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5년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1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히브 2,5-12)
하느님께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1,21ㄴ-28)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 오늘 말씀 카드
(시편 8,5)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히브 2,5-12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7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8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하느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
마르 1,21ㄴ-28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14일
강유빈 도미니코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29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가회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가회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06: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생중계 없음 - 남양성모성지 온라인 매일미사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남양성모성지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생중계 없음 / 화 11:00 / 수 11:00 / 목 11:00 / 금 11:00 / 토 11:00 - 원당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원당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원당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10: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10:00 - 초당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초당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초당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0:30 / 월 06:30 / 화 19:30 / 수 10:00 / 목 19:30 / 금 10:00 / 토 10:00 - 팔로티회 온라인 매일미사
팔로티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가 이렇게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고백이지만 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신앙 고백으로 그 나름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멸망시키시러 오셨는지를 묻는 이 말은 그 고백이, 그 앎이 사실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상관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분 눈에 우리는 소중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멸망이 아닌 구원과 행복을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계시지 못하고 우리 사이에 들어오시려 한 것이지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화답송 시편의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한 관심과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한 형제가 되셨습니다. 전혀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기꺼이 그 길을 가셨다는 것이 오늘 독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관심 꺼라.’ 하고 적대감을 드러내며 무관심을 내세우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우리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픔과 상처를 겪으며 살다 보니 적대감과 무관심과 체념의 언어를 자신도 모르게 되풀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러한 속임수에 걸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평화의 길로 모두 함께 나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악의 평범성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우리 “구원의 영도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도자인 그분이 우리 구원을 위해 고난받으신 분이시고,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며 우리의 형제가 되신 분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사실 그렇지요.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분의 형제라고 불리고, 우리 구원을 위해 영도자인 분이 고난을 받으십니까? 다만 하느님의 은총의 소치일 뿐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고 은총을 누려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소리 지르며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도자를 상관없는 분이라고 합니다.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안다며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아는, 더러운 영의 모순은 무엇이고 왜 이렇게 모순된 행동을 취합니까?
하느님의 구원이, 구원이 아니고 멸망이며, 하느님의 은총이, 은총이 아니라 괴롭힘이 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더러운 영이 생각하는 구원이 주님의 구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안주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내용의 더러운 영 얘기가 5장에서도 나오는데 게라사 지방에 예수님께서 발을 내딛으시자 군대라는 더러운 영이 마중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구역에 주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들을 그 지역에서 쫓아내시는 분으로 주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영이란 자기가 살던 곳을 더럽게 집착하기에 더러운 영입니다. 죽게 되면 이 세상을 깨끗이 떠나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 어떻게 해서든지 곧 더러운 돼지들 속에서라도 머무르려는 영입니다.
제 생각에 더러운 영이란 특별한 영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더러운 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며 우리처럼 평범한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더러운 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현재의 상태를 고집하며 안주하려고 들면 그리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깨끗이 떠나 하느님께 가지 않으면 그리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입니다.
떠나지 않으려고 함, 현재에 안주하려고 함, 하느님께 가지 않으려고 함, 이것이 우리에게도 가능한 ‘악의 평범성’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고, 그것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사고 친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은 먼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고 네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음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마르 1,22).
그런데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에 들린 이’가 소리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구체적으로 증거 하는 이 ‘첫 번째 행적’으로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는 일’과 ‘악마에 사로잡힌 이에게서 악마를 쫓아내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첫 번째 행적’은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고, 본래로 돌려놓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요, 구원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더러운 영’을 쫓아낼 뿐 죽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인간과 같이 영원불멸의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은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라고 밝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 신원에 대한 정보를 드러낼 뿐 신앙고백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앎’은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결정적인 때가 오기까지는 제지당하게 되고, ‘메시아 비밀사상’에 가두어지게 됩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마와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악마가 추방된 사건’이라기보다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다름 아닌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구마치유는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직접 스스로 명령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지 않으심으로써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이 멈추게 되고, 어둠을 몰아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24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새로 나게 하소서.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권위가 있는 말엔 항상 이것이 섞여 있다.
첫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신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을 시작하시며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전파자의 권위는 ‘성령’입니다. 성령만이 악령을 쫓아낼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며 놀라워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고 악령은 성령으로 쫓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말에 성령의 힘이 더해지면 사람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게 되는데 그런 가르침이라야 권위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위가 없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와 같은 프로에 보면 아이들은 부모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문제라고만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요? 부모의 말에 왜 권위가 사라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당신 자신과 싸우셨습니다. 성령이 말의 권위인데, 이 성령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이기게 합니다. 이때 흐르는 피가 말과 섞을 때야 말에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한 젊은 스님이 수박을 사러 5일장에 들렀습니다. 완벽하게 익은 수박을 조심스럽게 골라 값을 지불한 스님은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치고 가서 수박이 땅에 떨어져 조각조각 부서졌습니다.
