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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5/11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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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여셨네. 알렐루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앞장서 가신 나라로 나약한 양 떼인 저희를 이끄시어 하느님과 함께 천상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5월 11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11일 부활 제4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3,14.43-52)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제 2독서
    (묵시 7,9.14ㄴ-17)
    어린양이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 오늘 복음
    (요한 10,27-30)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사도 13,14.43-52
오늘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그 무렵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14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43 많은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따라오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이야기하며 하느님의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하였다.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묵시 7,9.14ㄴ-17
오늘 제2독서

어린양이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나 요한이 

9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원로 가운데 하나가 

14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17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요한 10,27-30
오늘 복음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11일
김진철 루카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15:3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성소,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

오늘 성소 주일은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와 선교사의 성소 증진을 위하여 교회 구성원이 모두 관심을 두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뿐만 아니라 혼인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도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성소)으로 봅니다.

요즘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만혼과 혼인 기피, 저출산, 유아 세례 기피 현상 등이 심해지고 있어 조만간 온 교회가 혼인 성소를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도 제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에는 수도자를 ‘성직자-수도자-평신도’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형태의 교회 구조 안에 놓인 중간 신원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도자는 교회의 한 신분이라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이요 생명입니다.

‘주님 교회의 심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고백이야말로 수도자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 표현입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머리와, 분주히 움직이는 손발도 중요하지만 그곳으로 피를 보내 주는 심장이 없다면 온몸이 멈추듯 말입니다.

수도자는 현세에서 이미 하느님과 깊이 결합하여 하늘 나라를 증언하는 이들이자 하느님 사랑의 샘에서 부단히 은총과 사랑을 길어 올려 세상에 보내주는 이들입니다.

그러한 수도자들의 수가 뚜렷이 줄고 있습니다. 사랑을 깊이 맛 들인 그분들의 비춤이 없다면 누가 희생하고 봉사하려 할까요?

복사 아이들을 격려해서 사제로 키워 내고, 그들이 사랑과 열정에 불타 이역만리에 선교사로 나서게 한 데에는 수많은 수도자의 땀방울과 기도가 있습니다. 수도 성소를 위하여 우리 모두 힘껏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이 진정 나의 목자라면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을 우리는 뭐라고 하나요? 나의 목자라고 하나요? 물론 신앙인인 우리는 주님을 나의 목자라고 하겠지요.

생각으로는 그리고 말로는. 그러기에 관건은 실제로 나의 목자이냐? 그것입니다. 그 기준을 오늘 주님께서는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 목자라면 그분의 양들인 우리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우리는 여기서 알아듣는다는 말을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듣는다.’와 ‘안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우선 양들인 우리는 목자인 주님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듣기 싫어하지 않고 기꺼이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말씀이 듣기 싫고 그래서 듣지 않는다면 주님의 양이 아니지요. 십자가 지라는 말씀은 듣기 싫고 그래서 듣지 않는다면 주님의 양이 아닙니다.

둘째는 다른 말이 더 솔깃하여 주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은 듣고 주님 말씀은 듣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 말씀을 말씀이 아니라 개소리로 여기기에 무시하고 듣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은 그분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이런 사람에게는 목자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목소리를 알아듣기 전에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봐야 합니다. 먼저 나 같은 양들을 속속들이 아시는 착한 목자로 주님을 알아봐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아시는 주님이 좋습니까? 나를 속속들이 아시기에 두렵습니까? 아니면 나의 고통과 어려움을 다 이해하시니 감사합니까?

