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2025년 3월 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3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집회 17,1-15)
주님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 오늘 복음
(마르 10,13-16)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오늘 말씀 카드
(집회 17,3)
그분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그들을 만드셨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집회 17,1-15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1
주님께서 사람을 흙에서 창조하시고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2
그분께서는 정해진 날수와 시간을 그들에게 주시고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다스릴 권한을 그들에게 주셨다.
3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처럼 그들에게 힘을 입히시고 당신 모습으로 그들을 만드셨다.
4
그분께서는 모든 생물 안에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놓으시고 그들을 들짐승과 날짐승의 주인이 되게 하셨다.
5
그들은 주님의 다섯 가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그분께서는 여섯 번째로 그들에게 지성을 나누어 주시고 일곱 번째로 그분의 능력들을 해석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
6
그분께서는 분별력과 혀와 눈을 주시고 귀와 마음을 주시어 깨닫게 하셨다.
7
그분께서는 지식과 이해력으로 그들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선과 악을 보여 주셨다.
8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 주시어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게 하시고 그들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영원히 찬양하게 하셨다.
9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선포하기 위하여
10
그들은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리라.
11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생명의 율법을 그들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시어 지금 살아 있는 존재들이 죽을 몸임을 깨우쳐 주셨다.
12
그분께서는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의 판결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13
그들의 눈은 그분의 위대하신 영광을 보고 그들의 귀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14
그분께서는 “온갖 불의를 조심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들 각자에게 제 이웃에 대한 계명을 주셨다.
15
그들의 길은 언제나 그분 앞에 드러나고 그분의 눈앞에서 감추어지지 않으리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마르 10,13-16
오늘 복음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때에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1일
윤상현 비오 신부
✚ 교황님 3월 기도지향 00:38
✚ 미사시작 01:00
✚ 강론시작 08:55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가회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가회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06: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생중계 없음 - 남양성모성지 온라인 매일미사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남양성모성지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생중계 없음 / 화 11:00 / 수 11:00 / 목 11:00 / 금 11:00 / 토 11:00 - 원당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원당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원당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10: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10:00 - 초당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초당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초당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0:30 / 월 06:30 / 화 19:30 / 수 10:00 / 목 19:30 / 금 10:00 / 토 10:00 - 팔로티회 온라인 매일미사
팔로티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 가까이 온 아이들을 그분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의 행동을 보시고 언짢아하십니다. ‘언짢아하다’는 ‘매우 화를 낸다.’의 뜻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였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린이들을 쓰다듬어 주는 행위가 잘못이어서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막아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린이를 쓰다듬는 행위는 안수처럼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는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습니다.
율법 학자가 제자나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고, 실제로 라삐들도 그러한 관습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아마 예수님께서 어린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셔야 하므로, 어린이들을 막아서는 것이 그분께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려한다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강하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보여 주시고자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몸소 손을 얹어 그들 앞에서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다시 어린이가 되는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제 생각에 유산만 달라고 하고 받은 다음에는 부모를 버리는 자식이 제일 불효막심한 자식일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재산을 챙긴 후 아버지를 떠나는 그 아들과 같은 자식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만드시고 주신 그 모든 것을 소유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은 싫다고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탕자가 어린아이 때부터 아버지를 떠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재산보다 아버지가 더 소중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재산도 다 헛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머리가 굵어지고 자기와 자기 세계가 생기면서 차츰 자기 것을 챙기기 시작하고 아버지를 떠나야지만 완벽하게 자기 세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종교를 믿었고 부모를 따라 성당에 갔었습니다.
그러다 사춘기가 되어 부모와 독립전쟁을 치르며 친구와 더 어울리게 되고, 어른이 되어 부모보다 연인을 더 사랑하고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게 되면서 부모의 종교와도 멀어지고 하느님과도 또 하느님 나라와도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다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이런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늙으면 애가 된다는 것에 나쁜 뜻도 있지만 이런 뜻에서 우리는 다시 어린이가 되어야 하고 늙을수록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제 자랑하는 것 같지만 현재까지는 제가 이런 뜻에서 어린아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감히 말하곤 하는데 더 늙어서 나쁜 뜻에서 애가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늙을수록 이 세상에서는 멀어지고 하느님 나라와는 가까워지는 저를 꿈꾸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베풀어진 사랑 받아들이기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9장)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이라 함은 ‘하느님 나라’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가려는 이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획득하는 나라’가 아니라 은총으로 ‘주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어른 이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어린이는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른들은 ‘아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모르기에 놀라워하고 경이롭게 여기고 경외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채로 받아들입니다. 곧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까닭입니다.
아인쉬타인은 말합니다.
