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2025년 1월 19일 연중 제2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1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62,1-5)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 제 2독서
(1코린 12,4-11)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1-11)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2,5)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이사 62,1-5
오늘 제1독서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1
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2
그러면 민족들이 너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
3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면류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되리라.
4
다시는 네가 ‘소박맞은 여인’이라, 다시는 네 땅이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5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1코린 12,4-11
오늘 제2독서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8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9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0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1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하느님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네.
요한 2,1-11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
그때에
1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2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4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6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7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9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10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11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19일
임민균 그레고리오 신부
✚ 성심교정 예수성심성당 소개 00:24
✚ 미사시작 01:02
✚ 강론시작 15:53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가회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가회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06: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생중계 없음 - 남양성모성지 온라인 매일미사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남양성모성지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생중계 없음 / 화 11:00 / 수 11:00 / 목 11:00 / 금 11:00 / 토 11:00 - 원당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원당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원당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10: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10:00 - 초당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초당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초당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0:30 / 월 06:30 / 화 19:30 / 수 10:00 / 목 19:30 / 금 10:00 / 토 10:00 - 팔로티회 온라인 매일미사
팔로티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으로 알려진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입니다. 이 기적의 시작점은 성모님이십니다. 먼저, 성모님께서는 혼인 잔칫집의 곤란함을 재빨리 알아차리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그 잔치에 즐기는 이로 계셨는지 아니면 일손을 보태어 돕고 계셨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뒤에 일꾼들을 부리시는 그분의 솜씨로 보아 잔치 준비에 큰 도움을 주고 계셨겠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어서 성모님께서는 그 집의 곤란한 사정을 아들 예수님께 신속히 알리십니다. 성모님의 역할은 중재자이십니다. 곤란한 이의 사정을 아들 예수님께 부지런히 전달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그러나 신뢰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실망하시지 않고 일꾼들에게 이르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
예수님의 뜻을 따르시면서도, 예수님께만 신뢰와 희망을 두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음을 밝히시며 거절하시고도, 어머니의 의탁과 간절한 희망을 보시고는 그 때를 앞당기시어 당신의 계획을 바꾸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자주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시간을 내는 것이며, 필요하다면 그를 위하여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는 것’이라는 점입니다(「모든 형제들」, 63.101항 참조).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당신의 계획을 내려놓으시고 응답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의 표징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이웃에게 시간을 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꼭 필요하다면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을 수 있는 관대한 마음, 열린 마음, 흔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신랑의 신부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연중 제2주일 복음으로 요한복음의 카나 마을 기적 얘기를 듣는 것은 공현의 연장선상에서 연중시기 시작 전례를 교회가 짜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주님의 공현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기 예수의 공현으로서 그것이 주님 공현 대축일이지요.
다른 두 공현은 어른 예수의 공현/등장인데 하나는 세례 때의 공현으로 지난주 우리는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냈고 이것은 공관복음의 공현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은 주님의 세례 얘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른 예수의 공현/등장으로 오늘 카나 마을의 기적을 소개하는데 요한복음에서의 주님 공현은 당신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내는 것이고, 복음 내내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는 공관복음이 사람의 아들로 주님을 소개하는 것과 다르며 그래서 공관복음의 주님이 기적에 대해 함구하라고 하신 것과도 다릅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이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려고 애쓰셨음을 강조하는 데 비해 요한복음은 우리와 같이 되신 주님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아들임을 강조합니다.
공관복음이 주님의 신성을 감추려 하는데 요한복음은 주님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이토록 주님의 신성과 영광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으로서 영광 받길 바라시니 마땅한 영광을 우리가 드려야 한다고 얘기하려는 것일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천박한 분이실 리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마땅한 영광을 드려야 하는 것은 맞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이나 받길 원하여 오신 분은 아니시지요.
