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 아빠스가 광야의 은수 생활로 하느님을 섬기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의 모범과 전구로 저희 자신을 버리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2025년 1월 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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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히브 4,1-5.11)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 오늘 복음
(마르 2,1-12)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오늘 말씀 카드
(히브 4,11)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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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 4,1-5.11
오늘 제1독서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형제 여러분,
1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2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4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5
또 여기에서는,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11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마르 2,1-12
오늘 복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17일
강유빈 도미니코 신부
✚ 성 안토니오 아빠스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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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의 치유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죄의 용서를 말씀하신 까닭은 그를 죄의 멍에에서 풀어 주는 것이 그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병이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요한 9,2 참조).
몸이 마비되어 이전에 누리던 자유를 빼앗긴 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고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자신의 병고를 조금은 동정해 주는 듯하면서도 죄인으로 낙인찍고 수군덕거리는 주변의 시선은 무시하려고 해도 점점 그의 내면을 파고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혐오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자신을 단죄한 이웃과 세상을 향한 미움과 분노도 심상치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들것에 싣고 와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 예수님 앞에 이르게 한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그 말씀과 행위로 당신께서는 신성 모독자로 낙인찍히시면서도 그를 해방시키시어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되돌려주십니다. 네 사람은 중풍 병자를 구세주께 데려다주었고, 그는 몸과 마음을 회복하였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다시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가족과 동료들, 새로 만나게 된 감사한 세상에 대한 구원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추억과 은총을 빼앗기지 말고 삽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결합되어있는 공동체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다른 사람 넷이 들것에 실어 지붕까지 뚫어가며 주님께 데려가 치유받게 하는 얘기입니다만 이 과정에서 주님께 용서의 권한이 있는지 권한 논쟁으로 번지는 얘기입니다.
구약 때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 죄의 결과, 그러니까 인간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결과라고 믿고, 그래서 죄의 치유는 벌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라고 믿는데 주님께서 용서받았다고 하며 치유하시니 그들에게는 독성죄로 보였던 겁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오늘 히브리서나 복음 모두 믿음이건 용서건 용서에 의한 치유건 공동체적인 거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오늘 치유는 합동 작전으로 이루어지는데 합동 믿음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중풍 병자도 치유 받고는 싶었지만, 그 믿음이 반신반의 상태였는데 이웃들의 믿음이 그를 설득하였을 것이고 그들의 설득에 중풍 병자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가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중풍 병자의 부족한 믿음이 이웃의 확고한 믿음에 결합됨으로써 치유가 이루어진 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에는 그 반대의 경우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이 복음 말씀을 들었지만, 불신자들은 복음을 귀여겨들은 신자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않아 결국 복음 말씀이 구원과 행복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공동체 또는 믿음의 공동체란 어떤 것입니까?
개인의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이 공동체의 믿음과 결합되어 함께 주님께 나아가고, 함께 구원을 받는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공동체라면 치유도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나의 치유를 너의 들것에 맡기고 너의 치유를 위해 내가 들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용서가 오로지 하느님의 권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지만 꼭 예수 그리스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도 포함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이 지상 교회에 용서의 권한을 주심으로써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의 용서를 사람들에게 베푸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용서가 하늘에 이르러야 하고, 우리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와 결합됨으로써 완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기도 가르침에서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시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우리의 단순한 생각과는 정반대이지요.
