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목자, 당신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네. 당신 양 떼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주님, 주님의 오른팔로 주님의 가족을 영원토록 감싸 주시어 외아드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저희가 어떤 죄악에도 물들지 않고 천상 은총을 얻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19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4,5-18)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4,21-26)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사도 14,5-18
오늘 제1독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무렵 이코니온에서는
5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다인들이 저희 지도자들과 더불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6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일을 알아채고 리카오니아 지방의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
7 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8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9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10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11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2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13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14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15 말하였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17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18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겨우 말렸다.
요한 14,21-26
오늘 복음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19일
이현진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23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사랑이 열쇠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는 대목입니다. 그 약속에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4,23-24).
사랑이 열쇠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죽 끓듯 제멋대로인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이든, 상대가 지닌 조건과 태도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든 한결같이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일인 듯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호자’요 ‘협조자’인 성령을 약속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14,26).
성령께서 나의 눈과 귀를 열어 주시어 주님 사랑의 말씀과 손길을 알게 하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파도처럼 내 생애를 넘나들던 온갖 사랑의 기억들이 조용히 솟아 나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리움과 감사, 찬미의 강물로 흐를 때면 사랑의 짐은 나날이 가벼워집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사랑의 고수들이 참 많습니다.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즐겨 말씀하시는 ‘옆집의 성인들’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6-9항 참조).
사랑받은 사람이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있어야 내줄 수 있습니다. 사랑의 계명에 앞서 먼저 사랑받으시기를, 성령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 시기는 성령 강림 없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반대의 영적 의미
“유다인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유다인들로부터 괴롭힘과 살해 위협을 받고 그래서 그곳을 피해 간 곳에서는 화신(化神)의 대우를 받습니다.
말하자면 극과 극의 대우를 받은 것인데 제가 생각하기에 둘 다 위험한 겁니다. 그런데 괴롭힘과 살해 위협은 육적인 면에서 위험한 것이라면 화신의 대우는 영적인 면에서 위험한 것이 차이점인데 제 생각에 영적인 위험이 더 위험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칭찬과 반대 가운데서 영적으로 더 위험한 것이 칭찬인 것과 같습니다. 사실 칭찬이나 아부 같은 것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를 주님과 하늘나라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니 반대를 받는 것이 영적으로는 더 유익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내가 하려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인지 또는 나쁜 것인지 식별하게 하고, 신앙인에게는 그것이 하느님 뜻에 의한 것인지 내 욕심인지 식별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 사람이 왜 반대할까? 내가 하려는 것이 나쁜 것이기에 반대하는 것일까? 하려는 것은 좋은 거지만 그가 나쁜 사람이기에 반대하는 것일까? 식별케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식별한 다음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이라면 반대를 무릅쓰고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고 선택하게 합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반대를 무릅쓰고 하느님 뜻을 따르기로 선택했을 경우 선택의 은총으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인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도 반대를 무릅쓸 때 힘을 더 내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반대를 이겨야 할 수 있으니 반대를 이기기 위해 힘을 더 내게 되잖아요? 붙잡는데도 가려면 붙잡는 힘보다 더 힘이 세야 갈 수 있는 것과 같지요.
그리고 인간이 반대하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할 경우 우리는 하느님의 힘을 선택할 것이고, 하느님의 힘으로 그것을 해낼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 그것이 성령이고 성령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느님의 일을 할 때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성령의 사랑이 함께합니다.
이것 말고도 반대의 영적인 의미와 이익이 많습니다. 그 반대가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라면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 순종하게 하는 영적 의미와 유익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한 사람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유익은 덤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대자를 보내주셨구나! 하며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반대자와 반대를 영적인 힘을 얻는 기회,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렇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이가 아니라, 설령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넘어 그를(그의 인격을) 받아들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그 말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받아들인 그 말을 지키는 이, 곧 실행하는 이가 진정 그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버리고 그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곧 그를 믿고 신뢰하고 마음으로 결속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는 말씀은 뒤에 나오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말씀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과 신의로 맺어진 예수님과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래 “지키다”라는 동사는 “간직하다” “새기다” 혹은 “신경 써서 돌보다”라는 뜻으로, 마음이 담긴 행동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말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전제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곧 내적 일치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이 전제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그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표현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저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울 것입니다. 설령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킬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빛이 되어 오소서. 저를 사르는 빛으로 오소서. 함께 살며, 불살라 태우소서. 저를 태워 세상을 밝히소서. 제가 빛이 되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4,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주님!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그렇게 제 자신보다
당신을 앞세우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렇게 당신을 믿고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키게 하소서.
