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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1/15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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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5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월 15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1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히브 2,14-18)
    자비로우신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1,29-39)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오늘 말씀 카드
    (시편 105,4)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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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히브 2,14-18
오늘 제1독서

 

자비로우신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마르 1,29-39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15일
유성현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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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그 누가 예수님의 사랑의 발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어제와 오늘 복음(마르 1,21-39)을 신학자들은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고 부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구마와 치유 활동, 기도 등을 마치 그분의 하루 일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구마와 오늘 복음의 다양한 치유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느님이시요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시몬의 장모의 열병 치유, 온갖 질병과 마귀 때문에 앓고 있는 많은 이의 치유, 그리고 예수님의 새벽 기도입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부분에 마음이 더 많이 머무릅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마르 1,32) 곧 안식일이 지나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예수님 앞은 사람들이 데려다 놓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이는 유다교의 독특한 날짜 계산법에 따른 것입니다. 빛보다 어둠이, 낮보다 밤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밤, 낮 하루가 지났다.”(『공동 번역 성서』, 창세 1,5.8.13.19.23.31)라는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후렴구 그대로입니다. 

더 일찍 오고 싶었지만 안식일 계명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온 고을’에서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1,34)과 마귀 들린 ‘많은’ 이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도 많은 이가 주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비 구원의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회복됩니다. 예수님의 구마와 치유는 하나의 표징입니다. 이는 무엇보다 하느님께 받은 예수님의 놀라운 권위와 권능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기 시작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1,38). 

그 누가 예수님의 이 사랑의 발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죄의 패배주의와 대리만족을 경계하며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서간은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신 표시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혹받으셨음을 얘기합니다. 그러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유혹의 존재라고 할 수 있고, 유혹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도 유혹당하셨으니 유혹을 그 자체로 죄나 악이라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유혹받고 예수님도 유혹받으셨습니다. 잘 알다시피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장엄하게 선포되셨지만 또한 사람의 아들이셨기에 이내 광야로 나가 유혹받으셨습니다. 

그러나 4장에서 얘기하듯 죄를 짓지는 않으셨지요.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2장을 보고 있는데 4장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유혹을 받으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되고 배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미성숙할수록 유혹받으면 죄를 짓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죄와 유혹의 관계를 잘 알고 또 성숙하게 되면 패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유혹은 죄에로의 유혹이고, 선행하자는 것을 유혹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또한 욕구와 욕망과 욕심과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결핍이 없고 욕구도 없으면 유혹받지 않습니다. 

이미 배부르면 아무리 먹자고 해도 그것이 유혹이 되지 못하지요. 배고픈 사람만 식욕이 있고 식욕이 있는 사람만 유혹을 당합니다. 

그렇지만 욕구가 곧 욕망이나 욕심이 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다른 욕구 또는 거룩한 욕구로 그 욕구를 바꿀 열망이 없어서 그 욕구에 머물거나 주저앉은 사람만이 욕구가 욕망과 욕심으로 발전하는 겁니다. 

사실 주님처럼 빵의 욕구를 말씀의 욕구로 바꾸면 욕구가 욕망과 욕심이 되지 않고 열망과 거룩한 원의가 됩니다. 인간은 허할 때 그것을 채우려는 존재 곧 만족하려는 존재이고 존재의 허함을 무엇으로든 채우고 무엇으로든 만족하면 됩니다. 

그러기에 주님처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채우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빵으로 대리만족하려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모든 세상 만족은 천상 만족의 대리만족이고, 천상 것들로 이미 만족한 사람들은 지상 것들로 대리만족하려 하지 않으며 그래서 지상 것들이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욕구에 주저앉아 안주하지 않고, 그 욕구를 거룩한 열망과 원의로 바꾸려는 그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정신(Spirit)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유혹 천지이고 유혹자들이 노리는 광야이지만 주님처럼 성령(Holy Spirit)으로 충만하고 인도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죄의 패배주의를 프란치스코처럼 극복하면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10번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죄를 지을 때나 해를 입을 때 자주 원수나 이웃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데 누구나 그 원수, 즉 육체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의 3중 직무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활동과 치유구마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성화직)과 봉사직(왕직)으로 관련지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데,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기도하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산고의 아픔이 다해야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탄생하면 산고의 아픔은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곧 치유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4)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고,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며,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라고 알려줍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기쁜 소식”,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오늘 우리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먼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총과 사랑을 입은 이들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을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명심하고, 예수님 삶, 곧 이 3중 직무를 수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38
나는 그 일을 하도록 떠나온 것이다.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뼈 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가 행복의 핵심인 이유

이번 1월 가두 선교 때 저는 몸이 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빠졌습니다. 조금 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자들만 내보내 미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교를 나가는 일은 어렵습니다. 춥고 사람들에게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신앙생활 하면 되는데 내가 왜 나서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이것을 극복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행복해서입니다. 힘든데 행복합니다. 이것을 체험하지 않고는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고 참 행복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란 말을 듣습니다. 이 자격을 갖추고 있음이 행복임을 깨달아야 신앙이 나에게 행복을 줍니다. 

