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비오니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
2025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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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봉헌 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말라 3,1-4)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제 2독서
(히브 2,14-18)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2,22-40)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오늘 말씀 카드
(말라 3,1)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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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말라 3,1-4
오늘 제1독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히브 2,14-18
오늘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시네.
루카 2,22-40
오늘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2월 1일
류지인 야고보 신부
✚ 주님 봉헌 축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41
✚ 강론시작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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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더 기도합시다.
오늘 교회는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아기를 주님께 바친 일을 기념합니다.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히브 2,17) 하였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백성의 다른 맏아들들처럼 부모의 손으로 성전에 바쳐지십니다. 아기 스스로 자신을 바친 것이 아니라 부모가 바칩니다. 실제로 그리스 말 원문은 ‘봉헌’과는 조금 다른 ‘나타내 보이다, 출현하다, 소개하다’(present)라는 뜻을 가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 복음을, 드디어 오신 구세주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두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처음 만나는 자리라고 하십니다. 일종의 상견례인 셈이지요. 제1독서에서 구세주께서 “자기 성전으로 오[시]리라.”(3,1)라고 한 말라키 예언자의 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곧 아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 처음으로 성전에서 아버지 앞에, 그리고 백성 앞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축성 생활’(vita consecrata)의 날을 꽤 오랫동안 ‘봉헌 생활’의 날로 불러왔기에 축성 생활자들이 주님께서 성전에 바쳐지신 것과 같은 의미로 봉헌된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5년 전 이를 ‘축성 생활’로 번역하여 쓰기로 한 주교회의의 결정은 이런 혼란을 바로잡고 축성 생활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축성’은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봉헌’과는 쓰인 낱말과 그 뜻이 다릅니다. ‘축성 생활’은 “서원을 통하여 …… 세 가지 복음적 권고의 의무를 받아들이는” 삶, 곧 “복음적 권고의 서원으로 이루어지는 신분”(교회 헌장, 44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수도자를 포함하여 복음 권고를 서약하는 모든 이가 축성 생활자입니다. 올해 ‘한국 교회 축성 생활의 해’를 지내면서 축성 생활 성소를 위하여 더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봉헌은?
주님 봉헌에는 삼중의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 성부께서 주님을 세상에 봉헌하신 것. 우리를 위해 마리아와 요셉이 주님을 성부께 봉헌한 것.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봉헌하신 것.
그렇습니다. 오늘의 전례는 주님 성탄 40일 되는 날에 주님의 부모가 율법 규정에 따라 주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지만 이 봉헌을 앞서는 봉헌이 성부께서 주님을 세상에 봉헌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는 성탄이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 봉헌은 또한 ‘위로부터 아래로’의 겸손의 봉헌이고, 신성을 포기하고 인성을 취하는 가난의 봉헌이기도 합니다. 필리비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이 의미를 잘 전해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런 성부의 주님 봉헌을 보면서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프란치스코처럼 주님의 겸손과 가난에 무한 감동하고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것이고, 클라라처럼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며 겸손과 가난으로 치장하는 겁니다.
성부의 주님 봉헌은 이제 주님의 십자가 위 봉헌으로 완성됩니다. 완성되었다는 것은 불완전했던 것이 완전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강생과 육화로 시작된 주님의 봉헌과 사랑이 끝을 냈다는 뜻이며,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요한복음이 한 말과 같은 뜻입니다.
사실 강생과 육화의 봉헌에 주님의 십자가 위 봉헌은 이미 들어 있었는데 주님께서 강생에서 시작된 사랑을 중단하지 않고 죽기까지 이루신 겁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 위 자기 봉헌을 보면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봉헌하는 겁니다. 마리아처럼 봉헌하는 것이고, 프란치스코처럼 주님의 수난을 닮는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가 주님을 성전에서 봉헌하는데 이 봉헌은 단순히 자기 아들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음을 넘어 아들의 어머니로서 아들의 십자가상 고통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봉헌 때 시므온이 예언한 바이고 마리아가 들은 겁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에 동참(Compassion)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참은 마리아뿐 아니라 성인이라면 예외가 없으며, 프란치스코는 이런 성인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는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이 수난을 똑같이 경험하고 싶어 기도를 바쳤고 그 결과가 오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선 기도부터 바칠 것입니다.
기도에서 힘을 얻었다면 고통도 바칠 것입니다. 물론 사랑으로 기도와 고통을 봉헌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족하나마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봉헌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봉헌생활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바로 이날, 죽기를 결의하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노인과 밤낮으로 단식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과부가 구세주를 뵈었습니다.