“이보시오! 남의 수박을 깨뜨린 뒤 어떻게 그냥 가버릴 수가 있어요?”
스님이 소리쳤습니다. 백발의 노부인이 뒤를 돌아 스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중이라면 정신을 차려야지. 이 정도도 못 참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가르침과도 같은 여인의 말은 스님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 같았습니다.
“보살님, 어디 사십니까?” 스님이 호기심에 물었습니다. “내가 어디 사는지 뭐가 중요하냐?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다.”
스님은 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잠시 후, 노파는 막걸리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남 따라다닐 시간에 네 갈 길이나 가라.” 노파가 말했습니다. 스님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껏 남을 따라다니기만 했구나.” 노파의 말은 계속해서 가르침처럼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부인, 당신은 매우 현명해 보이는군요. 무엇을 공부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자는 “지혜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23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대학에 보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군에 입대하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그의 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뢰를 밟고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그 사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후로 눈물이 멈출 수가 없었어요. 먹고 자고 상관없어요. 저는 몇 년 동안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스님은 그녀의 말속에 담긴 깊은 고통을 깨닫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떨어지는 것을 보다 보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방울이 냇물이 되어 냇물이 바다가 됩니다. 바다가 다시 구름이 되고 물방울이 되죠.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돌아옵니다. 그 근원으로. 이것을 느끼고는 슬픔을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노파의 말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노파의 말은 곧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노파는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신 것이고 그 성령이 한마디, 한마디에 그 사람의 피를 섞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은 말들은 내가 아무리 되풀이해도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한테서 들으신 말씀으로 당신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니 말씀에 힘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이긴 사람의 말엔 권위가 있습니다. 자신도 이기지 못한 말은 권위가 없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잔소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가장 권위 있는 말은 어디서 하신 말씀일까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자기를 이기신 말씀.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변합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말에 피를 섞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영향력 있는 말을 하고 싶거든 매일 성령을 자기를 이기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연필을 어떻게 만들까요?
연필을 어떻게 만들까요? 우선 용광로에서 만든 강철로 나무를 벱니다. 그리고 다시 잘라서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건조하고, 염색한 뒤에 또 말립니다. 작은 조각에 흠을 낸 뒤 서로 이어 붙여 고정합니다. 연필의 핵심인 연필심은 흑연에 흙, 동물성 지방과 황산으로 만든 화합물을 섞어서 만듭니다. 피마자 씨앗에서 추출한 피마자유로 만든 액체로 연필의 나무와 심을 코팅하고, 수지를 써서 라벨을 붙입니다. 연필 끝에는 구리와 아연으로 만든 놋쇠를 붙이고, 유채씨유, 염화황부터 황화카드뮴에 이르는 수많은 화학물을 사용해서 만든 지우개를 여기에 붙입니다.
이런 제조 과정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연필 한 자루가 새롭게 보이지 않습니까? 만드는데 별로 어렵지 않은 간단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그러했습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어떤 것도 별것 아닌 것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혼자서는 연필 한 자루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함께’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고, 우리도 함께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함께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 나라에서도 함께해야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함께할 수 없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입니다.
사실 악은 늘 우리와 함께하려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 곁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삶이 아닌 더러운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세상에 알립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악은 분열을 일으킬 따름입니다. 분명히 정답이지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정답인데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의심하게 되고, 그 결과 예수님 곁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꾸짖으며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주님과 또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악과는 함께해서는 안 됩니다. 악을 단호하게 끊어 버리고, 사랑 안에서 주님과 또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결코 살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중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대자연의 복원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들이 고뇌하고 직면하고 있는 이 아픈 현상황도 정상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에서 우리는 참된 행복과 고요를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심을 나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온삶으로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도록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가르침의 통로는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살이 되고 영혼이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마음을 맑게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이 하는 것이 건강한 삶의 바탕입니다. 건강한 삶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지역과 계층과 세대에 편향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건강하셨기에 끝까지 권위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을 잃으면 권위는 남용됩니다. 사랑의 위기는 곧 관계의 위기입니다. 관계의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움과 변화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이 소중한 이웃들의 피와 땀 눈물과 기도와 정성이 있었습니다.
조급함이 아닌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 안에서 건강하게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맑은 마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1, 25)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1/15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5 |
---|---|
25/01/13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3 |
25/01/12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2 |
25/01/11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1 |
25/01/10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0 |
25/01/09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09 |
25/01/08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