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니, 이제는 죽음이 그분을 누르지 못하리라. 알렐루야.
완전한 빛이신 하느님, 저희가 이 세상에서 파스카 신비를 경축하게 하셨으니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12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1,1-18)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오늘 복음
(요한 10,1-10)
나는 양들의 문이다.
사도 11,1-18
오늘 제1독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그 무렵
1 사도들과 유다 지방에 있는 형제들이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에게 따지며,
3 “당신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고 말하였다.
4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5 “내가 야포 시에서 기도하다가 무아경 속에서 환시를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내려앉는데 내가 있는 곳까지 오는 것이었습니다.
6 내가 그 안을 유심히 바라보며 살피니, 이 세상의 네발 달린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보였습니다.
7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8 나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9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로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10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것들은 모두 하늘로 다시 끌려 올라갔습니다.
11 바로 그때에 세 사람이 우리가 있는 집에 다가와 섰습니다. 카이사리아에서 나에게 심부름 온 이들이었습니다.
12 성령께서는 나에게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갔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 집에 들어가자,
13 그는 천사가 자기 집 안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야포로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여라.
14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5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6 그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7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18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요한 10,1-10
오늘 복음
나는 양들의 문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12일
조승현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8:56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선교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독서는 야포에서의 체험으로 이민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된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구원의 경계가 넓어진 것이지요.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를 통하여 ‘교회 밖의 구원 가능성’을 밝혔습니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교회 헌장, 16항).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 그것이 비록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
그렇다면 신앙에 대한 확신, 나아가 선교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이 그 답을 알려 줍니다. 다른 종교 신자와 비그리스도인의 구원 가능성을 열어 두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구원의 가장 확실한 길이요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양들의 문”(요한 10,7) 곧 양들이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는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둑이나 강도처럼 제멋대로 들어와 양들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안전하고 친밀하게 이끄시는 “양들의 목자”(10,2)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 나는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그로 말미암아 내가 품고 있는 희망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도록 준비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오늘 사도행전은 11장으로서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들었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들으면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소식을 들은 할례받은 유다인들이 베드로에게 따지고 듭니다. 예를 들어 북한이 종교에 대해 개방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그래서 그런 소식을 들을 때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북한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은 신자들이 많았고 재속프란치스코회원들 가운데도 왜 빨갱이들을 위해 일하냐며 북한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형제가 자기들 영적 보조자로 오는 것을 반대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자기가 전광훈이라는 자가 하는 탄핵 반대 집회에 지금 가는 중인데 그 이유가 자기는 천주교 신자지만 전광훈이가 동성애를 반대하기에 거기에 후원금도 내고 그 집회에도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탄핵을 반대하는 것은 그분의 정치적 선택이니 이해하기 어려워도 존중하지만 동성애를 반대하기에 거기에 가고 후원도 한다는 것은 신자로서 안타까웠습니다. 왜냐면 우리 가톨릭은 동성애자들이 축복을 청할 때 축복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동성애를 인정하거나 동성애자의 결혼을 축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그들과 그들의 청을 거부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신앙을 가지기 쉽지 않습니다.
곧 동성애는 반대하지만, 동성애자를 거부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이는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을 미워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라는 교회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인 아니라고 하며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모는 사람도 죄인이 아닌 것이 아니고 모두 죄인이며, 무엇보다 주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의 비난을 받으신 것도 주님께서 세리나 죄인들과 식사를 같이하신 것 때문이잖습니까? 우리는 자주 우리 무리에서 배제하려고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배제하려고 하고 내 편이 아닌 사람을 배제하려고 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배제하려고 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무리에서 배제하려고 하는 것이 교회 안에서 배제하려고 하는 것으로 발전하곤 합니다. 주님은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다 모으러 오셨고 그것이 교회인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오늘 사도행전 베드로 사도의 말을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문'은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에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여기에서,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 곧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
또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며, ‘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 드나듦은 오늘 <복음>에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임을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 곧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사실, 예수님이라는 ‘문’은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러니,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하게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를 따르지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그렇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0,7
나는 양들의 문이다.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당신의 집에
저의 거처를 마련해주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참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되는 지혜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0장의 착한 목자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중요한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으로 들어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그들을 ‘앞장서’ 이끌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에 다른 목소리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 자신이 양들의 ‘문’이라고 하시며, 당신을 통해야만 구원에 이르고 생명의 풀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와는 반대로, 도둑은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와 양들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그들은 양들을 강제로 몰아 자기가 원하는 곳, 즉 파멸의 도살장으로 끌고 갑니다. 양들이 스스로 따르는 것이 아니기에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참 목자와 도둑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문’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 그 말씀에는 ‘자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반드시 자유를 보장합니다. 자유가 곧 생명이요, 생명이 곧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유를 가졌지만,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 자유를 빼앗기고 선악과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나설 자유마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다. 이처럼 자유를 빼앗는 존재의 뒤에는 ‘지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자유까지도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신다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자유를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그러나 당시 영주처럼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면, 그것은 지옥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아직 누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인지 분별할 지혜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교묘하게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이들에게 집착하여 그들의 노예가 되고, 그들의 말에 쉽게 휩쓸리곤 합니다. 이러한 심리적 조종을 우리는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릅니다.