권한 문제를 떠나서 우리의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같아야 하고,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이사 43,25;44,22).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이는 ‘죄를 용서 받은’ 우리들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죄를 용서 받고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표시로 영광의 그 상처로 지니고 다닙니다.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도 그 상처를 축복의 표시로 지니고 다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요, 구원의 표지요, 당신 자녀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치유 받았다고 해서, ‘들것’을 버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도 그렇습니다. 치유 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굳이 없앨 필요도, 매여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것’을 들고 다니듯, ‘상처’도 기꺼이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하느님의 집으로 데려가고 가야 할 일입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 인류를 태워 아버지께로 들고 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서 ‘상처’를 받으시고 바로 그 ‘상처’의 보혈로 우리를 화해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그 ‘들것’ 위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랑의 표지, 용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2,11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용서하려는 노력이 은총을 받는 지름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사람의 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보여주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권한을 통해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를 치유한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나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에 더 큰 이익이 오지 않으면 항상 그렇게 한 일을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큰 이익이 주어지지 않으면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일가족을 다 죽인 유영철을 용서한 고정원 씨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하기 위해 매일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용서의 힘을 주심을 넘어서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도 주십니다. 용서는 마치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주고 일만 탈렌트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일만 탈렌트가 생기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수백만 원을 탕감해주고 수조 원을 버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오랜 자신과의 싸움을 전제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성령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되고 그 성령의 힘으로 용서를 넘어서는 큰일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한 사람치고 이 용서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성령의 힘으로 병을 치유해주시는 것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존 프랜시스(John Francis)는 1971년 샌프란시스코만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 사고를 목격한 후, 환경 파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인간의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느꼈습니다.
그는 모터가 달린 교통수단 사용을 중단하고, 걷기를 통해 환경 보호를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갈등과 오해를 샀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싸우다가 결국 침묵하기로 합니다. 침묵은 용서를 위한 기초작업입니다. 그 침묵을 그는 무려 17년간을 했습니다.
이러한 침묵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를 깊이 숙고했습니다. 인간관계도 환경의 일종인데,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 또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17년 동안 침묵하면서 전 미국을 횡단하며 환경학 박사학위까지 땄습니다. 그리고 UN에서 일하며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이제 모두를 용서하고 말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존 프랜시스의 이러한 경험은 용서가 단순히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치유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책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에서 이러한 내면의 여정과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타인을 용서함으로써 환경 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으며, 전 세계에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대목이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중요하고 짧은 기도에 용서라는 작은 주제가 들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가 평생 해나가야 할 것이고 그 용서를 통해 우리의 양식인 성령께서 활동하게 하심을 알고는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행동을 주저하는 이유는 용서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먼저 성령께서 들어오시고 행동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지 못 할 일이 없는데, 성령을 얻는 방법에서 용서만큼 완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간직하고 있나요?
어느 여행자가 마을 입구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묻습니다.
“이 마을 사정은 어떠합니까? 이곳 주민들은 어떤가요?”
노인은 “그대가 최근에 갔던 곳의 사정은 어떠했소? 그곳 주민은 어떠했나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여행자는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이 마을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오.”
다음날, 다른 여행자가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노인은 마찬가지로 “그대가 최근에 갔던 곳의 사정은 어떠했소? 그곳 주민은 어떠했나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여행자는 인상을 쓰면서, “마을 전체가 끔찍했습니다. 하나같이 형편없는 사람이었고, 저한테 아주 못되게 굴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이 마을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오.”
자기가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달라집니다. 즉, 긍정적 마음으로 바라보면 긍정적인 모습이 보이고, 부정적 마음으로 바라보면 부정적인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나’의 문제인데, 우리는 늘 ‘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향해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6)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율법 학자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놀라운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는 죄의 용서와 질병의 치유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시선으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면서, 중풍 병자의 병을 치유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의 일이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감춰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의 일이 전혀 드러날 수 없는 법이지요. 오늘 복음의 놀라운 치유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율법 학자가 아닌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덕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르 2,5)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간직하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행동이 반드시 행복을 안겨주지 않을지는 몰라도 행동 없는 행복이란 없다
- 윌리엄 제임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믿음이 가고자 하는 길은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건강한 삶입니다. 건강한 삶은 믿음의 자리에서 믿음을 실천합니다.
믿음은 삶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듯 우리가 자유로운 행복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믿음의 생활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여기서 본질은 겉모양만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 속의 변화입니다. 마음 속의 변화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마음가짐이 수도생활입니다.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무엇을 위한 믿음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강한 삶 건강한 세상을 위한 믿음입니다. 사람을 위한 믿음은 죄의 용서와 삶의 이유를 치유하여 줍니다.
사람답게 사는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믿음입니다. 우리보다 더 적극적인 성 안토니오 아빠스의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에서 출발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삶으로 보여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향해 믿음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믿음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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