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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2/03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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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2025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2월 3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2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히브 11,32-40)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 오늘 말씀 카드
    (시편 31,25)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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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히브 11,32-40
오늘 제1독서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타, 다윗과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하여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으며, 약속된 것을 얻었고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며, 

34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벗어났으며, 약하였지만 강해졌고 전쟁 때에 용맹한 전사가 되었으며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35 
어떤 여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식구들을 다시 맞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석방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문을 받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38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39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마르 5,1-20
오늘 복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2월 3일
강규원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 교황님 2월 기도지향 00:24

✚ 미사시작 00:43

✚ 강론시작 08:59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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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인간에게 육신을 마련해 주시고 그 안에 머무르시는 분은 바로 주님

오늘 복음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인간의 비참함과, 그에게서 풀려나 제정신으로 돌아온 인간 사이의 차이를 극적 과정으로 매우 뚜렷하게 보여 줍니다. 그 과정에 예수님께서 지니신 절대적 권능이 마귀에게 작용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신앙 고백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5,7)라며 그분의 권능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던 더러운 영들은 결국 자기들이 살길을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군대라는 이름의 더러운 영들에 사로잡힌 사람을 살리시려고 그 청을 들어주십니다.

사실 악령은 인간에 대한 권한이 없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대로 주님께서는 ‘전적으로 당신 소유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을 제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시어 그를 해방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소유인 인간의 해방을 위하여 돼지 이천 마리를 잃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머물러 계셔야 하는 사람 안에 더러운 영이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고 그 영을 내보내십니다. 사실 사람 안에 악령이, 예수님께 어울리지 않는 어떤 것이 머무른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모독입니다.

인간에게 육신을 마련해 주시고 그 안에 머무르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 몸은 그분의 몫이니 다른 어떤 영도 우리 몸을 소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군대라는 이름의 더러운 영이든 돈과 허영과 탐욕이라는 세속의 영이든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 재산을 잃고 떠돌이가 되어도?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오늘 복음은 군대라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주님의 도움으로 멀쩡하게 되는 얘기로 더러운 영이란 어떤 존재인지 여러 번 제가 다룬 바가 있는 얘기입니다.

곧 더러운 영이란 비록 더러울지라도 영적 존재이기에 당시 아무도 모르는 주님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는 것, 그러나 주님이 자기를 쫓아내려고 오시는 것을 알기에 주님이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영이라는 것, 더러운 돼지들 속에서라도 자기 영역을 떠나지 않으려 정말 더럽게도 집착하는 영이라는 것 등등을 봤습니다.

그래서 오늘 더러운 영에 관한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이후 벌어진 일들과 사람들에 대해서 나눠볼까 합니다.

오늘 독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칭송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고”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었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광야와 산과 들을 돌아다녔는데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마을 사람들과 대조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들만 주님을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 후 마을 사람들도 주님을 거부하고 떠나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자기들 전 재산인 수천의 돼지를 주님 때문에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천의 돼지를 죽게 만든 주님의 처사는 이들의 입장에 보면 잘못돼도 너무도 잘못된 것이었지요. 그러니 이렇게 만든 주님을 때려죽이지 않고 순순히 떠나달라고만 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그들도 더러운 영처럼 주님을 거부했는데 그런데 같은 경우를 우리가 당하면 나는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전 재산을 잃어도 주님을 영접할까요? 주님을 모시기 위해 전 재산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히브리서의 예언자들처럼 떠돌이가 될까요?

사실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보면 비록 자기가 원치 않았지만 전 재산을 잃고 난 뒤에야 영접했고 우리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저세상을 가질 수 없고, 전 재산을 잃지 않고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또 봐야 할 사람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던 사람입니다. 마을 사람들과 달리 그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러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는 잃을 게 더 없을 정도로 이미 다 잃었고 그래서 오히려 구원을 체험하였으니 말입니다. 사실 모든 구원은 비 구원의 상태에서 구원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사람을 보며 나를 봐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비 구원 상태에 아직도 있음을 알고 구원을 찾는 사람인가? 여전히 모르는 채 구원을 찾지도 주님을 따라나서지도 않는 사람인가? 전 재산을 다 잃고 떠돌이가 되어도 주님을 따라나설 사람인가? 아닌가?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인데,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시고 호수를 건너오셨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셨듯이, 이제는 또 다시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다.”(마르 5,2)

