충고와 경고의 말도 저주의 말로 받아들이며 회개하라는 말도 귀찮게 하는 말쯤으로 받아들입니다.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데 찰떡같이 얘기해도 개떡같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제 성찰이나 더 하겠다는 뜻입니다. 난 코라진이 아니야! 할 수 있을까? 나도 벳사이다가 아닐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파견 받은 우리는 ‘아버지의 영’을 품고 있다.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 안에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에 대한 불행선언’(13-15절)이며, 뒷부분은 ‘파견 받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파견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16절)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코라진, 벳사이다. 가파르나움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단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랑을 많이 받고도 회개하지 안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그들이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도 여전히 회개하는 일에는 더딘 저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 <복음>의 <뒷부분>에서는 주님의 애태우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얼마나 존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고,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를 깨우쳐줍니다. 동시에, 파견 받은 이는 파견 받은 분에게 메여 있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파견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는 너희를 보낸 분께 매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매달리지 말고, 보내신 분께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말씀’을 품고 있어야 하고, ‘말씀의 영’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파견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그렇습니다. 파견 받은 우리는 ‘아버지의 영’을 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0,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주님!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명심하게 하소서. 

그들이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다 해도
그들에게 휘둘림 당하지 않고
저를 보내신 당신께 
언제나 매여 있게 하소서.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말씀을 품고
당신의 영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머무는 곳이 내가 믿는 행복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세 도시를 향해 발하신 준엄한 꾸짖음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희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루카 10,13)

예수님께서는 이 도시들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로 들어오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이 행복임을 믿는다고 말하는 너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 내가 머무는 곳, 내가 선택한 공동체가 바로 내가 어떤 가치를 믿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지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나의 공동체가 곧 나의 심판이 됩니다.

구약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멸망 이야기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두 천사가 롯의 가족을 이끌어내며 “뒤를 돌아보지 말고, 평지에 머물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로 나아가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천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녀의 몸은 소돔을 떠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죄악과 허영으로 가득 찬 옛 공동체에 미련을 두었기에 소금 기둥이 되고 맙니다.

이는 영화 ‘블루 재스민’의 재스민 프랜시스가 불행을 한탄하면서도 허영의 삶을 놓지 못해 파멸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작은 등불의 어둠을 좋아하는 벌레가 태양의 빛을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작은 사랑의 공동체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더 큰 사랑의 공동체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두 천사가 하느님께 파견되어 롯의 가족을 이끌었듯이,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6)

파견된 제자들의 공동체를 물리치는 것은, 곧 하느님의 부르심을 물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머무느냐가 내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선택하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작은 사랑의 공동체에 머무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사랑도 점차 증가합니다. 일본 도쿄 시부야 역 앞에는 하치코라는 충견의 동상이 있습니다. 주인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하치코는 10년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역으로 주인을 마중 나갔습니다. 그 변치 않는 사랑이 하치코를 움직이는 유일한 원동력이었고, 그 사랑이 하치코를 주인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게 했습니다. 하치코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 어떻게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만들어내는지 배웁니다.

이 원리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야생 소녀' 옥사나 말라야입니다. 3살부터 8살까지 개들과 함께 자란 그녀는 인간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동물 치료 시설의 전문가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그녀는 점차 인간 공동체에 속할 수 있었습니다. 옥사나가 먼저 개의 공동체를 떠나 '사람의 공동체'에 머물 수 없었다면, 결코 하느님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 수준을 점진적으로 높여가야 하는데, 기본적인 인간의 사랑 공동체조차 감당할 수 없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을 꾸려 행복해지려는 마음이 없다면, 즉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외면한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랑이 행복임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점차 더 큰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종착지는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구현된 공동체, 곧 교회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에는 끔찍한 외모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콰지모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유일한 공동체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탑이었고, 자신을 거둔 프롤로 주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가 목마른 그에게 물 한잔을 건네주는 작은 사랑을 보여주었을 때, 콰지모도의 세상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그는 프롤로 주교의 그릇된 욕망보다 더 순수하게 에스메랄다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는 에스메랄다라는 '사랑의 공동체'에 자신을 완전히 맡겼고, 그 안에서 자신의 추한 외모를 넘어선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강론을 통해 우리는 깊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내가 머무는 곳, 내가 선택한 공동체가 바로 내가 어떤 가치를 믿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지 말해주며, 그것이 곧 나의 심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참 행복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사랑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완전한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족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전부 내어주어 만든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교회 공동체만큼 큰 사랑을 요구하고, 또한 가장 완전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교회는 혈연을 넘어,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모르는 사람까지도 이웃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이 참 행복임을 알고 믿는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 머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봅시다.

"사랑이 행복임을 믿는다면서, 나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그 대답이 우리의 삶을,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향한 우리의 길을 결정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점점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이 줄어들자, 한 유명 경제신문은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 묘안을 냈습니다. 광고에 3가지 구독 옵션을 제시한 것입니다. 
 
1) 온라인신문만 구독하면 월 5달러.
2) 종이신문만 구독하면 월 10달러.
3) 온라인신문과 종이신문 모두 구독하면 월 10달러.
 
구독 희망자들의 90% 이상이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3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온라인신문과 종이신문 모두 볼 수 있으면서, 종이신문 가격으로 주니 3번이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신문사에서는 애초 3번을 선택하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짜 선택지인 2번을 미끼로 둔 것이었지요. 이 전략은 대성공이었고, 신문사는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구독자는 스스로 선택한 것 같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신문사의 선택에 유도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 안에서 이런 경우는 참으로 많습니다. 죄의 유혹도 그렇지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유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더 이득인 것 같지만, 실상은 커다란 손해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잠시 이 선택에서 벗어나서 바라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는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기쁨의 시간을 함께할 수 있도록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자유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합니다. 오히려 우리 자유를 교묘하게 억압하면서 죄의 굴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를 위해 좀 더 성찰할 수 있는 시간, 주님과 만날 수 있는 묵상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선물인 자유를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여러 도시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해 탄식하며 경고하십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즉, 누구보다 하느님의 현존을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던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이런 은총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 세상의 뜻만을 따르면서도 은총의 수혜자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 풍요는 우리를 그런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합니다. 자기가 누리는 것을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 회개의 삶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말씀처럼 더 큰 심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세상 안에 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삶을 바꾸는 ‘회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쁨의 시간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다. 뿌릴 때 자기에게도 몇 방울 정도는 묻기 때문이다(탈무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받아들임은 한 사람을 품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의 뜻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파견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수용은 단순한 인간적 친절이 아니라, 존재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거부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근원과의 단절을 드러냅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일은 곧 존재의 근원을 존중하는 일이며, 거부와 배척은 곧 근원적 진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언어와 삶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따라서 계시를 거부한다는 것은 단지 한 인간의 말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구원의 방식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사명과 하느님의 뜻은 분리될 수 없으며,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파견된 제자들이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거부당하고, 비난받고, 무시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거절을 개인적 실패나 무가치함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신앙은 결국 하느님께서 내 삶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문을 열어드리는 응답입니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불완전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시작입니다. 모든 만남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그분의 뜻을 신뢰하며 응답하는 존중의 날 되십시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한계와 약함 속에 스며드는 하느님의 은총을 신뢰하며 하느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시편 95장 7-8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251003_오늘성경구절이미지.jpg
0.36MB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