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 드러내셨네. 알렐루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언제나 저희 안에 파스카 성사를 이루시어 거룩한 세례로 새로 난 저희가 하느님의 도우심과 보호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열매를 맺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얻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5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18일 부활 제5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4,21ㄴ-27)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제 2독서
(묵시 21,1-5ㄴ)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 오늘 복음
(요한 13,31-33ㄱ.34-35)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사도 14,21ㄴ-27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그 무렵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21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묵시 21,1-5ㄴ
오늘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나 요한은
1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2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5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요한 13,31-33ㄱ.34-35
오늘 복음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방에서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18일
승현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19
✚ 강론시작 14:40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오늘 복음의 핵심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새 계명’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당신 공생활 초기에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구원의 길에서 만난 이들에게 ‘사랑의 계명’에 앞서 ‘사랑’을 먼저 건네셨습니다. 계명은 구원하시는 사랑에 뒤이어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새 계명일까요?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은, 이미 구약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이 새로운 계명이 되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을 덧붙이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늦게야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사랑은 단순한 계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명령한다고 해서 지켜질 수 있는 의무가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받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솟구치고 흘러넘치는 구원받은 존재의 숨결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와서 세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그분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부모님과 가족들, 많은 선생님, 삶의 여러 길목에서 나를 격려하며 일으켜 주었던 고마운 은인들에게서 받은 수많은 사랑에 먼저 눈떠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두를 기억의 창고에 저장하여 흘러넘치게 합시다. 신앙인으로 잘 살려면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사랑받았음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처럼 두고두고 간직하며 마음 깊이 간직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새로운 마음가짐, 새로운 사랑, 새 하늘과 새 땅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부활 제5주일의 주제는 ‘새로운’입니다. 복음에서는 새 계명을 얘기하고, 독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얘기합니다.
지금까지의 계명과 지금까지의 사랑이 있고, 지금까지의 하늘과 지금까지의 땅이 있는데 이제는 새로운 계명에 따라 새로운 사랑을 하라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제 차근차근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실 때 거절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받을 때 새로운 계명으로 받아야 합니다.
구태의연하다는 말과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러지 말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가짐. 이번에야 처음으로 저는 이 말의 뜻을 새겨봅니다. 마음가짐이란 마음을 가진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지금까진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았는데 이제 가진다는 말이 되겠고 마음을 먹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 되겠지요?
아무튼 우리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이럴 때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곧 하루를 시작하는데 맨날 똑같은 하루가 아니라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사랑도 똑같습니다. 새로운 사랑도 중요하지만 같은 사랑일지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생각에 새로운 마음에서 새로운 사랑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늘 만나는 사람이지만 새롭고 지겹거나 싫증 나지 않으며 늘 설레는 마음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오늘 주님 말씀은 사랑도 새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에 우리는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시는데 실은 구약에도 있었던 계명이 아닙니까? 원수를 미워하고 이웃은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로운 사랑입니다. 이웃을 원수로 여기며 사랑하지 않았는데 원수를 이웃으로 여기며 사랑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이웃을 원수로 만들고는 용서하려고 애쓰고 사랑하려고 애씁니다. 내 사랑이 잘못되어 하느님께서 이웃으로 주셨는데 원수로 만들고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니 원수가 된 이웃을 사랑하려고 갖은 애 쓰는 건데 잘못된 내 사랑만 주님의 사랑으로 바뀌면 원수가 다시 이웃이 될 것입니다.
그가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지 않고 내가 새로운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밴댕이 속같이 좁디좁은 내 마음에 들도록 그가 바꾸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내 마음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정작 말씀하신 것은 당신 친히 모범을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오늘 말씀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니 서로 발을 씻어주는 사랑입니다.
너의 발밑으로 내려가는 사랑이고, 더러움과 죄를 네가 씻으라고 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손수 너의 더러움과 죄를 내가 씻어주려는 사랑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 주님께서 계시고, 그럴 때 지금 우리 공동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부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힘
오늘 <복음>은 흔히 말하는 예수님의 ‘고별담화’의 첫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이라 할 수 있는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난 다음 이스가리옷 유다가 나가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영광스럽게 되셨음을 선언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1-32)
이는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의 죽음에서 드러난다니 말입니다. 곧 아들을 죽게 하여 아버지가 영광을 받게 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신 결과입니다.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이 사랑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가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선언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선언하십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비워, 아버지를 드러내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십자가에서의 ‘비움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말씀은 계명 이상의 것입니다. 곧 선물임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선물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유언을 주시는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 사랑은 아무런 조건이나 공로도 없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선물인 그 ‘사랑’을 우리도 형제들에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 ‘새 계명’의 실천이 바로 당신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
이 계명이 ‘새 계명’이 되는 까닭은 이처럼, 그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하느님의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온전히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 자신을 비움으로써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형상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십자가 죽음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증언하게 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곧 자신이 비워지면 자신 안에 계시던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나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인 <요한묵시록>에서 말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묵시 21,3)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처를 마련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사랑은 관계능력이요 공존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유대와 공존은 다름 아닌 자신을 비워줌으로써, 타인이 흘러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되, ‘먼저’ 자신을 건네주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워낼 때 타인은 비워진 그 자리로 들어 와, 바로 나 자신이 될 것입니다.
