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주님은 당신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저희를 속량하시어,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가 되게 하셨나이다. 알렐루야.
자유와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어 성자의 피로 구원받은 저희가 하느님의 힘으로 살며 영원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16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3,26-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약속을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도 13,26-33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약속을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그 무렵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요한 14,1-6
오늘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16일
정완현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23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성서학자들은 요한 복음서 14―17장을 예수님의 ‘고별 담화’라고 부릅니다. 오늘부터 이 14장의 말씀을 조금씩 나누어 듣게 됩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라는 새 계명을 주시고,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지요. 이어지는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작별을 앞두고 불안과 당혹감에 휩싸인 제자들을 격려하시며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는 연세 지긋한 분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신부님, 천국이 정말 있나요?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가는 거 맞지요?”
툭 던져 보는 질문인 것 같아서 그분들을 다시 쳐다보면 진짜로 궁금하다는 표정입니다. 죽음의 때가 멀지 않다고 여겨지면, 갈 길이 총총하다고 생각되면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불안과 의심의 싹이 돋아나나 봅니다.
어느 날에는 저의 어머니도 그렇게 물어 오셨습니다. 한평생 열심히 기도하며 살았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셨습니다. 죽음은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혹독한 시련으로 다가오나 봅니다. 제가 그분들께 드린 대답이, 예수님께서 불안해하는 당신 제자들을 다독이시며 하신 오늘 복음 말씀이었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1-3).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돌아가는 인생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당신이 가시고 안 계시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심란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주님만 따라 살아왔는데 주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저의 어머니 돌아가실 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일찍 어머니를 떠나 살았기에 어머니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저는 어머니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역시 슬픔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적으로 마음이 허한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었으며, 엄마 없는 이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른이고 엄마와 떨어져서 오래 살았는데 왜 살 수 없겠습니까마는 인간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그러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살 것을 생각할 때는 그런 마음이었는데 우리가 하느님께 갈 것을 생각할 때는 그런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우리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리된 것입니다. 돌아가셨다는 말은 어머니가 저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떠나오셨던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신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신앙적으로 어머니는 저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도 오늘 제자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고 16장 26절에서는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살 것을 생각할 때는 제게 어머니가 떠나신 것이나 제자들에게 주님이 떠나신 것은 이 세상을 이제 어떻게 살까? 생각하며 심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갈 것을 생각할 때면 저의 어머니나 주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보다 앞서가시며 우리가 나중에 가야 할 길을 미리 보여 주시는 것이기에 심란할 것이 도무지 없고 도리어 희망을 주는 것으로 기뻐할 일이지요.
그렇습니다. 옛날 가요에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우리 인생은 돌고 도는 인생이 아니라 돌아가야 하는 인생이지요.
그런데 잊어야 할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야 하고, 고향이나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그 돌아가는 길에 주님께서 우리의 길이시랍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이 참된 앎의 길이다.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과 ‘세 번 부인하게 될 베드로에 대한 예고’ 다음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함께 밝혀줍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본 바를 말하니’, 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아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는 잠시 동안만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7,33)고 말씀하셨건만, 이를 알아듣지 못한 토마스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발언이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진리”(áληθεια)라 함은 그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곧 진리를 발견하고, 성부를 만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생명’이심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알게 됩니다. ‘앎’은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서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으며, ‘참된 앎’은 그것을 실행할 때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으면서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써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께서 아버지 집에 손수 거처를 마련하러 가시는 이유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그 유명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길’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길은 분명히 아버지께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리일까요? ‘행복’입니다. 이 세상은 세속-육신-마귀와 관련된 것이 행복이라고 속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다는 믿음이 곧 행복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생명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생명력을 가지라면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야 할 목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 각자에게 영원한 사명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누군가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우리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러 아버지께 먼저 가십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우리 이름을 부르셔서 당신을 따르게 하십니다. 이것이 구원의 원리이고 사랑의 방법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송탄에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빌라에 혼자 사셨습니다. 무릎 수술도 하셔서 점점 계단을 내려오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다리에 근육이 빠져서 넘어져 골반 대퇴골 뼈가 부러지었습니다. 3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요양병원에 계십니다.
자녀 된 도리에서는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아무리 운동하시라고 해도 아프다고 안 하시고 해 봐야 뭐 하느냐고 안 하시고 기분이 안 좋다고 안 하시는 적이 많습니다.
