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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2/26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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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2025년 2월 26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2월 26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2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집회 4,11-19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11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12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13 
지혜를 붙드는 이는 영광을 상속받으리니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14 
지혜를 받드는 이들은 거룩하신 분을 섬기고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15 
지혜에 순종하는 이는 민족들을 다스리고 지혜에 귀 기울이는 이는 안전하게 살리라. 

16 
그가 지혜를 신뢰하면 지혜를 상속받고 그의 후손들도 지혜를 얻으리라. 

17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리라. 지혜는 그를 신뢰할 때까지 자신의 규율로 그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바른 규범으로 그를 시험하리라. 

18 
그러고 나서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리라. 

19 
그가 탈선하면 지혜는 그를 버리고 그를 파멸의 손아귀에 넘기리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마르 9,38-40
오늘 복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2월 26일
김준정 리차드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35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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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예수님의 이름은 그리스도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이름이다.

우리 가운데 자기 집단 중심의 사고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수에게 유익한 일이나 공동선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집단이 그 선을 행하고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다른 집단을 견제하고 비난하는 이른바 진영 논리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승을 자기들이 독차지해야 한다는 듯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스승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을 견제하는 제자들의 옹졸함과 반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지지자로 여기시는 예수님의 관용이 대조적입니다.

사실 누가 선을 행하는지보다는 선이 행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이, 공동선이 실현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은 명시적으로 예수님의 일행이 아니라 해도 예수님을 믿었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리스도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이름입니다.

칼 라너가 말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듣지 못하였거나 스스로 그리스도 신앙을 부정하거나 무신론자라고 해도 삶으로 복음과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일치에 대한 가르침에 이바지하기도 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한편으로는 본인의 종교나 종교적 신념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복음과 예수님을 위한 실천으로 인간의 구원에 협력하는 이는 예수님께 지지자로 인정받으리라는 희망을 드러냅니다.

누구에 의해서든 복음의 가치가 널리 퍼져 가기를 바라고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긋나는 사랑

간혹, 아니, 흔히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인데도 눈감아 주거나 심지어 두둔하고,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옳은 일을 해도 어떤 식으로든 헐뜯거나 글러 먹었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행위는 참사랑이 아닐뿐더러 정의롭지도 않습니다. 왜 참사랑이 아닐까? 누구 또는 한쪽을 배제하기에 참사랑이 아닙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참사랑인데 배제하는 사람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참사랑이 아닌 더 큰 이유는 이것이 아닙니다. 내 편만 사랑하는 것은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 불과하거나 그가 내 편에 서지 않거나 돌아서면 즉시 미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가 정의롭지 않은 것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는 불편부당해야 하고 늘 옳은 것을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말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이러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오늘 주님의 제자들 특히 사도 요한이 주님의 제자답지 않은 짓을 하고 태도를 보입니다.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 추방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합니다.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요한복음에 의하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 아닙니까? 그리고 물론 어떤 제자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했겠지요? 그런데도 그는 주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짓을 합니다.

동족이나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주님의 사랑을 독점하려고 했으니 말입니다.

어긋나는 사랑. 그렇습니다. 주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랑을 우리도 요한처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이웃을 사랑하더라도 내 편만 사랑하거나, 주님과 주님 사랑을 독점하려는 사랑을 할 수 있지요. 이웃 사랑은 잘못해도 주님 사랑을 독점하려 하진 않는다고요?

이웃이 나보다 뭘 더 잘하거나 선한 일을 하면 시기 질투하고, 이웃이 주님께 칭찬받는 것을 시기 질투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 사랑을 독점하려는 겁니다. 어쨌거나 오늘 얘기를 남 얘기처럼 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막지마라.

앞 장면에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믿음과 기도가 부족함을 질책 당한 제자들은, 이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참으로 옹졸한 태도를 보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 9,38)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들인 것이지, ‘우리’라는 자신들의 양들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떼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해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이지, ‘나’ 혹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에 속해 있기 위함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우리’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금방 분열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마르 9,39)

그러므로, 요한처럼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제자의 본분을 잃은 자세입니다. 사실,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하시며,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 혹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가? 입니다.

교회는 항상 열려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9,39-40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게 하소서.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심과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요즘 우리나라엔 존경받는 ‘어른’이 나오지 않을까?