그렇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 지키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령께서 오시면 깨닫게 되는 진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반면 세상에는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여기에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십니다. 성령께서 당신이 선택한 이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계명을 지키면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자녀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 중국 길거리에서 찍힌 어떤 사진에서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엄마가 사주지 않자 엄마의 목을 조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어머니의 참모습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 뜻을 어머니에게 강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계속 그렇게 자란다면 세상에 적응할 수 있는 모습이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 욕구만 강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어떤 면에서 어머니에게 성령을 받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어머니의 참모습, 참마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어머니의 자녀를 위해 흘린 피입니다. 이 피를 받을 때 보이는 게 있고 그 피를 주신 분이 바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려는 이에게 성령께서 어떻게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시는지 잘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향하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요나 1,2) 그러나 요나는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주님 앞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요나 1,3)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거센 풍랑과 큰 물고기 배 속에서의 사흘 밤낮은 요나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완전히 꺾고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마련하시어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 2,1) 절망 속에서 요나는 비로소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당신께 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채우렵니다. 구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요나 2,10) 하고 부르짖으며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기로 합니다.
마침내 요나가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놀랍게도 임금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회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 3,10) 이 모습을 본 요나는 “몹시 못마땅하여 화가 났습니다.” (요나 4,1) 그는 여전히 자신의 생각과 기대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박넝쿨 하나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룻밤 사이에 자라나 요나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박넝쿨이 벌레 먹어 시들자 요나는 또다시 화를 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박넝쿨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네베를, 왼손과 오른손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여 명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는 이 니네베를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 4,9.11)
요나는 이 박넝쿨 사건을 통해 비로소 하느님의 마음, 그 끝없는 자비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박넝쿨처럼, 하느님께서는 니네베의 수많은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는 요나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자신을 내어 맡겼을 때 비로소 체험하게 된 하느님의 참모습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고래에게 먹히는 것도 성령의 체험이고 박나무의 체험도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아니라 주님 마음을 볼 의지가 살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그 순간 이제 나의 욕구가 아닌 그분의 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될까요?”라고 묻게 되었고 그렇게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다. 그냥 내게 붙어있어라.”라고 하시며 당신을, 곧 당신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있기 전에 저는 예수님의 계명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사제가 되라는 뜻에 저를 맡긴 것입니다. 그랬더니 성령께서 들어오시고 그리스도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신다는 뜻은 자신의 뜻보다 그분의 뜻에 관심을 쏟게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 계명에 순종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할이 있습니다. 도움의 은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 마음을 보게 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이 은총이 생명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두 성령의 은총을 통해서 주님 마음을 닮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당신 마음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은 전부”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마음은 진정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하라 하는 계명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서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보는 것이 기도에서는 ‘관상’입니다. 관상기도는 그래서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본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그 사람은 길을 잃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일기를 매일 씁니다. 그리고 일정표도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점검합니다. 그래야 제가 저의 삶을 스스로 조절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짜인 틀에 맞춰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군대 시절 그리고 학창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다른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는 대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프랑스 작가 ‘폴 브루제’가 이런 말을 했었지요.
“용기 내서 생각하는 대로 살아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머잖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용기가 생각대로 살게 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사는 것에 맞춰서 생각할 뿐입니다. 새로운 생각이 나오지 않으니, 권태와 피로가 엄습하고 사는 것도 그리 재미없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이 사랑의 삶은 용기를 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다양한 생각이 나오게 되고 동시에 다양한 삶을 갖게 합니다. 지루한 삶이 아닌 기쁨 넘치고 활기찬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묵상하면 주님께서 왜 사랑하라고 그토록 강조하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남에게 끌려가는 삶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용기 내서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주도적인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주님께서는 간절히 바라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사랑의 삶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이득은 우리가 보는 것인데도 그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마치 모든 영광은 자녀가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영광 받는 모습만으로도 크게 기뻐하는 부모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받고 있음에도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더 주십니다. 바로 보호자 성령입니다. 이 성령은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또 그 말씀을 기억하게 도와주신다고 하십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 계속해서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호자를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가장 힘센 분께서 우리 편이 되어서 이렇게 많은 사랑과 은총을 주시는데 과연 용기 내지 못할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의 실천을 용기 내서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커다란 은총과 사랑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 (아이리스 머독).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보내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의 가장 좋은 보호자이십니다. 가장 친밀한 믿음의 관계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어리석은 삶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하시며 생명의 삶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지워지지 않는 진리를 마음에 새겨주시며 빛으로 말씀을 여십니다. 흔들릴 때마다 가장 좋은 삶의 방향을 가르쳐주시는 분이십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케하여 생명의 길을 보게 하십니다.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직접 느끼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 되십니다. 성령께서는 살아 계신 현재의 숨이며 우리를 살리시며 가장 완전하게 가장 안전하게 일하시는 인도자이십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사랑으로 열어 주시는 성령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두려움 없는 진실된 감사의 날 되십시오. 생명의 숨결이며 마음의 등불이며 가장 좋으신 보호자이신 성령님을 믿고 따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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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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