저희는 어머니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있는 본당 바로 옆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 하나를 샀습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그동안 모아오신 모든 돈이 있었습니다. 집을 사고, 잘 꾸미고 이사하는 등에서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희망을 품게 되셨습니다. 스스로 병원이 지옥처럼 괴롭다고 하십니다.
분명 여기로 오시면 편합니다. 저희가 집을 마련하고 공사를 하고 이사를 할 때는 어머니를 떠나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성당에 다니기 위한 숙소를 마련하고 있음을 믿어야 하십니다. 이것은 분명 어머니를 다시 걷게 할 것입니다. 거처할 곳은 ‘희망’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머니의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됩니다.
예전에 대학 들어가자마자 가톨릭학생회에 들어서 데모에 끌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무엇 때문에 가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서울역으로 갔다가 장소가 바뀌어 명동성당이 새로운 집결 장소가 되었습니다.
허둥대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저는 서둘러 어디론가로 가는 여학생에게 여기가 집결 장소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며 손바닥에 무언가 썼습니다. 저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하니 짜증 내며 명동성당으로 집회 장소가 바뀌었다고 말하고는 뛰다시피 가버렸습니다.
홀로 된 저는 그냥 집으로 와 버렸습니다. 뉴스를 보니 명동성당으로 들어간 학생들은 포위되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며칠이 되었고 오랜만에 나오게 된 같은 동아리 형은 맞아서 한쪽 눈이 함몰됐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준비한 참 행복과 평화를 주는 거처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책임 없이 이끌고 그 결과는 고통뿐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곁에 거처를 미리 마련해야 합니다. 사제가 한다면 이것은 소공동체 시스템이 될 수도 있고, 레지오와 같은 단체들도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이끌었을 때 그들이 행복하게 머물 곳을 먼저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들을 찾아 떠나기 전에 아흔아홉 마리가 자신들끼리 잘 지낼 수 있는 산에 거처를 마련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받은 이들이 반드시 들어가서 행복하게 거처할 곳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니면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집에 손수 거처를 마련하러 가시는 이유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기 위함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됨이 곧 사랑이 됨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깊은 고민이 있을 때, 행복한 미래를 떠올릴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걱정이나 고민 등을 떨쳐 버려야 하는데, 부정적인 생각이 자기를 잡아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생각 하나가 납니다.
컴퓨터가 막 퍼지기 시작했을 때(인터넷은 없고, PC통신만 있을 때입니다), 컴퓨터에 종종 문제가 발생하곤 했습니다. 컴퓨터를 가지고는 있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 친구 역시 어느 날 자기 컴퓨터가 이상하다면서 살펴달라고 했습니다. 점점 느려지고 작업을 하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먹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거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확률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바이러스 프로그램(당시에는 백신이 대중화되지도 않았습니다)으로 검사하니 어마어마한 숫자의 바이러스가 나왔습니다. 곧바로 백신 프로그램으로 치료했고, 그 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나 걱정 등의 부정적 생각이 이 바이러스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부정적 생각들이 나의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제대로 지금을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삶 안에서 백신처럼 그런 고민이나 걱정 등의 부정적 생각들을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은 없을까요?
주님이 그런 역할을 해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주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길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목적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길을 따라갔을 때, 오히려 목적지의 반대편으로 갈 수도 있는 법이지요. 그러나 진리 그 자체인 주님이시기에 우리를 생명이 주어지는 목적지로 제대로 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불편함이 사라지는 진짜 생명이 주어지는 아버지의 나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런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겠다고 하십니다. 가장 힘센 분이 우리 편이기에 주님 안에서 부정적 생각의 침범을 막으면서 지금을 잘 살고, 또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주님보다 세상을 따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길보다 세상의 길을 통해 순간의 만족만을 누리려고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은 세상의 언어입니다. 그 언어를 통해서는 우리 편이신 주님과 함께하기가 힘듭니다. 오로지 주님의 언어인 사랑을 통해서만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인생에 믿음을 선사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클라라 마리아 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길이 아름다워야 삶도 아름답습니다. 가장 좋은 길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길이길이 감사해야 할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길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로 인해 더 즐겁고 행복해야 합니다.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우리의 새 역사가 쓰입니다. 길도 진리도 생명도 실천을 통해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실천이 세상을 비춥니다. 실천이 소중합니다. 길은 생명이고 모든 생명은 진리를 향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대신할 그 어떤 길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뜻은 예수님 안에서 참된 삶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임을 믿습니다. 가장 좋으신 도우심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길을 알고 진리를 알고 새 생명을 얻는 소중한 오늘 되십시오.
요한복음 14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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