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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2/01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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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2025년 2월 1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2월 1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2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히브 11,1-2.8-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4,35-41)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오늘 말씀 카드
    (마르 4,39)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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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히브 11,1-2.8-19
오늘 제1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마르 4,35-41
오늘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2월 1일
박찬홍 가브리엘 신부

 

✚ 교황님 2월 기도지향 00:24

✚ 미사시작 00:42

✚ 강론시작 09:26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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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믿음의 본질

오늘 독서와 복음은 믿음에 대하여 말합니다. 때때로 믿음은 우리에게 오감과 경험으로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게 합니다.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히브 11,8) 아브라함과, 아이를 가질 수 없고 나이까지 많음에도 믿음으로 아들을 낳은 사라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마르 4,35)으로 건너가자고 초대하십니다.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하루를 보내신 뒤 피곤하시어 돌풍으로 요동치는 배 안에서까지 곤히 주무시면서도 왜 예수님께서는 그냥 머무르시던 자리에서 쉬시지 않고 늦은 시간에 굳이 ‘호수 저쪽’으로 가자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호수 저쪽’으로 부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삶, 공동체의 쇄신, 새로운 임무를 향하여 익숙하고 안정된 현실을 떠나 돌풍이 몰아치는 밤에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라며 부르시는 경우입니다. 그때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주님 말씀에 대한 신뢰, 특히 그분께서 그 위험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 하나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호수 저쪽으로 떠난 이유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히브 11,10)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인간적인 것을 무시하는 데 있지 않고, 영원한 궁극적 가치를 향하는 데 있습니다. 구약의 성조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11,16)하였다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밝혀 주는 대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과연 그 믿음대로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11,16).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잠자고 계신 것이 아니라 잠자코 계신

오늘 독서와 복음은 떠남이 공통입니다. 독서는 아브라함의 떠남이고 복음은 제자들의 떠남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떠남은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른 혼자 떠남이고, 제자들의 떠남은 같이 떠나자는 주님의 권유에 따른 같이 떠남입니다.

어쨌거나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나 제자들의 주님은 왜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까? 왜 굳이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까? 왜 조용히 살게 또 편하게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겁니까?

며느리 편한 꼴을 못 보는 고약한 시어머니처럼 인간의 편한 꼴을 못 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까?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분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그것 곧 떠나는 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인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다 보면 이사 가야 할 때도 있고, 아예 이 세상을 떠나 저세상에 가야 할 때도 있지요. 오늘 히브리서는 본향을 얘기합니다.

본향이라면 어디입니까? 고향일까요? 고향이 이 세상에서 돌아갈 곳으로서의 고향이라면 본향은 고향이 아니고 저 하늘 본향을 말함이고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향이 다시 돌아갈 고향이라면 왜 떠나고, 하느님께서는 왜 떠나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떠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고, 우리 정체성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고 천국의 나그네입니다.

며칠 전 티브이에서 명사와의 대담을 봤는데 얘기 중에 자기는 신의 존재나 초월을 믿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얘기하였습니다.

부모 없는 자식들이 찾아가야 할 곳이 없고 고향이 없듯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갈 곳이 없고 본향도 없으며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도 천국의 순례자도 아니겠지요.

그러므로 오늘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호수를 건너다가 풍파를 만난 얘기도 이 세상을 떠나 저세상으로 가는 우리의 인생 여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달리 제자들의 주님은 여정에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그런데도 도중에 풍랑을 만나고,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잠만 자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면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면 사는 동안 아무 풍랑이 없을 것을 기대하며 주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얘기는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풍랑을 만나 고생고생하는데도 잠만 자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도 이런 주님을 곧잘 만납니다. 내가 엄청난 곤경에 처했는데도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지 않거나 잠만 자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잠자고 계신 게 아니라 잠자코 계셨던 겁니다. 왜? 더 큰 갈망으로 주님을 찾도록. 천국의 순례는 꼭 주님과 함께 그리고 주님을 따라서 가도록.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비유들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저녁이 되어 어둠이 닥쳐오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위험에 수수방관으로 그냥 침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이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응답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의탁하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임을 말입니다.

시편작가처럼, 주님께서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이심을 믿고 의탁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동행하심’에 대한 믿음과 의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을 깨우쳐주시고,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하시며 광풍을 잠재웁니다.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으로 깨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의 “아버지의 침묵”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였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예수님께서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간직할 수 있었던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시며 제자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시편>작가처럼 ‘함께 계시는 주님’께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4,40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핏줄과 나라까지 배신해야 한다면, 그래도 믿을 것인가?