요한복음이 주님의 신성과 영광을 강조함은 역시 우리를 위한 것일 겁니다. 영광스러운 하느님 아드님의 신부답게 처신하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우리와 같아지셨으니 우리도 그분과 같아지라는 것일 겁니다. 그분이 우리와 같이 인성을 취하셨으니 우리도 그분과 같이 신성을 지니라는 것일 겁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전례의 독서는 이사야서를 들려주는데 이사야서의 예언이 오늘 카나 마을 잔치에서 실현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일 겁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잔칫집에 들어가심은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심과 같고 주님께서 요르단강물에 들어가심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르단강물에 들어가심으로 당신이 깨끗해지시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요르단강물에 들어가심으로 요르단강물을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고, 거룩해진 강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깨끗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잔치에 참여하심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과 살을 섞으심과 같습니다. 그래서 카나 마을의 혼인 잔치에서 남녀가 혼인하듯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와 혼인 관계로 결합하심을 이사야서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아내로 맞아들이시기 전까지 우리는 ‘소박맞은 여인’이었고, ‘버림받은 여인’이었었는데 우리는 이제 그분의 신부가 되고 영광스러운 분의 영광스러움을 입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왕이 되면 아내는 왕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아드님의 영광스러운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드님의 신부가 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클라라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시여, 이 거울(그리스도)을 매일 들여다보고 계속해서 그 안에서 당신 얼굴을 살펴보십시오. 그리하여 갖가지 장식으로 휘감고 차려 입어 안팎으로 속속들이 단장하고, 사랑스러운 정배에게 어울리는 온갖 덕행의 꽃과 옷으로도 치장하십시오.”
우리도 오늘 이런 권고를 받는 신랑의 신부들입니다. 여러분 가정안에 평화를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바로 지금이 새 포도주를 마셔야 할 때
연중 제2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드러내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때’를 미리 알려줍니다. 그 ‘때’를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제2독서>는 그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풍성한 선물, 곧 은사들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는 참으로 풍부한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의미 중의 하나는 ‘때’, 곧 “그리스도의 때”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에는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영국의 3대 낭만파 시인 중의 한 명인 바이런이 옥스퍼드 대학 종교학 과목 시험을 칠 때 있었던 일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열심히 답지를 쓰는데, 바이런만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감독관이 주의를 주었지만 시험 종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계속 멍 때리기를 계속하자 화가 난 감독 교수가 백지로 제출하면 영점처리 되고 학사경고의 대상이 되니 뭐든 써 라고 하니, 그때서야 그는 단 한 줄만 써놓고 유유히 빠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달랑 한 줄 답안지는 이 대학 신학과 창립이후 모든 교수들을 감동시킨 전설의 만점 답안지가 되었습니다. 그 한 줄은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을 붉히더라."!!!
이 이야기는 바로 ‘신랑이 신부를 만날 때’ 벌어진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혼인잔치가 벌어진 때’의 일입니다. 바로 ‘복음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네 개의 ‘때’가 암시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때’는 혼인잔치가 벌어진 날입니다. 곧 “사흘째 되는 날”(요한 2,1)입니다. “사흘째 되는 날”, 이 날은 시나이 계약과 연결됩니다. 곧 주님께서 모세에게 “셋째 날에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탈출 19,11)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서 드러났듯이,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임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이 날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일어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일’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날은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날로부터는 일곱째 되는 날로서, ‘새 창조의 날’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첫 번째 표징”을 통해,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바로 ‘새로운 인류의 출현’으로 알려줍니다.
그 날은 다름 아닌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때’입니다. 구약에서는 오늘 <제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당신의 신부라 칭합니다. 그러니 혼인잔치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이 하나로 결합되는 “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마지막 결정적 때가 벌어지는 십자가 아래에서도 아들과 함께 하셨듯이, 지금 공생활의 첫 시작에 함께 계십니다. 단지 함께 계실뿐만 아니라, 바로 ‘아들의 때’를 열어 가십니다. 성모님께서 먼저 이 ‘때’를 알아채시고, 예수님께 말씀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두 번째> 등장하는 “때”에 대한 암시는 마리아께서 알아채신 “포도주가 다 떨어진 때”(요한 2,3)입니다. 곧 ‘옛 계약이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곧 새 포도주, 곧 새 사랑이 필요해졌고, ‘새 계약의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마리아께서는 포도주가 다 떨어진 바로 이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때’가 왔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혼인잔치 집에 놓여 있었던, “유다인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요한 2,6)가 암시해주는 ‘때’이기도 합니다. ‘여섯 개의 돌 항아리’는 가혹하고 엄격한 율법주의의 경직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의 맺는 관계에 사랑이 결핍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돌 항아리’는 결핍을 나타내는 숫자인 ‘여섯 개’ 이며, 모두 비어 있어서 더 이상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결국,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일곱 번째의 항아리’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나와 온 세상을 적셔줄 ‘때’를 향하고 있습니다. 새 계약의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모님께서는 포도주가 없다는 사실을 잔치 주관자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예수님께 알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 포도주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포도주가 다 떨어진 바로 이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때”가 왔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세 번째> 등장하는 ‘때’는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시는 ‘당신의 때’ 입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예수님께서는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자신의 때’가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일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욕구에 의해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뜻대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어머니께서는 “때”를 구실 삼아 아들에게 거절당하십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조금도 무안해 하시거나 섭섭해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성모님께서는 요청하는 자세에서 순종하는 자세로 태도를 바꾸십니다. 비록 거절당했지만,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아닌 아들의 원의에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이토록, 성모님께서는 명령이 있기도 전에, 이미 순명하십니다.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이미 잉태하고 계셨듯이, 믿음 안에서 이미 예수님께 순명하십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기적을 보고서 믿었지만, 마리아는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권능을 믿으신 까닭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명인가? 이 아름다운 일은 이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순명을 불러오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로 번져갑니다. 곧 예수님께서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하는 바로 그 ‘그리스도의 때’를 불러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순명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순명의 3중주곡’입니다. 마리아의 예수님께 대한 순명과 그 순명이 불러온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순명, 그리고 마리아와 예수님께 대한 시중꾼의 순명입니다.
