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이든 높은 이든 하느님을 경외하는 모든 이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그리스도의 권세와 권능과 구원이 나타났다. 알렐루야.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저희가 한결같은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심을 의심 없이 믿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2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4,19-28)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오늘 복음
(요한 14,27-31ㄱ)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사도 14,19-28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요한 14,27-31ㄱ
오늘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20일
이상진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32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 곧 전쟁이 없는 상태나 힘의 균형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사랑이 지극하신 아버지에게서 비롯하고,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물며, 그 뜻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이기십니다.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기도문처럼 말입니다.
교회가 드리는 “아침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의 이름과 그 뜻이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봉헌 기도’를 바치며 비록 저희에게 허물과 부족함이 많지만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살고자 다짐합니다.
이어지는 기도는 이렇습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권능과 영광, 지혜와 굳셈이 있사오니, 찬미와 감사와 흠숭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전능하신 하느님, 오늘도 저희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세상의 권력자가 아니라 사랑이신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달라 청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옵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길을 걷는 여정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참평화를 만나고 또한 세상에 그 평화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적 미각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환난을 겪어야만 하는가? 이런 반문을 하게 됩니다. 환난 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가치 있는 것일수록 얻기 힘들기 마련이고, 또 ‘No Pain, No Gain’이라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도 미성숙하면 할수록 힘들지 않고 얻으려고 하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고 노립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하여 더 큰 문제는 힘들이지 않고 들어가려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들어가는 것 자체에 관심이 아예 없거나 별로 없는 경우입니다. 영적 미성숙입니다. 영적 무미각입니다.
그런데 영적 무미각이란 무슨 뜻입니까? 제가 만들어낸 말로서 영적인 면에서는 미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으라고 시편은 노래하는데 하느님 나라의 좋음을 한 번도 맛본 적이 없고 그래서 맛보려고도 하지 않는 미각 상태입니다.
심심할 때 저는 통각과 관련하여 재미 삼아 얘기 나눕니다. 제가 매운 것을 즐겨 먹는 것과 관련하여 여러 사람이 그것은 미각이 아니라 통각이라고 제법 과학적으로 얘기합니다.
매운맛이 미각이 아니라 통각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론 맞습니다. 그러나 고들빼기처럼 쓴맛이 입맛을 돋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각도 미각의 일종이고 심지어 성숙한 미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입장에서 매운맛을 모르는 사람은 매운맛을 들이지 못한 미성숙함입니다.
단맛만 맛 들이고 쓰거나 매운맛은 아직 맛 들이지 못한 미성숙이라는 뜻입니다. 아기의 입맛을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영적인 미각에서도 이것은 같은 이치입니다.
이 세상에 맛 들인 사람은 천상의 맛을 본 적도 없고, 그래서 찾지도 않고 천상 미각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이는 아직 이유식을 먹지 않은 갓난아이가 젖만 찾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의 젖에 길들고 젖 맛만 들인 갓난아이에게 어른의 음식을 주면 처음에는 극구 싫어하고 뱉어버리지요. 그때 엄마의 지혜는 젖에 담뱃진을 발라 단맛이 쓴맛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맛을 받아들이게 한 뒤 이 맛 저 맛을 들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 입맛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시기 위해 이 세상의 단맛을 쓴맛으로 바꾸도록 고통이라는 묘약을 주십니다. 큰 고통과 환난을 겪고 난 뒤에 천상 미각을 갖게 하시는 겁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그것이 나환자와의 만남이었고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는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자비를 실행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서 떠나올 무렵에는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평화’를 남기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어원상 ‘완전하다’는 뜻으로 부서지거나 흠이 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이 세상에 정의와 진실을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한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 완전한 정의를 인간사회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219항; 민족들의 발전 179항 재인용)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 갈등이 없고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 혹은 전쟁이 없는 조약이나 힘의 균형 상태나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안정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로,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짐으로써,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짐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만적인 안전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처럼, 우리가 ‘평화를 얻는 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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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4,27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성체성사를 남겨놓으셨는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평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선 평화와 반대되는 상태는 이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낼 필요도 없는 평화를 남기고 가십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결국 자녀들을 집착과 자기뿐인 존재, 곧 모기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아버지’가 나오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께서 남기시고 가시는 평화는 당신보다 더 위대한 아버지에게 받는 ‘보호’라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평화를 줍니다.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평화를 얻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혼자 남겨집니다. 엄마는 아빠에게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엄마를 통해 아이를 보호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엄마가 주는 평화는 아빠가 주는 평화를 받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어려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아빠의 평화를 받아 주기 위해서는 아빠에게 순종해야만 해야 합니다. 바람 피우는 아내에게 줄 평화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을 사탄의 손아귀에 맡겨 죽음으로 향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평화는 결국 ‘피 흘림’으로 전달됩니다. 아버지의 피 흘림인 돈을 어머니가 받고,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그 피를 흘림으로써 평화를 전해줍니다. 죽음이 아니면 그 평화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평화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엄마가 나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분이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아무리 엄마가 돈이 많더라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해리 포터’는 이마에 번개 모양의 흉터를 가진 소년입니다. 해리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여읜 고아입니다. 그의 이마에 남은 흉터는 어둠의 마법사 볼드모트가 남긴 죽음의 흔적이었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로 해리의 어머니 릴리 포터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 어린 아들을 지켜낸 ‘피 흘림’, 그 숭고한 희생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해리는 성장하면서 이 흉터의 의미와 부모님의 희생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부모님은 곁에 계시지 않았지만, 그분들이 목숨과 맞바꾼 사랑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깊은 믿음을 마음속에 간직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해리에게 세상의 어떤 마법보다 강력한 힘, 바로 내면의 평화를 선물합니다.