오늘은 2월 성모 신심 미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뜻에 인간의 뜻이 경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핏줄을 넘어 나라로 확대된다면 어떨까요? 자기 핏줄을 거부한 경우는 매우 많습니다. 광암 이벽 성조는 정약용이 존경하던 친구로서 뛰어난 학식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벽 성조는 가문의 반대로 아버지로부터 감금당했고 독살당했다고까지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큰 박해가 시작되었고 이에 가담한 정약용도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약용이 두 번째 유배를 가게 된 사유 또한 천주교 때문입니다. 바로 조카 사위인 황사영 때문이었습니다. 황사영은 정말 믿음 때문에 가문은 물론 나라까지도 배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황사영 백서는 조선에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중국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 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적은 밀서입니다. 황사영은 토굴속에 숨어지내며 정세를 파악하던 중 교회의 머리인 주문모, 정약종,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 최필공, 이존창, 유황검 형제 등 다수가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접합니다. 이에 이런 탄압의 전말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부각해 청나라 조정의 도움을 끌어낸다면 박해를 종식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엔 청나라 종녀 1인을 공주로 삼아 조선 왕과 결혼케 함으로써 국왕을 부마로 만들면 다음 왕은 청국 황제의 외손이 되므로 자연히 청국에 충성을 바치게 될 것으로 생각을 밝혔습니다. 또는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할 것, 심지어 조선은 2백 년 이래 평화가 계속되어 백성은 전쟁을 모르니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6만 명으로 대포, 군물들을 싣고 와서 선교의 승인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과 서양 전교대를 조직하여 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게 할 것 등입니다.

백서가 중국에 전달되지 못한 채 1801년 9월 15일에 제천 배론에서 체포되었고 9월 26일에 황사영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국청이 열리고 혹독한 심문을 받은 황사영은 11월 5일에 대역죄로 서소문 밖에서 온몸이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그의 일가족은 물론 종들까지도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또한 황사영이 극형을 당한 다음 날 그의 집을 헐어 버리고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게 했습니다.

황사영이 정약용 형제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 사태는 심각했습니다. 노론 벽파의 홍낙안 등은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못한 것과 같다.”라며 이번 기회에 정약용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관련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노론 벽파 내 의견이 갈리면서 극형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은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시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정약용이라 생각해봅시다. 기중기를 최초로 이용해 수원성을 만들고 수백 권의 책을 쓸 정도로 국가의 인재였습니다. 그는 분명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문과 국가를 생각하기로 하고 배교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믿음이 없다고 화살을 돌릴 수 있을까요?

나이팅게일은 간호학이라는 새로운 간호의 비전을 제시한 인물입니다. 그녀 덕분으로 간호 학교들이 최초로 생겼습니다. 부상한 군인의 40%가 사망했지만, 그녀가 간호 시스템을 정비하자 4%로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그녀는 아군만 살린 게 아니라 다친 적군도 살려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행위는 전쟁에서 역적이 될 수도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생명’ 앞에서 핏줄이나 나라, 이념 따위는 의미를 잃습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원수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면 바라만 봐야 할까요? 아버지에게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구하는 게 도리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어떤 가치도 그 믿음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경쟁자로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시며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을 합리화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보면 역적이자 매국노라 불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굳이 어떤 나라에 지배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오네시모라는 도망친 노예를 돌려보내며 주인에게 충실해지라고 권고합니다. 링컨은 노예제도를 폐지해서 존경받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만 유익하다면 체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종교가 현세화 되어갑니다. 종교가 가문이나 나라의 뜻에 배치되면 조선시대 때처럼 사교로 박해당합니다. 마치 이 세상이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살 세상은 천국이지 이 지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언제라도 이 지상의 핏줄이나 애정, 혹은 나라가 믿음의 발목을 잡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문의 원수나 매국노라도 불려도 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핏줄이나 나라를 사랑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참믿음을 잃은 나라는 현세에서부터 지옥이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2019년, 호주 전역에 대형 산불이 났습니다. 산불이 나자마자 어떤 사람이 100만 호주달러(약 8억 5천만 원)를 구호 기금으로 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로 사람들은 이 기부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칭찬을 받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차 없이 엄청난 뭇매를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부자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가 바로 아마존 CEO로 최고 부자인 제프 베조스이었거든요. 그가 기부한 돈은 그가 5분마다 버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일반 사람에게는 분명 적지 않은 돈이지만, 그가 버는 돈에 비할 때 너무나 성의 없는 기부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제프 베조스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면서 봉헌하는 모습, 자기 어려움이 더 크다면서 누릴 것 다 누리고 나서 봉헌하겠다는 모습, 세상을 도울 힘이 있음에도 상관없다는 듯 외면하는 모습 등등…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님께 많은 것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 삶 안에서 계속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기보다는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도 못하고, 주님의 계명인 사랑 실천에 늘 소극적인 것입니다. 혹시 사랑을 입으로만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건너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의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을 깨우면서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기적을 떠올렸다면 그래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불안에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겁을 내고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이 상황에서 제자들의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께 무엇이든 다 해 달라는 식입니다. 제자 중에는 어부 출신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탓만 하는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에 우리의 노력을 더 해서 주님의 일을 이 세상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어렵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감히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 세네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믿음으로 사는 법을 다시 배우는 시간입니다. 호수와 바람이 있기에 배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돌풍 속에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시련이 전하는 말들을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 마음을 되돌아봅니다. 

수시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십니다. 잠잠하고 조용해야 할 우리들 마음입니다. 받아들여야 할 우리의 현실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삶의 시련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예기치 않은 돌풍은 우리 믿음의 시험대입니다. 돌풍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믿음은 결코 돌풍에 부러지지 않습니다. 

떠다니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깊어지는 곳에는 사나운 돌풍이 있었습니다. 돌풍이라는 현실 안으로 들어가 주님께서 주시는 고요와 평화를 체험하는 선물의 시간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선물의 시간입니다. 믿음이 만들어가는 우리의 새로운 역사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이끄시며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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