그리하여 과방장은 “좋은 포도주를 이제까지 보관하고 계셨군요.” 라고 선포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네 번째>의 ‘때’입니다. 그러나 묘한 것은 이 혼인잔치에서는 단지 과방장이 새 포도주를 맛보았을 뿐, 아직 그 누구도 아직은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2,11).
그러나 이제 바로 지금이 그 ‘때’ 입니다. 과연, 지금이 새 포도주를 마셔야 할 ‘때’ 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함께 혼인잔치를 거행할 ‘때’ 입니다. 그래서 카나의 이 혼인잔치에는 신부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빈자리’로 초대받은 까닭입니다. 곧 우리가 신부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오늘이 신부로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셔야 할 ‘때’입니다.
결국, 카나에서 드러내신 이 표징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이에게 드러나게 될 ‘예수님의 영광’을 미리 밝혀줍니다.
과연, 이제 우리가 새 포도주를 마셔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함께 혼인잔치를 거행할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우리는 곧 “성찬례”에서 이 은혜로운 ‘사랑의 포도주, 새 계약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양의 신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랑이 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몸을 영함으로서 예수님과 결합할 것입니다. 당신께서 건네주신 생명으로 혼인을 맺고 합혼주를 마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거룩한 일인지요! 오늘이 바로 우리의 혼배 날입니다.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혼인축일을!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2,3
포도주가 없구나.
주님!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제 안에 당신 사랑이 필요합니다.
당신 사랑에 취하게 하소서.
취하여 임과 함께 춤추게 하소서.
당신이 나의 신랑인 까닭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타적인 행동을 시키는 대로 하면 자존감이 높아진다.
오늘 복음은 ‘카나의 혼인잔치’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내가 누가 되어야 행복해질까요?
예수님도 나오고 성모님도 나오고 종들, 혼인잔치를 맡아보는 관리인도 등장합니다. 오늘 가장 행복해진 주인공은 바로 종들입니다. 자신들은 그저 물을 떠 놓고 다시 가져다준 것뿐인데 과방장에게 대단한 칭찬을 듣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대해 복습해봅시다. 사람 대부분은 행복을 ‘소유’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돈이 행복입니다. 그러나 조사에 의하면 생존에 필요한 이상의 재산이 쌓이면 오히려 행복이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타인과의 비교 때문입니다. 돈이 많을수록 더 많은 사람과 비교하게 됩니다. 자존심은 있는 대로 부리면서도 더 큰 좌절을 느끼는 것입니다.
행복은 결국 ‘자존감’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상관없이 자존감이 높으면 행복합니다. 자존감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나는 돈 많은 부자야!’라고 아무리 자랑해도 자존감은 높아지지 않습니다.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쓸모가 없다고 여겨질 때 가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니 자존감을 높이려면 쓸모를 높여야 합니다.
쓸모는 ‘유익한 존재’입니다. 유익한 존재가 되려면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행복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눈다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위해 일부러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예를 높이라고 명령한 대상은 ‘자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더 가지라고 한 뱀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한 선행으로는 ‘나는 쓸모있는 존재다’라는 자존감을 상승시킬 수 없습니다.
자아의 명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인을 바꿔야 합니다. 만약 자동차가 인간이라면 자동차는 누구의 명령에 따를 때 쓸모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만든 이에게 순종하는 게 자존감을 가장 높이는 일이 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이타적인 행동을 수행하면 그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존재로 여겨지기에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종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종들이 됩니다. 거기서 얻는 자존감은 멈추지 않는 기쁨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멜 깁슨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제작하기 전 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영적 위기도 겪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안네 카타리나 에머리히라는 신비가 수녀님의 환시를 바탕으로 한 책인 ‘주님의 고통스러운 수난’(The Dolorous Passion of Our Lord Jesus Christ)이란 책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에 기록된 그대로 영화를 찍겠다고 결심합니다. 하늘의 명령으로 여긴 것입니다.