다음으로 우리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는 착한 목자로 알아봐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팔아 자기 배를 불리는 거짓 목자와 달리 우리를 푸른 풀밭으로 이끄시고 우리 배를 불리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러니 주님을 이렇게 알아뵌다면 우리가 이제 할 것은 목자를 잘 따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또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양들이라면 생각으로만 또는 말로만 주님을 나의 목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 주님! 하고 불러도 따르지 않으면 그분은 나의 목자가 아니고 나는 그분이 양이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며, 착한 목자 주일이요 성소주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참으로 귀한 말씀을 듣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목소리들이 혼탁하게 뒤섞여있습니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온갖 뉴스들과 비난비판의 소리들,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서도 요란스런 생각들의 소리가 거세게 들려옵니다. 우리는 이 많은 소리들의 홍수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구별할 줄 알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사도13,47)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사도 바오로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던.”(사도 13,52 참조) 제자들이 목자들의 모델로 제시됩니다.

<제2독서>에서는 목자인 ‘어린양’의 보살핌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둘러싸고 윽박지르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요한 10,27-28ㄱ)

여기에서, ‘목자’의 특성은 ‘알다’ 와 ‘준다.’ 라는 동사로, ‘양’의 특성은 ‘알아듣는다’ 와 ‘따른다’ 라는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양들’은 들려오는 그 많은 말들 중에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들’이라면, 분명 그 많은 목소리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양들은 어떻게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는가?

그것은 먼저 목자가 양들을 “알고” 사랑하여 불렀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지극한 사랑의 목소리로 양들을 거듭거듭 불렀고, 그 바람에 목자의 목소리가 양들의 귀에 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체험으로 알고 기억하고 있어 알아듣게 된 까닭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 (신명 28,1)

그러니 이미 ‘마음에 새겨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신명기>의 ‘쉐마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하느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신명 6,4-6)

그러니 “알다”라는 단어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알아듣는다.”라는 말은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 곧 ‘믿음으로 듣는 것’이요, ‘사랑을 깨달아 알아듣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으로 사랑을 받아들인 내면적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인격적인 교류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양들은 목자를 따르게 됩니다. “따른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를 넘어서, ‘곁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곧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믿고 사랑하는 이는 순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명으로 따르면, 더 더욱 사랑을 깊이 깨달아 알아갑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이에게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 곧 당신의 생명이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요한 10,28).

결국, 이 네 동사는 모두가 관계를 깊이 맺는 진실 된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성소의 길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주님과의 관계를 깊고 진실 되게 맺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말씀을 듣고 체험하면서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 10,28)

“당신의 손”은 바로 ‘당신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당신의 권능의 손에서 아무도 그분의 양들을 빼앗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잘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지적을 들어봅니다. 

“그러나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했지,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가진 이는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아무도 우리를 하느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고, 아무도 우리를 채 갈 없지만, 우리가 게으르다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강해 18,3)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완고함으로 “주님의 목소리”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떨어져 내리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목장의 주인이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30)

그렇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자와 양들도 서로 알아보고 한 몸을 이루며, 목자는 당신의 지체인 양들을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보다도 양들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양들을 구하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0,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주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숨지 않고 피해 달아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 나서서 주님임을 알고 
당신 사랑의 목소리 듣게 하소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소서.

깨달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새기게 하시고 따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을 따름이 제 행복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 양 떼를 전부 지켜내는 법