그리고 이제 그에게서 영들의 군대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 정신으로 앉아”(마르 5,15) 있었습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렸던 왜곡된 인간성을 버리고, ‘제 정신이 든’ 것입니다.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는 것,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되었다.’(에페 4,21-24)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둠은 빛을 반기기보다 오히려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이렇게 그는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곧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알리는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푸신 일”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일’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를 증거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5,17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령을 받아들이는 법 : 시험에 들어보라!

찬미 예수님. 오늘은 마르코복음 5장에 나오는 게라사 지방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시자, 수천 마리에 달하는 돼지 떼가 호수에 빠져 몰살당했는데, 그 광경을 본 주민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자기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왜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예수님을 배척해야만 했을까요? 바로 손에 잡히는 재산(돼지 떼)을 잃는다는 두려움이, 구원과 은총을 놓고 저울질했을 때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자주 반복됩니다. 세속·육신·마귀가 제공하는 그럴싸한 유혹이 너무 익숙하고 실체감 있어 보이기에, 영원한 가치를 제시하는 성령을 뒤로 미루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가, 욕망에 빠져 이를 스스로 내려놓고 만 인물들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먼저 사울을 살펴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서 기름부음을 받고 출발했지만(1사무 10장 참조), 점차 자신의 권력에 도취 되어 교만해집니다.

1사무 13장과 15장에 보면, 그가 사제로서의 권한도 아닌데 마음대로 제사를 집전하고, 주님의 명령을 어겨 전리품을 챙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내가 왕이니 이 정도쯤이야” 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무엘이 “주님께서 당신을 버리셨습니다.”(1사무 15,26)라고 선언할 정도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사명을 사울이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사울의 교만한 행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과도 닮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유럽을 호령하며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점차 자신의 절대 권력에 빠져 무리한 원정(특히 러시아 침공)을 감행함으로써 결국은 파멸로 치달았습니다.

겸손히 한계를 인정하기보다 자신을 절대화하면, 하느님이 부어 주시는 은총의 그릇이 거꾸로 뒤집혀 버리는 것이지요. 그는 교회에 의해 씌워지던 황제의 왕관을 자신이 직접 쓴 최초의 황제가 됨으로써 교회에서 오는 은총을 스스로 단절해 버렸습니다.

다음으로 다윗을 떠올려 봅시다. “당신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1사무 13,14 참조)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하느님께 사랑받던 임금이었지만, 2사무 11장에서 밧세바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간음죄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야까지 제거해 버렸습니다.

한순간의 육체적 욕망이, 하느님께 받은 뛰어난 은총과 왕으로서의 위엄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가지만, 가정사에서부터 정치적 분열까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도 흡사합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결혼 문제(육체적 욕망과 후계 문제 등)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교황청과 불화를 일으키고, 결국 영국 국교회를 분리시키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만든 인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열쇠는 교황에게 있지만, 성공회를 교황과 단절되게 함으로써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교황한테서 오는 성령의 은총을 단절시켰습니다.

솔로몬 역시 지혜의 왕으로 불릴 만큼 은총을 받았으나, 재물과 쾌락에 집착하다가 영적 중심을 잃어버립니다(1열왕 11장).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치와 이방 아내들이 늘어가면서,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 신까지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이것이 훗날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몰락은 영화 「월 스트리트(Wall Street)」에서 잘 드러납니다. 1980년대 뉴욕 증권가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젊은 주식중개인 버드 폭스(Bud Fox)는 부와 성공을 좇다가, ‘탐욕은 선(Greed is good)’을 외치는 대부 격인 고든 게코(Gordon Gekko)의 꾐에 빠져 불법과 비리를 저지릅니다.