바로 이날을 기념하여, 원래는 성모 취결례축일로 지내오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에 “주님봉헌축일”로 개정하여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날을 1997년(1월 6일)에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축성생활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 교회 축성생활의 해’를 지내고 있는 축성생활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남장협 부설기관인 ‘축성생활 신학회’는 2015년 “봉헌 생활의 해”를 지낸 후 10년이 되는 시점에서 다시금 축성생활의 의미를 상기하고, 수도생활의 쇄신과 수도자의 정체성 확립과 수도 성소 확산을 위해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를 지낼 것을 건의했고, 이를 남장협과 여장연은 주교회의에 공식 요청했으며, 주교회의는 작년(2024년) 3월 춘계 정기총회에서 「교회헌장」 ‘인류의 빛’ 반포 60주년인 올해 11월 21일부터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완전한 사랑’ 반포 60주년인 2025년 10월 28일까지 1년여 간 ‘한국 교회 축성생활의 해’를 지내도록 승인했습니다.
“봉헌생활”이란 <교회법> 573조 제1항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
이는 여섯 가지 의미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라는 표현은, 곧 봉헌생활이 성령의 감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 <봉헌생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봉헌생활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주신 은혜이다.”(제1항)
<둘째>,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곧 봉헌생활은 복음적 권고인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위의 문헌 <봉헌생활>에서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삶”(제22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의 집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건설을,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 구원의 삶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셋째>,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라는 표현은, 곧 봉헌생활은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전력을 쏟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6세 반포한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인 <완전한 사랑>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복음적 권고의 실천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이신 스승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 기원을 이끌어 온다.”(제1항)
결국, 봉헌생활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내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의 완성을 이루었듯이, 봉헌의 삶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사랑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넷째>,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라는 표현으로, 봉헌생활의 축성은 세례에 의한 축성에 깊이 근거하며, 이 축성을 더 완전히 표현하는 특별한 축성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인 <복음의 증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특수한 축성으로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세례의 축성으로 이루어진 근본적 봉헌을 더욱 완전히 실현시키고 있다.”(제4항)
<다섯째>,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라는 표현으로, 봉헌생활은 인간의 궁극적인 생활을 예표 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제44항)과 <봉헌생활>(제26항)에서는 봉헌은 “미래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더 잘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헌생활은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고, 천상적 영광을 예고해줍니다.
<여섯째>,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모든 것보다 우선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일시적 충동에 따라 사는 임시적인 삶이 아니라, 공적인 선서로 평생토록 지속되는 고정된 생활 형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봉헌생활>에서는 “가없는 헌신”(104항)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봉헌축일”과 “축성생활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이 친정한 참 제물로 바쳐지는 삶이 되고, 주님의 축성을 충만하게 채워내는 삶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아멘.
.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37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구원에 이르는 봉헌은 오직 하나뿐: 용서를 위한 봉헌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아프지 않으면 봉헌이 아닙니다. 예언자 시메온은 성모님께서 장차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프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구약에서의 봉헌과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봉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 봉헌의 목적은 첫째, ‘저는 당신 것이고 제가 가진 것도 당신 것입니다.’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바쳤던 제물이 번제와 곡식 제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친교를 위해 바치는 화목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오고 가는 것이 없다면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세 번째는 ‘속죄’입니다. 빚을 진 상태로는 친교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탕감해주더라도 그분을 바보로 만들지 않으려면 자신도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속죄제나 보상제가 이것입니다.
만약 이런 봉헌으로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신약의 봉헌은 반드시 ‘용서’가 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타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봉헌하시며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문신을 한 신부님’(2019)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다니엘이라는 청년입니다. 그는 소년원 겸 교정시설에서 생활하던 중, 우연히 본당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돕게 되면서 ‘사제의 길’을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살인 및 폭력 전과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없다.”라는 답을 들었고, 결국 다른 직업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출소 후 노동 현장으로 파견되던 중, 다니엘은 시골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고, 우연히 그곳 본당 신부님을 만나야 할 상황이 생깁니다.
다니엘은 내면에 깊은 갈망과 불안, 그리고 죄책감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누군가가 “본당 신부님 맞나요?” 하고 묻자, 그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예, 제가 신부입니다.”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그리고 빈 사제관에 머무르게 되면서, 그 마을의 임시 ‘신부’ 역할을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의외로 진솔한 그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입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에는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끔찍한 교통사고가 발생해 여러 주민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운전자’ 역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사고 당시 운전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운전자를 철저히 미워했습니다. 마을 곳곳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표시가 있지만, 정작 그 ‘가해자’였던 운전자는 묘지에조차 들어오지 못한 채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다니엘은 처음에는 이 사건에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용서받지 못함의 고통”을 잘 아는 그였기에, 점점 그 가족과 죽은 운전자를 묻지 못한 채 애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신경 쓰였습니다. 다니엘은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이 운전자를 위한 장례를 제대로 치러 주자.”