영화 '가스등'은 바로 이 가스라이팅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젊은 여성 폴라는 매력적인 남편 그레고리와 결혼하지만, 그는 점차 폴라를 교묘하게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레고리는 집 안의 물건을 숨기고는 폴라가 잃어버렸다고 다그치고, 밤마다 들리는 이상한 소리와 희미해지는 가스등 불빛에 대해 폴라가 망상에 빠졌다고 몰아세웁니다.
폴라는 점차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며 스스로 미쳐가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폴라 이모의 보석을 노린 그레고리의 치밀한 계략이었습니다. 다행히 한 형사의 도움으로 폴라는 진실을 깨닫고 남편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습니다.
이 영화 속 그레고리처럼, 우리를 강요하고 통제하려는 목소리는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 뿐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매력적으로 들리고 달콤한 약속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 뒤에는 어두운 의도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최대한 우리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참사랑은 생명을 주고, 생명을 주는 사람은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든, 사람이든, 이념이든, 사상이든 간에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것 뒤에는 지옥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솝 우화 '개와 늑대' 이야기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굶주린 늑대는 목줄 자국이 선명한 살찐 개를 부러워하지만, 개가 자유 없이 주인에게 매여 산다는 사실을 알고는 차라리 배고픈 자유를 택합니다. 아무리 편안한 삶이라도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종의 멍에가 아닌 참된 자유를 주십니다. 그분은 결코 강요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스스로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양들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그들을 깊이 아시고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는 분 뒤에 천국이 있음을 아는 양들은 자발적으로 그분을 따라나섭니다.
제가 매일 ‘하느님 사랑 시냇물’(하.사.시.)을 나누는 것도, 문지기의 심정으로 여러분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더욱 분명히 듣고 그분을 따르도록 돕고 싶은 작은 노력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 목소리를 잘 듣고 따르지만, 어떤 분들은 아직 귀 기울이지 않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언제나 그 열매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강요와 속박이 아닌, 참된 사랑과 자유 안에서 그분을 따를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양들의 문이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결과를 받게 될 경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한계가 있는 법이 아닐까요? 최선을 다했음에도 충분히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자녀의 미래에 특히 신경 쓰는 부모님은 아이의 성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성적이 잘 나오다가 성적이 떨어지면 부모님은 대체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래!”
시험을 못 볼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없기에 분명 실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최선을 다해야 해’라는 말보다, ‘우리 함께 해보자’라는 위로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혼자만의 ‘열심’이 아닌 함께하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창조 목적도 여기에 맞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의 말씀도 ‘함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제자단을 만드신 것도 그렇고, 전교 활동을 보내실 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것도 그러한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먼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양들의 문’(요한 10,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바로 구원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양들을 당신 문으로 들여보내실까요? 착한 양만일까요? 아니면 특별한 능력이 있는 양만일까요? 아닙니다. 아파서 힘들어한다고 해도, 또 실수를 많이 해서 사고뭉치라고 해도,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해도 양이라면 당신 문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힘쓰십니다. 즉, ‘최선을 다해 나에게 와야 해’라고 하시지 않고, ‘우리 함께 하자’라고 힘과 용기를 주시는 사랑 가득하신 분입니다.
이 문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고, 또 그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에 들어갈 수 없는 도둑이며 강도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악의 세력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문에 들어갈 수 없기에, 그곳에 들어가는 양들을 계속해서 유혹합니다.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밖으로 데리고 갑니다.
주님의 문으로 주님과 함께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 이웃이라는 존재도 중요합니다. 그들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양이기에,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함께 생명을 누리면서 참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용기 내서 생각하는 대로 살아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머잖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폴 브루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양들의 문이다.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문이 있습니다. 예수님 바로 그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생명의 문이 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의 문이 되십니다.
생명과 구원으로 이루어진 문입니다. 양들의 문을 드나들면서 우리도 좋은 사람이 됩니다. 두려움을 이기고 어둠을 이기는 문이 우리를 살립니다. 문을 잃어버렸기에 사랑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문을 되찾는 것이 사랑을 되찾는 길입니다. 사라져야 할 것은 문을 이용하지 않는 우리들의 교만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다시 만납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는 생명의 문을 통하여 우리는 들어갑니다.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며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 생명의 새날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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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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