처음에는 급격히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모든 진실이 폭로되면서 재산과 명예를 잃고, 스스로도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돈이 곧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착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얼마나 영혼의 평화와 정직을 포기하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교만, 육체적 욕망, 재물에 대한 집착이 크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은총보다 눈앞의 돼지 떼가 훨씬 더 커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체험해 보니, 이 벽은 ‘한 번도 내려놓아 보지 않았을 때’ 더욱 견고하게 느껴질 뿐, 막상 용기를 내어 내려놓으면 정말 큰 자유와 기쁨이 찾아옴을 알게 됩니다.

저 자신도 세속을 이기기 위해 처음 십일조를 결심할 때 “이러다 생활이 힘들어지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처럼 “나를 시험해 보아라.”(말라 3,10)를 실제로 해 보니, 오히려 돈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또 사제로서 여자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지만, 그 길 위에서 오히려 더 폭넓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음을 체감했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하거나 사랑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오히려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술 역시 “피부병 때문에 안 마셔야 한다.”라고 결심하고 한 달을 안 마시고 살아 보니, 몸도 좋아졌을 뿐 아니라 “왜 그동안 술의 즐거움에 애써 의존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가뿐해졌습니다. 결국에는 ‘해 보기 전에는 두렵고, 한번 내려놓아 보면 예상치 못한 은총이 열린다.’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게라사인들이 돼지 떼를 지키려 예수님을 내쫓은 사건은, 결국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시험해 보아라.”(말라 3,10)라고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며칠만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다면 분명 더 성령의 열매, 곧 기쁨과 평화가 샘솟아 행복해짐을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서두르고 시험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분명 세.육.마.를 이기는 만큼 내 안에 들어와 나에게 은총의 성물을 주십니다. 그런데 세.육.마.를 이기는 방법은 한 번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행복해지는지 느껴보는 것입니다. 해 보고 안 되면 돌아오면 됩니다. 그러나 해보지도 않고 물리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십일조부터 1년 동안 시험해 봅시다. 돈도 넉넉해지고 성령도 자신 안에 넉넉해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성공의 과정에는 모멘텀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외부의 방해를 차단하고 내면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목표를 향한 동기는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굳게 마음을 먹고 행하지만, 외부의 방해 때문에 쉽게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을 빼고 싶다면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2주 동안은 몸무게를 재지 말라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명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망감을 안겨주고 자포자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해도 나는 아무런 변화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힘이 빠집니다. 그러나 2주가 지나고 몸무게가 줄어드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순간부터는 자신감이 붙습니다. ‘확실히 효과가 있구나. 할 수 있어.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라는 생각이 들고 이때 누군가가 “혹시 살 빠졌어?”라고 묻기라도 하면 성공으로 향하는 모멘텀은 더 커지게 됩니다.
 
모든 것은 믿음에 따라 모멘텀이 커지고 성공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로 그렇습니다. 외부의 방해로 우리는 그 관계를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모멘텀을 키우기 위해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갔습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마주하게 되지요. 사람들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말씀 한마디로 마귀 들린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군대라는 마귀들은 이천 마리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갔고,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지요. 돈벌이가 되는 돼지 떼들의 죽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지요. 그리고 다음에도 그런 일이 생겨 손해를 볼지 두려워서 예수님께 자기네 고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외부의 방해가 작동했습니다. 바로 재산의 손해였습니다. 그리고 이 방해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을 포기하고 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없애는 외부의 방해를 따를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결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부의 방해에 대해 “당장 내게서 나가라.”라고 명령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속도를 줄이고 인생을 즐겨라. 너무 빨리 가다 보면 놓치는 것은 주위 경관뿐이 아니다. 어디로 왜 가는지 모르게 된다.

- 에디 캔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빛을 사랑하십니다. 더러운 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만나면 어느새 더러운 영은 사라집니다. 더러운 영들의 존재방식은 복음의 존재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격으로 존재합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짐승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끝내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의 쇠사슬이 되고 족쇄가 되었습니다.

빛을 만나면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닙니다. 빛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마귀추방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군대라는 마귀의 끝은 호수에 빠져 죽고 마는 파멸입니다. 그냥 세속적인 이름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격과 이름으로 오늘을 기쁘게 살아갑시다.

어둠의 종결은 빛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더러운 영에게 사라질 것을 명령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세상이 다시 더 밝아지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스스로 빛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5, 8)

더러운 영은 우리의 삶에서 나가고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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