영화 ‘배트맨’을 보았을 것입니다. 배트맨의 주인공은 브루스 웨인입니다. 웨인이 어렸을 때 우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우물에서 갑자기 많은 박쥐가 어린 웨인을 덮쳤습니다. 웨인은 그 트라우마로 어둠과 박쥐가 싫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과 오페라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페라에도 박쥐가 나오는 것입니다. 웨인은 어렸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부모님께 빨리 집에 가자고 보챕니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웨인을 데리고 극장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한 악당이 나타나 웨인의 부모를 살해합니다. 

웨인은 자신이 박쥐를 무서워하지 않았다면 부모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더 큰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부모의 원수에게 복수하는 길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무술을 갈고닦습니다. 드디어 범인이 잡혀서 재판받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총 한 자루를 숨기고 재판정에 갑니다. 그런데 재판은 무죄로 끝납니다. 그 범인의 보스가 그를 무죄로 풀어주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사람들 앞에서 암살합니다. 골칫거리였기 때문입니다. 평생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웨인은 원수가 힘없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며 허무함을 느낍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다.’

그는 원수가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쥐와 어둠이라는 원초적 공포와 마주해야 합니다. 이 상징적인 도시가 그가 살고 있던 고담 시티입니다. 어둠과 범죄, 박쥐와 같은 이들이 활개 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자기 원수를 죽인 원수가 이번에는 고담 시티를 파괴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번에는 고담 시티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토록 무서워했던 박쥐의 탈을 쓰고 박쥐의 망토를 두르고 어둠 속에서 죽어야 마땅한 도시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러자 보람을 느낍니다. 

부모님이 자신이 이런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며 돌아가셨다는 생각도 듭니다. 드디어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둠이 올 때마다 이전처럼 우울함에 잠기기보다는 선량한 사람을 지키고 일으키려고 일하기 위해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만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행복했습니다. 죄를 짓기 전까지는. 그전까지 그들에게 내려진 사명은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에덴동산의 지위로 다시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고 새벽에 혼자 기도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예수님께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받은 일은 기쁜 일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더 높은 수준의 일을 하지 않으면 동물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삽니다. 누군가 그들을 위하는 삶을 살게 될 때 동물의 수준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주인이 누리는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브루스 웨인에게 스승이 무술을 가르쳐주며 하는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자경단은 그저 자기만족을 위해 허우적대는 족속들에 불과하지. 그러다 결국엔 죽거나 감옥에 갇힐 수도 있어. 하지만…. 만약 자네가 단순한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어, 하나의 이상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해서, 누구도 그런 자네를 막지 못한다면…. 자넨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겠지.”

(브루스 웨인: “그게 뭐죠?”)

“전설이라네, 웨인 씨.”

천국은 고통의 세상에 속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을 침에 있는 것이 아닌, 그 고통받은 이들을 구원하라는 부르심에 매일 응답함으로써만 얻어진다는 진리.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로 미사 끝에 하는 이 한마디가 기쁜소식의 핵심입니다.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종종 유명인의 자서전이 출판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서전을 출판하면 거리를 두어라.’
 
특히 회사 CEO가 자서전을 내면 그 회사 주식을 얼른 팔아야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떤 CEO가 자신의 샐러리맨 신화를 다룬 자서전을 내고서 몇 년 뒤 회사 전체가 공중분해가 된 적이 있습니다. 보통 자서전은 자기의 성공담을 들려주고 싶어서 쓰는 것인데, 이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지나친 자기 확신에 빠졌다는 위험 신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에는 수많은 우연적 요소, 환경, 시대적 조건, 개인의 특성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되어 있는데, 자기 능력으로만 성공한 것으로 착각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꼰대’가 되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생각을 갖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생각에 다른 이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면 망하기 딱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꼰대가 어른에게만 해당할까요? 종종 자녀가 자기 부모에게 ‘꼰대’라고 말하지만, 본인도 부모님 말씀 듣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것만, 자기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꼰대’입니다.
 
작년 말, 병원에 가서 ‘간 탄력도’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검사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간이 굳어 있는지 아니면 유연한지를 검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굳어 있으면 좋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혹시 단단히 굳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마음이 유연해야 모두를 받아들이며, 특히 주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들을 해방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쁨에 넘쳐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치유와 구마의 능력을 보고서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겠지요.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편하고 쉬운 삶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면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 38)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렇게 하느님과의 만남에 집중하다 보니, 세상의 관점보다 하느님의 관점만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훌훌 털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세상 것에만 집중해서 딱딱하게 굳은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

- 위지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떠남이 있기에 새로운 만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중한 만남을 결코 놓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쁜소식을 전하시는 당신의 실천력으로 우리의 새날을 여십니다.

삶을 꾸려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고 중심이 되는 것은 삶의 목적입니다. 삶의 목적이 만들어가는 소중한 우리들 삶입니다. 복음선포가 삶의 목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에 직접 손을 대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의 치유가 되고 생명의 길이 됩니다. 하루의 일과를 만들어내는 복음이며 복음에 맡겨야 할 우리의 생활입니다.

목적이 되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길을 보여주십니다.

끊어진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십니다. 복음을 몰랐고 복음을 믿지도 않았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참된 기쁨도 몰랐습니다.

삶의 목적을 잃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의 복음을 예수님의 삶으로 선포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행하는 가장 좋은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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