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5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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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히브 3,7-14)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서로 격려하십시오. - 오늘 복음
(마르 1,40-45)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오늘 말씀 카드
(히브 3,7-8)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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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 3,7-14
오늘 제1독서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서로 격려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7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8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9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며 시험하였다.
10
사십 년 동안 그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세대에게 화가 나 말하였다.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11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2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13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14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마르 1,40-45
오늘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16일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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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합니다. 레위기 13장에 따르면, 악성 피부병이 생겨 사제가 부정한 이로 선언하면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콧수염을 가리고 스스로 ‘부정한 이’라 외친 뒤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합니다.
율법에 따라 인간계에서 배제되었던 이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경계를 넘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내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이것이 바로 그를 가엾이 여기시어 어루만지시며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를 고쳐 주신 뒤 단단히 이르십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1,44).
레위기 14장에 따르면, 악성 피부병 환자가 병이 나으면 사제에게서 정결한 이로 선언받고 정결례와 속죄 예식을 거행한 다음에야 진영 안, 곧 자신의 공동체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처지가 워낙 좋지 못하여 당장은 율법을 어기고 넘어온 그를 받아 주셨지만 치유된 다음에는 율법을 통한 회복의 절차를 밟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이르셨지만, 그는 떠나가서 이 일을 퍼뜨립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
구세주를 만난 이, 구원받은 이의 환호성을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 성가』에 있는 성가곡의 노랫말도 함께 떠오릅니다.
“세상에 외치고 싶어 당신이 누구신지 / 세상에 외치고 싶어 주의 크신 사랑.”
아직까지 주님을 전하지 않고 있다면 지금까지도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완고함을 생각하면 꿈쩍도 하지 않음이 즉시 연상됩니다. 물론 아무리 모욕을 주고 공격해도 꿈쩍하지 않음처럼 좋은 뜻의 말이 아닙니다.
나쁜 고집이며 새로움을 거부하는 것이며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입니다. 그것이 오늘 서간 말씀과 연결하면 ‘오늘’을 받아들이지 않음입니다.
오늘이 오늘이 아닌 사람에게는 오늘도 어제입니다. 우리는 오늘이 되면 오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이 되면 오늘을 열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이 됐는데도 오늘에 무관심하고 민감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거를 고집하는 셈이 되고 화석처럼 과거의 나로 굳어져 버릴 것입니다.
지난 연말연시를 저는 동해 바닷가에서 피정하며 보냈습니다. 저는 매일 일출을 보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보러 나가지 않고 길 가거나 일하는 사람들 아무도 해 뜨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 몇 가지. 해는 뜨는 것을 보지 이미 떠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 해는 보려는 사람이 보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보지 않는다. 일출을 못 보던 사람이 보려고 하지 늘 보는 사람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튼 정월 초하루 무안 공항 참사 때문에 조심스러운 상황인데도 그래도 일출을 봐야겠다고 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실 해는, 새해 첫날의 해나 다른 날의 해나 똑같은 해입니다.
하지만 새해 첫날엔 해맞이를 특별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해가 되고 의미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해의 첫날만 그렇게 특별히 맞이하지 않고, 매일 특별하게 맞이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진정 늘 보는 사람을 처음 본 듯이 보고 새해 첫날 해맞이하듯 보면 그것이 사랑이고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와 하느님 말씀도 오늘 듣게 되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안 듣고 내일 듣겠다거나 옛날 들은 것을 재탕으로 듣지 않고, 오늘 들으면 그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이고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치유 받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 받은 한 나병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치유 받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나를 치유하신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이고,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규정(레위 13,45-46 참조)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혹시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서도 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해줍니다.
한편,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에 대한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동시에,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기에,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주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로 자신을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41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주님,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저도 원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 기도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아보는 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어떻게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보여줍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기도의 목적과 방법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가 잘 안 된다고 하고 어떤 분은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하면 우리는 나의 기도가 잘 가고 있는지, 혹은 지금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복음에서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곧 창조자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알 수 있기에 그만큼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은 본래 인간의 모습에서 멀어진 죽은 모습입니다. 이 원형이 본래의 창조 모형인 그리스도처럼 회복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과 사랑이 요구됩니다. 이 지식과 사랑을 회복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원형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결과를 낳는 게 기도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잘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분심이 안 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도는 힘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신 것이 기도의 원형입니다. 변화는 힘이 듭니다.
영화 ‘리얼 스틸’(2011)은 공상과학 영화지만, 쓸모없어서 버려진 주인공 로봇이 어떻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기도를 통해 우리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아톰은 버려지고 잊혀진 로봇으로, 쓰레기장에서 묻혀 있던 한때는 유용했지만 이제는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맥스가 아톰을 발견하면서, 아톰의 회복과 더불어 원래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는 오늘 복음(마르코 1,40-45)에서 예수님을 만난 나병환자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과정과도 닮아 있습니다. 영성의 단계로 말하자면, 이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첫 단계인 ‘구송 기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아톰은 자율적으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단지 외부 명령에 반응할 뿐입니다. 이는 구송 기도에서 우리가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말을 내뱉으며 시작하는 모습을 반영합니다. 이 초기 단계에서, 맥스는 아톰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톰은,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듯, 끊임없이 주목을 요구합니다. 맥스는 마지못해 아톰을 경기장에 데려가고, 아톰은 경기에서의 활약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합니다. 이는 소개의 단계입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첫 목소리입니다.