오늘 우리는 부활 제4주일, 특별히 ‘성소 주일’이며 ‘착한 목자 주일’로 기념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목자이신 예수님께로,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의 목자로서의 소명으로 깊이 초대합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목자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며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영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양들은 우리의 배우자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자녀들, 혹은 가까운 친구나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소중한 양 떼를 바로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은 “너희는 빈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예물을 넘어, 우리 삶의 열매, 우리가 돌본 영혼들을 주님께 봉헌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마태오 25:14-30)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은 각자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이윤을 남기기를 기대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빈손으로 당신 앞에 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그분께 무엇인가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에서처럼, 야곱이 마지막에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에사우 앞에 설 힘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맡겨진 양 떼를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 참 주인이신 분께로 이끌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남아메리카의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다섯 명의 젊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수년 후, 그 순교자들의 가족과 동료들은 다시 그 부족을 찾아갔고, 그들의 용서와 사랑에 감동한 아우카족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그 부족 출신의 목회자들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왜 젊은 부인들은 자신들의 남편을 인정사정없이 죽인 그 부족을 다시 찾아갔을까요? 다른 곳에, 그들을 받아들이는 곳에 가서 선교하면 안 되었을까요? 그들이 그만큼 특별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남편과 친구들이 그들에게 피를 쏟았습니다. 그 피가 그들에게 묻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왜 사랑하게 될까요? 자녀들 안에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의 피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집의 자녀들 안에는 다른 집 부모의 피가 들어있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피와 희생이 들어있는 자녀를 남편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와 남편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당신이 양 떼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양 떼는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있습니다. 누군가 그 양 떼 중 한 마리라도 위협한다면 하느님께서 가만히 있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뛰쳐나가는 가리옷 유다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당신 양 떼를 다 지키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탈리아 카시아에서 일어났던 성체 기적과도 같습니다. 1300년경, 어느 날 한 사제가 위중한 병자에게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급히 가던 중, 축성된 성체를 성합이 아닌 자신의 성무일도 책갈피에 끼워 넣었습니다.

병자에게 성체를 영해주기 위해 책을 펼쳤을 때, 성체는 온데간데없고 양쪽 페이지에 선명한 핏자국만 남아 있었는데, 그 핏자국은 성체의 둥근 모양이었고 심지어 한쪽에는 그리스도의 옆모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 성체가 스며든 종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실에 모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그들에게 발라야 합니다. 성녀 모니카를 본받읍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 이끄시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하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피를 뿌리기 위해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지만, 살려고 하면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지난주 우리 성당에서는 교구에서 주최하는 꽃봉오리 그림대회가 열렸습니다. ‘성당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는 주제였지요. 어떻게 그리는지 둘러보는데, 크레파스로 열심히 그림 그리는 아이의 모습에서 어렸을 때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소풍 가서 그림대회가 있었습니다. 크레파스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너무 힘을 주었을까요? 크레파스가 뚝 하고 부러진 것입니다. 그 순간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그림대회 간다고 어머니께서 사주신 새 크레파스였거든요. 그런데 가장 큰 이유는 이 크레파스가 부러졌으니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울고 있는 제게 선생님께서 다가오셨고 크레파스 부러진 것 때문에 울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부러져도 그릴 수 있어.”
 
크레파스가 부러졌다고 색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 수는 있지만, 별문제 없이 색칠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림을 다 그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부러짐의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병에 걸렸을 때, 실패의 경험을 하게 될 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느낄 때 등이 바로 부러짐의 체험을 할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요? 삶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살 수 없는 것일까요? 특히 하느님의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다면 그럴수록 더 큰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다시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오늘은 성소주일로 특별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한 날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인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부르심이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하면서, 특히 능력과 재주가 많아야 부르심이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 부르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고 부르셨던 제자들 역시 특별하지 않음을, 오히려 부족함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러짐의 체험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그 안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으면 제대로 응답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부모의 사랑은 완전하다. 그 사랑은 자녀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변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가슴 떨리는 시절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부르심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사랑의 신비입니다. 감사의 정신을 되살리는 성소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크옵신 사랑을 만나는 성소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장점도 단점도 모두 사랑하시는 은총의 하느님이십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진심어린 기도를 드립니다.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도우심입니다. 행복은 낮아지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진정한 선물입니다.

미사를 봉헌하며 행복한 한 사람의 수도자가 됩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다시 설레는 신앙인이 됩니다. 하느님의 성소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우리의 모든 삶입니다.

청춘을 바치고 삶을 바치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두 바친 이들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아십니다. 모든 감정을 하느님과 나눕니다.

성소 주일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을 놓치지 않고 따르는 행복 주일입니다. 행복은 하느님께 있는 부르심의 신비입니다.

부르심의 행복은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세월과 함께 새로워지는 기도입니다. 이 부족한 사람을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시 행복한 수도자이며 사제가 되겠습니다. 행복한 사람의 부르심은 5월처럼 아름답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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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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