결국, 비워진 바로 그 자리가 형제들이 들어서는 자리요, 하느님이 드러나는 영광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삼위일체 관계의 공존의 사랑에서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자기 비움, 자기 죽음의 사랑으로 관계의 사랑, 공존의 사랑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인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신 이 사랑의 힘이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이 힘으로 우리들 사이에 사랑의 유대가 드러나는 곳에서, 사람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영광은 형제 사랑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시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형제들에게 바로 이 사랑을 선물해야 할 일입니다. 선물로 받은 그 사랑을 선물로 건네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선물로 건넨 그 자리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이 드러나게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하시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기 전에,
‘먼저’ 저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토록 당신께서는 사랑으로
저희 안에 거처하십니다.
당신께서 ‘먼저’ 주신
그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그 사랑에 흠뻑 젖고,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아직 완전한 자녀가 된 게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계명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부터 있었던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자기보다 더 어린 여동생에게 인간 다리가 되어준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들의 주민등록등본을 떼보지 않아도 둘은 남매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둘이 그토록 사랑한다면 남매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도 우리가 서로 형제처럼 사랑하면 우리가 공통으로 ‘아버지’라 부르는 분이 계시고 그분은 참사랑을 가르쳤을 것임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왜 형제들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게 될까요? 부모의 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피를 받으면 ‘양심’상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게 됩니다. 영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는 동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본 포로를 석방해줍니다. 안중근은 도마라는 본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래서 포로를 그냥 사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받은 일본군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안중근 의사가 나가 있을 때 그의 동료들을 초토화해버린 것입니다. 영화에서 안중근 의사는 따가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다른 동지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동지들의 참담한 비명이 귓가를 맴돌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처참한 형상의 시신들이 눈앞을 떠돌았습니다. 나는 길을 잃었습니다. 나의 믿음으로 인해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으니 더는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내 목숨은 죽은 동지들의 것이라는 것을.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자르며 “오늘 우리들이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소.”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의 귓가에도 부모로부터 뿌려진 피가 이런 소리를 냅니다. 형제끼리는 서로 사랑하라고. 나의 목숨은 부모한테서 왔으니 나의 것이 아니라고. 이것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안중근 의사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도 용서합니다. 배신하는 사람도 용서합니다. 그 용서하는 마음은 손가락 하나를 자르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러나 같은 나라 사람끼리는 서로 사랑하라고 죽어간 동지들의 피 값에 비하면 그 용서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형제가 서로 미워하면 더는 부모의 피가 그 형제들 안에서 작용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그것으로 부모의 자녀의 지위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보니 누나가 다운증후군을 앓는 남동생을 위해 매일 기타를 치며 노래 불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사는 다운증후군 동생이 말을 알아들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노래를 좋아하고 가끔 노랫말을 따라 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입니다. 누나는 동생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결국 동생은 “엄마!”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엄마는 태어나서 그런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을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동생이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난 것은 누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누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 안에서 부모의 피가 끓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라앉히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마치 손가락 하나를 자르는 것처럼 고통스럽더라도 자기 안에서 부모의 피가 끓어 양심을 찍어누르는 고통보다는 가벼웠던 것입니다.
가끔 교회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요즘은 가장 크게는 정치 때문에 분열되는 것 같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서로 마음이 달랐어도 한 성직자를 중심으로 일치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추기경님은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 대통령과 맞설 때 가톨릭교회를 더욱 우러러보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성직자를 먼저 용서할 수 없다면 형제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고,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의 피가 자신 안에서 흐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개체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와 거리를 설명합니다. 모든 개체는 자기 주변에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고, 다른 개체가 그 안에 들어오면 긴장과 위협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20cm, 친구는 46cm, 회사 동료 1.2m…. 이런 식으로 공간과 거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아마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과연 딱 붙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서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강도와 그 깊이에 따라 그 간격이 좁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물리적인 거리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거리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사랑할수록 그 거리는 좁혀지게 됩니다. 가까이 있어야 편안해지고, 또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아집니다.
주님과의 간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종종 주님과 물리적 간격이 먼 분을 보게 됩니다. 몇 차례 주일미사에 나가지 않으니 성당 가는 것이 어색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냉담하시는 분의 대부분은 주님과의 간격이 멀어진 것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의 강도와 깊이가 줄어든 것입니다. 여기에 정신적인 간격도 멀어진 분이 많습니다. 성당에 의무적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주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는 기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귀찮고 불편합니다. 세상 일에 대한 관심이 더 높습니다. 이 역시 주님께 대한 사랑의 강도와 깊이가 줄어든 것입니다.
주님과의 간격을 좁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주님께서 그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하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주님을 알 수 있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이시기에 그분과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더 큰 은총 안에 머물게 됩니다.
제1독서를 보면,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열심히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한 것도 아니고,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큰 사랑으로 간격이 매우 좁아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사랑할 수 있도록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만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모두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서로’보다 ‘나만’을 내세우면서 주님과의 간격을 더 멀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제2독서의 요한 사도가 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도 봐야 합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의 실천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주님과의 간격, 이웃과의 간격 모두가 줄어들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도록 주님의 새 계명을 열심히 실천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오늘의 명언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실망을 친구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희망을 친구로 삼을 것인가? (J.위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을 지키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실한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계명도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새로운 차원의 사랑입니다.
인격적인 성숙은 사랑의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건강한 사랑의 관계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사랑에 충실합니다. 거짓된 욕망은 어느 때고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해방의 역사입니다. 지배가 아닌 섬김이며 상처가 아닌 치유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치유자가 되는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서로를 찌르거나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영원한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때 만나는 하느님의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가장 좋은 사랑의 주일 되십시오. 사랑이 사람의 참된 본분입니다.
요한묵시록 21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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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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