“경외심을 느끼고 감탄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그것이 이해가 되면 받아들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곧 지성적 동의를 통해 아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른 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선사된 것, 베풀어진 것, 선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요, 주어진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은 의탁과 신뢰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결국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습니다. 곧 ‘베풀어진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선사되고 주어져 이미 ‘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와’ 있는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오히려 막고 있는 이들을 깨우치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0,15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주님!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놀라워하고
경배하게 하소서.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속해 있고
당신 생명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모신심미사) 참행복은 핏줄보다 가족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신앙이 먼저일까, 가족이 먼저일까?’를 고민해야 할 때가 옵니다. 이때 오늘 복음이 도움이 됩니다.
오늘 복음(마태오 12,46-50)에서 예수님께서는 피로 이어진 형제자매와 어머니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시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을 뛰어넘어,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희생으로 묶인 공동체가 더 진실하고도 강력한 가족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우리 한국에는 오래전부터 “이웃사촌”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촌은 분명 혈연으로 연결된 친척을 말하지만, 가깝게 살지 않으면 정작 자주 보지 못합니다. 반면, 막상 가까운 동네에서 자주 보고 정을 나누는 이웃들은 혈연은 아니더라도 친사촌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가족”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요? 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서로 사랑하고 희생하는 마음으로 결속된 이들이 어느새 혈연보다 더 끈끈한 유대를 이루는 것이지요.
이런 점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 있습니다. 영화 「인스턴트 패밀리(Instant Family)」는 부부가 세 아이를 입양하게 된 계기와 그 후의 이야기를 사실적이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냅니다. 이 부부는 처음부터 “우리 힘으로 아이를 키워 보자”라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충동과 책임감이 뒤섞인 상황에서 위탁가정 시스템을 통해 한 아이를 맡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가 보니 열다섯 살짜리 큰딸 리지와 동생 둘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떼어놓기가 너무 미안해서, 다 함께 입양을 진행하게 됩니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쉽지 않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큰딸 리지는 가족이나 어른에 대한 불신이 가득합니다.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새 부모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사소한 충돌들이 계속됩니다.
아직 어린 동생들은 시시때때로 사고를 치고,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큰딸은 “친엄마가 곧 돌아올 텐데, 왜 우리가 여기서 살아야 하느냐”며 입양 부모와 대립하지요. 부모 입장에서는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입양으로 인한 갈등이 심해집니다.
그러다 친엄마가 정말로 연락을 해오고, 법원 판결에 따라 아이들이 그 엄마 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미 정이 든 새 부모와 세 아이들은 이 소식을 듣고 복잡한 감정을 느낍니다.
처음에는 그저 “착한 일 좀 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아이들을 키우면서 대단히 많은 희생과 사랑을 쏟아붓게 되었고, 그것이 점점 ‘진짜 가족애’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아이들 역시 처음에는 “우리 엄마가 있는데, 왜 남의 집에서 이 고생을 해야 해?”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새 부모가 보여 주는 따뜻한 돌봄과 헌신을 느끼며 이 가족 안에서 안정감을 얻습니다.
법적, 제도적 절차 때문에 아이들이 진짜 엄마 품으로 가야 할지, 새 부모와 계속 살아야 할지가 결정되지 않았던 그 갈림길에서, 큰딸 리지는 갈등을 극도로 표출합니다. 엄마를 배신한다는 죄책감, 이제 와서 새 부모를 떠나기에는 차마 아쉬운 마음, 동생들을 생각하는 책임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큰딸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 준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고, 새 부모와 함께 살겠다는 쪽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현실적으로 자신들을 버리고 마약에 취해 살아온 친엄마보다, 매일매일 곁에서 희생하며 함께 울고 웃어 주었던 새 부모가 ‘진짜 가족’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이 영화는 세 아이와 부부가 법원 판결을 통해 한 집안 식구가 되는 모습으로 감동적인 결말을 맺습니다. 혈연이 아니지만, “사랑과 희생이 섞인 새 부모”와 “그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 아이들” 사이에 맺어진 가정이야말로 한층 더 깊고 성숙한 가족이 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는 말씀이 결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과도 ‘진짜 가족’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이 가족이 주는 유익과 행복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생물학적 편안함이나 안정 대신, 서로의 삶을 조금씩 내어주며 함께하는 길을 택한 결과, 얻게 되는 기쁨과 연대감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편안함보다는 사랑과 희생이 공존하는 곳에서 더 큰 행복을 얻는다.”는 말은 한낱 이상론이 아니라, 우리가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이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애니메이션 영화 「E.T.」를 떠올려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꼬마 엘리엇과 그의 가족은 우주에서 온 이티와 가족처럼 지내면서, 서로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 얼마나 큰 감동과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체험합니다.
비록 마지막에는 이티가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야 해서 헤어지지만, 엘리엇 가족과 이티가 함께했던 시간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자 소중한 성장의 발판이 됩니다. 서로를 받아들이고 교감하는 과정 속에서 엘리엇과 형제자매, 심지어 어른들도 사랑을 배워 가게 되지요. 분명 가족이 아닌 존재임에도, 함께 생활하며 얻은 감동과 진정한 유대감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와도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다시금 알려 줍니다.