깁슨은 이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재정적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 영화는 논란이 많았고, 주요 영화사들은 종교적 주제와 아람어, 라틴어, 히브리어 사용 때문에 지원을 꺼렸습니다.
깁슨은 약 3천만 달러(약 450억)의 자기 재산을 투자해 영화 제작과 마케팅을 진행했으며, 사실상 자기 경력과 재정적 안정을 모두 건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6억 달러(약 9천억) 이상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재정적 성공을 넘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수많은 사람의 삶에 감동을 주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우울증을 극복하고 기쁨을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라고 한 성모 마리아의 명령을 따릅니다. 신자들이 십일조로 바치는 빵과 포도주를 제대 위에 올려놓고 다시 신자들에게 내어줍니다. 그럼으로써 신자들이 참 포도주를 마셨다는 증언을 듣습니다.
사제는 자신도 모르게 빵과 포도주를 신자들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일에 참여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사제로 사는 삶 자체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자존감에서 오는 행복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이런 카나의 기적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정결례 항아리에 물을 부을 것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카나의 혼인잔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아이와 노인의 기억력을 이렇게 비교합니다.
‘아이는 기억력이 탁월하지만 회상 능력이 없고, 노인은 기억력이 감퇴했지만 회상 능력이 있다.’
아이는 기억력이 좋아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잘 기억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겪은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해석하지 못합니다. 회상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방금 전의 일은 잊어버리기 일쑤이지만, 긴 시간적 맥락 안에서 한 사건이 갖는 깊은 의미를 읽어냅니다. 회상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 기억은 가까운 것을 끄집어내는 활동이고, 회상 능력은 먼발치에서 대상을 지켜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전체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단순 기억 능력은 떨어지고 회상 능력이 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나이 든 분은 단순 기억이 없어진다고 한탄하고, 또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의 단순 기억 능력의 떨어짐을 보고 무시합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필요하고, 상대를 인정하는 마음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저 역시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전체를 바라보며 의미를 찾는 회상 능력은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순 기억만 찾아서는 안 됩니다. 단순 기억만 쫓는 사람은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라는 말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움이라는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첫 번째 기적이 모든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것일까요?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도, 중병을 고치신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기적을 공개적으로 행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목격했던 것은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웠던 일꾼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기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단순 기억을 떠나 회상 능력으로 그 안에서 새로움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는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즉, 기쁨의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혼인 잔치의 삶처럼 당신과 일치해서 기쁨의 자리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삶이 매번 기쁨으로 가득하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슬픔과 괴로움으로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흥을 돋우는 포도주가 있어야 하는데, 포도주는 없고 물만 가득합니다. 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초대하고 또 함께해야 우리의 삶을 흥이 가득한 기쁨의 자리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그렇게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물이 주님을 통해 훌륭한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물독 속에 물을 채우듯이, 주님 마음에 우리 죄를, 우리 미움을, 우리의 부족함을, 우리의 이기심을, 우리의 상처와 저주와 분노 등을 모두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가장 훌륭한 사랑의 포도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꾹 간직만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남들도 그렇게 한다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면서 주님 마음에 우리의 부정적인 그 모든 것을 담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단순 기억으로만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회상 능력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일꾼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오늘의 명언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쉬지 않고 미세하게 균형을 맞춰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들에 얼마나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일레인 스캐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삶이라는 기쁨의 잔치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더 좋은 것만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좋은 변화의 때를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를 마련하여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이끄심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어느 순간 주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우리의 믿음이 변화의 시작임을 깨닫게 됩니다. 변화된 삶은 더욱 깊어지는 고유한 맛 고유한 빛깔로 자신의 삶을 기꺼이 하느님께 내어드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어머니도 모두 변화의 산증인들이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믿음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의 첫 기적은 변화된 삶의 기쁨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성장하는 변화이며 한계 속에서도 한계를 돌파하는 용기입니다. 채워야 할 것은 믿음이며 나눠야 할 것 또한 함께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자리에 성모님이 계시고 제자들이 있고 예수님이 계십니다. 믿음을 떠나 맛볼 수 없는 믿음의 참된 맛입니다.
믿음의 맛은 가장 좋은 삶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믿음으로 변화되어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 영광의 삶이길 온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모든 변화의 첫 시작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믿음의 주일 되십시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1/22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22 |
---|---|
25/01/21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21 |
25/01/20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20 |
25/01/18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8 |
25/01/17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7 |
25/01/1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6 |
25/01/15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1.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