아톰이 수리되고 훈련되면서, 그 성장 과정은 다음 단계인 ‘듣기’로 전환됩니다. 이제 아톰은 단순히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넘어, 맥스와 찰리의 의도를 해석하며 목적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아톰의 행동은 점점 더 그들과 조화를 이루고, 주인에게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이는 영성에서 묵상 기도에 해당하는 단계로, 영혼이 말을 한 후 주님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이해가 깊어지고, 아톰이 조종자의 지시를 듣고 동작을 세밀히 조정하듯, 영혼도 신적 인도를 들으며 자신을 정제해 갑니다.
아톰의 변모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은 바로 챔피언 ‘제우스’와의 대결에서입니다. 이 전투에서 아톰은 더 이상 외부의 명령에만 의존하지 않고, 맥스와 찰리의 움직임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아톰은 마치 찰리의 복싱 기술을 거울처럼 따라하며 둘이 하나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아톰은 최고의 가능성에 도달하며, 이는 영혼이 관상 기도를 통해 단어와 행동을 초월하여 하느님과 일치되는 단계와 유사합니다. ‘보기’ 혹은 관상의 단계는 침묵 속에서 주님의 본질을 흡수하고 이를 모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아톰의 성장은 단지 더 나은 로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목적과 가치를 회복하는 여정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만난 뒤 깨끗하게 되어 회복된 나병환자의 여정과도 같습니다. 구송, 묵상, 관상의 각 단계는 이러한 회복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나 자신을 봉헌하고 그 자리에 주님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먼저 구송기도, 혹은 소리기도를 통해 나를 드러냅니다. 숨어있어도 되지만,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나에게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냥 혼자 있으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봉헌하지 않으면 그만큼 문둥병에서 나아질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그다음은 묵상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나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들어야 합니다. 내 정신까지도 그분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집중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그만큼 더 문둥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마지막은 관상 기도인데, 그분을 바라본다는 말은 이제 나를 완전히 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완벽히 봉헌하는 이 기도는 가장 큰 고통의 시간이자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분의 모습을 완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내가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됨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높은 기도를 하고 싶어도 다 순서가 있습니다. 나의 수준을 잘 알아서 힘들다고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되고, 힘들지 않다고 그 자리에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더 힘든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분의 모습으로 변하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효과는 기도가 끝난 이후에 확실히 나타납니다. 좀처럼 감정의 동요가 이전의 자신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힘이 활동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또 고통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조금 더 나병에서 치유되며 온전한 창조된 원형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라고 합니다. 남녀 간의 만남을 다루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그 역사는 199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결혼이 목적인 청춘남녀들이 맞선을 하는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사랑의 스튜디오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형태의 프로그램 숫자도 늘어났고, 특히 비연예인 출연진으로 현실감을 높인 연애 프로그램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런 연애 프로그램이 왜 끊임없이 인기를 끌까요? 어차피 여기에 나오는 연애란 결국 나의 연애가 아니라, 남의 연애가 아닙니까? 남의 연애사에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질까요? 하긴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교생 선생님이 오시면 첫사랑 이야기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나네요.
이를 심리학자들은 ‘감정전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출연자가 매력적인 상대를 만나 느끼는 설렘이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모두 표현되니, 이에 시청자도 자연스럽게 설렘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쩌다 친구 따라 성당에 나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너무 좋다고 해서 왔는데, 너무 엄숙해서 자기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좋게 말해서 엄숙한 것이지, 어쩌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기쁨도 없고, 그저 마지못해 자리만 지키는 신자들의 모습에 처음 온 사람들은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감정전이가 되지 않아, 전혀 설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자기 자리에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전교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거리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의 표정 하나도 전교의 큰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표정만으로도 주님의 뜻에 함께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치유된 그를 돌려보내시면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면서 단단히 이르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이후 행동에 대해 이렇게 복음은 전합니다.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
나병의 치유를 널리 알려야 주님을 더 믿고 따를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널리 알리고 퍼뜨린 것은 오히려 잘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알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건강을 알리는 것이 더 큰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 자체가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나의 표정 하나에서도 주님을 충분히 전할 수 있으며, 주님과 진심으로 함께하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같이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우리 삶에 따스한 것은 없다
- 이정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고통을 풀어주시고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생명의 참모습에 눈 뜨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께서는 선입견을 두지 않으시는 진정한 존중입니다.
참된 존중은 아픔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지니게 합니다. 진정한 삶의 길잡이가 되시어 잃었던 생활의 기쁨을 되찾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당신을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주는 분과 받는 분 모두가 하나되는 하느님 나라의 가족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족은 주님께 우리의 아픔을 내려놓습니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되어주십니다.
구원의 모습은 이렇듯이 구체적입니다. 치유를 말하는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치유를 위해 가슴으로 자신을 비우고 진정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로 기도로 함께하시는 생활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못난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십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요. 치유의 하느님을 만나는 소중한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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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2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2 |
25/01/11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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