결국 우리가 한없이 편한 삶만 추구한다면, 새롭게 탄생할 수 있는 많은 가족의 기회들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잃는 사람은 오히려 목숨을 얻을 것이다.”(루카 9,24 참조)라는 성경 말씀처럼, 자기 자신만을 지키려는 태도는 오히려 생명을 잃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실천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혈연을 넘은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고, 그 안에서 더욱 풍성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말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토 5,14)라는 말씀과 맞닿아 있고,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내 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던 가르침을 되새기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부부 선교사 사례를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습니다. 짐 엘리엇과 엘리사벳 엘리엇 부부는, ‘피가 섞인 나의 가족’만을 위해 사는 삶보다는, “하느님 안에서 더 큰 가족이 되기 위한 길”을 택했습니다. 남아메리카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본국의 편안함을 내려놓고 험난한 정글로 떠났지요.
그 과정에서 짐 엘리엇은 비극적으로 원주민들에게 목숨을 잃게 되지만, 그의 아내 엘리사벳 엘리엇은 오히려 그 부족을 향한 원망 대신, 계속해서 복음과 사랑을 전하며 “다시 태어나도 이 삶을 선택하겠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가족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꿈꾸던 편안함을 희생했고, 그 희생이 빚어낸 열매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회심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가족은 물론 핏줄로 엮인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사랑과 희생이 깃들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가는 삶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길이자, 진정한 복음 실천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웃사촌”이라는 한국의 속담은 오래전에 이미 “핏줄보다 정으로 가족 같은 관계가 더 중요하다.”라는 진리를 일깨웠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역시 편안한 안주 대신, 서로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적극적으로 문을 열어 봅시다. 그 희생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탄생할 새로운 가족은, 결국 우리에게 더 깊은 행복과 진정한 구원의 삶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핏줄보다 가족”이 되는 길이요,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서 걸어가야 할 아름다운 길이 될 것입니다. 아멘.
부부는 왜 피가 섞이지 않았는데 0촌이고, 부모와 자녀는 1촌, 형제는 2촌일까? 그건 그냥 피를 나누는 것보다 사랑을 나누는 게 진정한 가족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저는 노트와 만년필을 이용해서 글을 씁니다. 그러다 보니 꽤 많은 노트를 사용하게 되는데, 노트를 쓰면서 가장 기쁠 때와 기분 좋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글이 잘 써질 때도 그렇기는 하지만, 가장 기쁠 때는 두꺼운 노트의 마지막 장을 채울 때이고 기분 좋을 때는 새 노트에 첫 글씨를 적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새 노트에 글을 쓰면서, 이번에는 더 잘 쓰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과거와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과 똑같다면 희망도 없을 것입니다.
강의 나갔을 때, 종종 청중에게 “최근에 뭔가 새롭게 시작한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몇 분이 대답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한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한다, 운동을 시작했다,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등등의 답변이 들려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생기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런 분들의 모습은 어린아이와 비슷합니다.
아이들은 새로운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합니다. 새로운 일에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큰 관심을 갖습니다. 월요일 새벽 미사 끝나면 미사 나온 아이들 라면을 끓여주는데, 맛있는 라면보다 더 좋아하는 라면은 새로운 라면입니다. 그만큼 새로움은 어린아이와 가깝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희망을 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움을 지향하는 아이에게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됩니다. 예수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
제자들의 꾸짖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 선포로 너무나 바쁘신데, 어린이들까지 성가시게 나서서 예수님께 축복을 받는 것이 방해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희망’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희망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고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믿고 신뢰하는 것이 나를 이끌게 합니다. 그래서 희망하지 않는 것은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능성과 실현성에 대한 감각을 갖춘, 희망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3월의 첫날입니다. 바로 내가 희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모두 인생의 격차를 줄여주기 위해 서 있는 그 누군가가 있기에 힘든 시간을 이겨내곤 합니다
- 오프라 윈프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의 마음이 하느님 나라의 가장 맑은 마음입니다. 삶에 재미와 기쁨이 있는 어린이가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주체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삶도 언제나 자연스럽게 만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러움이 편안한 관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편한 곳이 좋은 곳입니다. 편한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편한 곳에 편한 감동도 있습니다. 어린이의 정직한 고백과 기도 안에 유쾌한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어린이는 열고 어른은 닫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뛰노는 행복한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는 재미가 노는 재미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어린이들과 같이 즐겁게 놀고 즐겁게 감동하는 3월의 첫 시작이며 성 요셉 성월의 기쁜 첫날입니다. 먼저 잘 놀아야겠습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3/04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04 |
---|---|
25/03/03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03 |
25/03/02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02 |
25/02/28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28 |
25/02/27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27 |
25/02/26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26 |
25/02/25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