모든 마을 사람이 반대하고, 심지어 다른 사제나 경찰관도 “장난질이 너무 심하다.”라며 그를 몰아세우지만, 다니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장례식 당일, 분노로 가득 찬 마을 주민들은 장례식장에 몰려와 고성을 지릅니다. 이즈음에 그의 신분도 조금씩 들통이 나기 시작합니다. “가짜 신부가 무슨 장례를 치른단 말이야!” “이딴 식으로 저 인간까지 구원받게 해 줄 순 없어!” 다니엘은 위축되면서도, 용기를 내어 운전자의 관이 놓인 곳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들어 모두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 저 역시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게 된 건,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회를 주셨고, 저도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고 싶다는 겁니다. 이 사람에 대한 증오가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죽은 이에 대한 복수나 증오는 우리 모두를 갉아먹을 뿐입니다.”
다니엘은 장례식을 시작하며 조용히 기도문을 읊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묵주기도(또는 해당 지역 미사 의전)를 이어 갑니다. 이 순간, 관 앞에서 울부짖는 운전자의 가족을 보고 몇몇 주민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사제가 아닌 저 사람(다니엘)이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까지 마음 돌리게 하나…” 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미 그의 진심을 느꼈던 사람들은 묵묵히 참여하기 시작하지요. 장례식을 마치고 다니엘은 신자들 앞에서 사제복을 벗고 문신이 새겨진 몸을 드러낸 채 그들을 조용히 떠나갑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그가 먼저 사제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하지 않은 우리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곧 에덴동산에서의 가죽옷을 선물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죽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 그분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제복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위한 봉헌을 의미합니다. 그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 합당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용서하고 덮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봉헌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봉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기 자신을 대신 감옥에 갇히도록 내어놓겠다고 말한 장면(창세기 44,33 참조)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모습을 예표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했지만, 되레 그들을 살리기 위해 양식을 베풀었고(창세기 50,19-21 참조),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벌주시는 대신 가죽옷을 입혀 주십니다(창세기 3,21 참조). 누군가의 죄를 덮어 주기 위해 다른 생명이 희생된 것은 최초의 봉헌을 상징합니다. 신약에서는 의로운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깨닫고도, 세상의 조롱 속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려고 몰래 파혼하려 했습니다(마태오 1,19 참조).
구약의 유다와 요셉이 살아 낸 봉헌과 희생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완성해 주신 속죄와 사랑으로 이어지며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의 봉헌은 더 이상 의무적 제사가 아니라 서로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봉헌’이 됩니다. 이 봉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롭고 영원한 봉헌입니다. 나는 이웃의 죄를 덮어주는 봉헌을 하며 미사에 참례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참다운 신약의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틀은 어떤 것일까요?
2000년 초반,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광고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은 성공에 집착했습니다.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세속적인 성공은 아니더라도 나의 변화가 필요함을 깨달았고, 특별히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엄격하게 시간 관리를 했습니다
엄격한 시간 관리 안에서 커다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생활이 경직되는 것입니다. 틀에 갇혀 인생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마음의 여유와 즐거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큰 틀을 짜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방학 중 하루 일과표를 만들어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하루를 산 적이 있습니까? 분명히 또 당연히 그렇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실제로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큰 틀을 짜고 저만의 루틴을 만들어 가며 삽니다. 굳이 몇 시간 책을 읽고, 1시간 운동하고, 기도 시간 2시간…. 이런 식으로 배분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세상은 틀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 주님의 뜻을 잃어버리면 목표 없이 살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간직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봉헌을 바라보면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은 아기, 파혼해야 마땅할 것 같지만 꿈에서 들은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일, 예수님의 탄생 후 동방박사의 방문,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한 일 등…. 믿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큰 틀에서 일치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 예언자와 한나 예언자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들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큰 틀에서 벗어나, 세상의 틀에서만 바라봤다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볼 수도 그래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틀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틀에만 매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의 사랑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철저히 하느님의 뜻이라는 틀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결실은 없다
- 발타자르 그라시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하느님께 올리고 바치는 것이 봉헌입니다. 좋은 시작과 좋은 열매에는 언제나 봉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기쁨을 봉헌으로 우리와 함께 나누십니다.
정성스럽게 사는 것이 우리의 봉헌입니다. 믿음은 봉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꾸밈이 없는 봉헌이 중요합니다. 솔직한 고백도 하느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봉헌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정성을 다해 마음을 나누는 삶을 사셨습니다. 신앙의 탄생은 봉헌의 탄생입니다. 봉헌은 또한 우리의 신앙을 키웁니다.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봉헌 아닌 것이 없습니다. 봉헌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으뜸되는 마음이 봉헌의 마음입니다.
봉헌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도와주고 서로를 이롭게 하며 선한 일을 하는 것이며 행복으로 가는 가장 아름다운 실천이며 신앙의 올바른 방향이 봉헌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봉헌이 있습니다. 주님 봉헌을 따라 우리의 삶도 하느님과 기쁘게 나누는 봉헌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봉헌이 가리키는 은총의 선물을 뜨겁게 만나는 봉헌 축일 되십시오 삶의 본질은 우리자신의 봉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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