그 평화의 힘은 해리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마주하는 존재, ‘디멘터’ 앞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디멘터는 사람들의 모든 행복한 기억을 빨아들이고 깊은 절망과 공포만을 남기는 어둠의 존재입니다. 해리는 유독 디멘터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을 떠올리며 '익스펙토 패트로눔'이라는 강력한 방어 마법을 시전합니다.
이 마법은 가장 행복한 기억과 사랑의 힘을 원천으로 하는데, 해리에게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해 죽음도 불사한 부모님에 대한 기억과 그 사랑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내면의 평화가 두려움의 현신인 디멘터를 물리치는 빛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분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순종하시고 또 우리를 위해서도 죽으실 수 있은 분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평화를 지니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평화가 없으면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은 ‘평화’를 위해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부활하셔서 그 평화를 제자들에게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소중한 평화를 ‘믿음’으로 잘 간직해야 합니다.
이 믿음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예절이 ‘미사’입니다. 미사는 평화를 가져가는 시간입니다.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 무너지는 집을 온몸으로 막으며 아이를 보호하여 자신은 죽고 아이는 살린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이의 평화는 엄마의 죽음으로 보호되었고, 앞으로도 그 사실을 엄마가 핸드폰에 남긴 “사랑하는 아기야, 네가 살게 된다면 이것만을 꼭 기억해 주기를. 엄마는 너를 사랑했단다.”라는 말을 기억하면 하늘에 자신을 위해 죽은 엄마가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생각으로 평화를 보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악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주어진 성체는 바로 믿음으로 이 평화를 얻으라고 주신 생명의 선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우리 뇌는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뇌로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본능을 따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강사는 자신이 제시한 글자의 색깔을 청중에게 곧바로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파란색으로 써진 ‘개’라는 단어를 제시하자, 곧바로 청중은 ‘파란색’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노란색으로 써진 ‘고양이’라는 단어를 제시했습니다. 이번에도 청중은 ‘노란색’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녹색으로 써진 ‘빨강’이라는 단어를 제시하자, 청중은 ‘빨강’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문자 인식으로 무의식적으로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이 실험을 통해 실수하지 않으려면 의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능만을 따르는 삶은 오답으로 기울어 지기가 쉽습니다.
주님의 사랑도 우리가 의도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본능만을 따르게 되면 사랑하기보다 사랑받는 데 더 집중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 관점으로 살게 됩니다. 참 행복의 삶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세상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그냥 본능적으로 ‘그런가 보다’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주님의 평화는 세상의 논리에서 말하는 전쟁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 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본능적으로 세상의 평화만을 생각하다 보니 주님의 말씀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주님을 따른다고 생각하는데, 세상 안에서 실패의 경험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지지도 않고 또 이웃과의 만남에서도 평화가 없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본능적으로 따를 수 있는 평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주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잠시 침묵하며 사랑을 키워 분노를 가라앉히는 일, 욕심을 멈추고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일 등등…. 따라서 세상의 본능을 따르는 것을 멈추고, 주님의 말씀에 다시금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좌절의 시간은 잊어라. 그러나 그것이 준 교훈은 절대 잊지 말라 (하버트 S. 개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바로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인격 자체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두려움 없는 영원한 기쁨이 평화입니다.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평화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우리를 향한 은총의 선물이 되어 우리를 믿음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도 맞이하는 진정한 평화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그래서 참된 평화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을 제거하여 거짓 자아를 이기는 힘이 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된 관계에서 오는 참된 신뢰입니다. 참된 신뢰는 하느님의 완전하신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완전하신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분의 평화 안에서 오늘의 일상을 평화로 살아갑니다. 근심은 기도가 되고 두려움은 이제 믿음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평화를 이웃들과 나누며 감사로이 걸어가는 평화의 오늘 되십시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평화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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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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