며칠 전에 어떤 어르신 한 분이 저에게 정치적인 이유로 따지기 위해 찾아왔었습니다. 저를 알아서가 아니라 가톨릭 전체를 좌파 편향으로 보고 따지러 온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넓어지는 게 아니라 더 좁은 시각으로 편을 가르는 시각이 좀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이나 혹은 넬슨 만델라처럼 국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소위 ‘어른’이 요즘에 없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속 좁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데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를 막아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마귀를 쫓든 마귀가 쫓겨나면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마음이 매우 넓으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포용력이 있는 어른이 될까요? 이는 유명한 예화가 떠오르게 합니다. 두 하인이 자기가 옳다고 싸우다 한 하인이 화가 나서 주인에게 모든 사실을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 말이 옳구나!”라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인이 와서 또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가 옳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부인은 “그럼 누가 옳단 말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양반은 “당신의 말도 옳구려, 허허!”라고 웃었습니다.

이 주인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대의’(큰 뜻)에 손해를 끼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이를 포용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컴퓨터에 깔린 안 좋은 프로그램을 제거하면 좋은 것들까지 함께 제거되어 결국엔 윈도우 프로그램을 새로 깔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느 정도 안 좋은 것은 뽑아내지 말고 함께 두는 게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대의를 위해서.

19세기 초, 미국 예로우스톤 국립공원에서 늑대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대대적인 사냥이 이루어졌습니다. 목축업자들은 늑대가 가축을 해치는 주범이라 생각하여 늑대를 몰살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늑대가 사라지자, 오히려 사슴과 엘크의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초원이 황폐해지었습니다. 초목이 사라지자 가축들도 먹이를 구하지 못했고, 강물의 흐름까지 변하는 등 생태계 전체가 붕괴하였습니다.

큰 뜻을 보지 못하고 옳고 그름만 따지다가는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모두가 대의를 위해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포용력이 전혀 없는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의 싸움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때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대의를 가진 어른이 꼭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천년 된 산삼을 더덕인 줄 알고 우연히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프셔서 자신의 피를 마시게 했더니 어머니가 다시 건강해지고 몇 년은 더 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피가 아픈 사람도 낫고 몸도 젊어지게 하는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는 임금에게 드릴 피를 조금 받아서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이때 중간 관리가 “내가 당신의 피를 좀 마셔보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별생각 없이 “그러시지요”라고 하며 병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피를 조금 마셨습니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자 노발대발하며 “임금의 것을 탐한 저자를 당장 처형하여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하인이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이 옳으신 분이시다면 임금님께 바쳐야 할 것을 저에게 준 저 사람도 함께 처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그의 현명한 말에 그를 높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임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건강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것을 훔쳐먹은 신하도 품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당에도 그렇게 나라에도 그렇습니다. 웬만하면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영혼 구원이라는 뜻에 집중할 때만 그런 능력을 갖춘 포용력 있는 어른이 되어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스마트폰에 소변이 튀었습니다. 이때 여러분의 반응은 어떠하십니까?
 
1) 손으로 쓱 문질러 닦는다. 

2) 마를 때까지 가만히 둔다. 

3) 물티슈로 깨끗이 닦는다.
 
아마 기겁하면서 3번을 대부분 선택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방금 만들어진 소변에는 세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스마트폰 표면에서는 7,000여 종이 넘는 세균이 득실거립니다. 스마트폰이 화장실 변기보다 500배 더럽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장실 변기를 맨손으로 만지는 것은 주저하면서도 스마트폰 만지는 것은 전혀 망설이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2,000번 이상 맨손으로 만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믿으면 당연히 변기보다 스마트폰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또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 판단이 올바르고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판단이 먼 훗날 크게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을 모르면서도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시지요. 요한은 자기 판단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 누구보다도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함은 어디에서 나오든 그 궁극적인 원천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어서 그 울타리 밖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성령의 움직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자기 뜻 안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를 넘어서는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도 세상의 역사 안에서 영적 체험을 한 많은 성인 성녀의 말씀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참 진리 안에서 참 기쁨에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부당한 이득을 얻지 말라. 그것은 손해와 같은 것이다.

- 헤시오도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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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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