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2024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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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1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신명 6,2-6)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 제 2독서
(히브 7,23-28)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 오늘 복음
(마르 12,28ㄱㄷ-34)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오늘 말씀 카드
(시편 18,2)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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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신명 6,2-6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2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평생토록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그분의 모든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오래 살 것이다.
3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가 잘되고 크게 번성할 것이다.
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6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히브 7,23-28
오늘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형제 여러분, 이전 계약의
23
사제들은 죽음 때문에 직무를 계속할 수가 없어 그 수가 많았습니다.
24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25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마르 12,28ㄱㄷ-34
오늘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3일
김요한 세례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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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사랑은 내가 중심이기를 멈추고, 상대가 나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내가 중심이기를 멈추고, 상대가 나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향한 이기주의적 움직임을 포기하고, 다른 이를 향하여 내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민범식, 『하느님 길만 걸으세요』, 156-165면 참조).
그래서 만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가 나에게 있다면 그 사랑은 아직 성숙한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기쁘기 때문에, 내가 충만해지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면 아직도 내가 중심에 있고 그 사랑은 나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반면에 사랑하는 상대의 행복을 바라고, 상대의 완성을 위하여 기꺼이 나를 희생할 마음이 있다면, 진정으로 성숙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자신의 중심이 되고 자신이 상대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생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보다 하느님께서 먼저이시고, 이웃이 먼저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바치신 것은 참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포기하신 ‘너-중심적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정한 사랑 안에서는 상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상대가 불행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고, 상대가 행복하면 내가 불행해진다는 사고로는 이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상대가 중심이 되는 진정한 사랑 안에서 아주 쉽게 이해되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 여기는 사랑이 우리 안에 깊게 자리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혜롭다면 사랑하라.
십계명을 하느님께 받을 때 돌판에 새겨 받은 모세가 가장 중요한 두 계명에 대해서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심하라고 곧 마음에 새기라고 두 번에 걸쳐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비망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닐 비(非)자의 비망록(非忘錄)인 줄 옛날에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정확히 알아보니 비망록(備忘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잊지 않도록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잊을 것을 대비하여 기록한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잊게 되어 있는 존재이고, 기억할 것을 기억하고 잊을 건 잊어야지 다 기억하고 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은 잊어야 할 것과 기억할 것을 잘 아는 사람이고, 알 뿐 아니라 잊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기억할 것은 꼭 기억하는 사람인데, 만일 그 반대가 된다면 다시 말해서 잊어서 버려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꼭 기억해서 간직해야 할 중요한 것을 잊는다면, 그는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도 그렇고 주님도 모든 계명 가운데서 명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계명이 바로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라는 것과 여기애인(如己愛人) 곧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가 비망록이나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계명을 새기라고 한 것이나, 주님께서 그것을 첫째가고 둘째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하느님을 위해서겠습니까?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웃을 위해서겠습니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행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죽으며 자녀들에게 이것 꼭 명심하며 살라고 할 때 사랑하기에 그 말을 하는 것이고 행복하라고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제일 중요하다고 하시고 모세가 마음에 새기라고 한 계명들이 우리 안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 안에 있습니까? 마음 밖에 있습니까?
저는 요즘 세상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함께 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없고 그래서 영혼도 심장도 없는, 그래서 껍데기만 있고 속은 텅 빈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마음 안이 텅 빈 것이 아닙니다. 마음 안에 욕심이 가득하거나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사랑이 없기에 욕심과 두려움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마음은 가득하면서도 허한 것입니다. 진정 사랑 없이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사랑 없이 행복할 수 있고, 그렇게 사는 것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결론처럼 말합니다. 지혜롭다면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씀을 명심합시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라고 하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도 명심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사랑의 소명
오늘은 연중 제 31주일, 11월의 첫 주일, 늦가을입니다. 가을도 아름답게 익어가고, 단풍도 아름답게 익어가고, 사랑도 아름답게 익어갑니다.
ㅡ 가을처럼 아름답고 싶습니다 (이채)
가을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의 등불 하나 켜 두고 싶습니다
가을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진실한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을엔
그리움이라 이름하는 것들을
깊은 가슴으로 섬기고 또 섬기며
거룩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싶습니다
오고 가는 인연의 옷깃이
쓸쓸한 바람으로 불어와
가을이 올 때마다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세월
꽃으로 만나
낙엽으로 헤어지는
이 가을을 걷노라면
경건한 그 빛깔로 나도 물들고 싶습니다
그대여!
잘 익으면 이렇듯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가을뿐이겠습니까
그대와 나의 사랑이 그러하고
그대와 나의 삶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불리는 ‘셰마 이스라일’을 들려줍니다. 유다인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바로 이 “셰마”라는 신앙고백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린다고 합니다. 또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경구갑을 부적처럼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37-39).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십계명에 6백 조항이 넘게 보태어져 실천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도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었던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29)
이 말씀은 먼저, ‘하느님의 존재’ 와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곧 ‘한 분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과 ‘그분의 것, 곧 그분의 소유’의 관계를 드러내며, 바로 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요 바탕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요 이유입니다.
그러니 이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히:아헤브, 희:아가페오)은 본능적 호감과는 구별되는 ‘신실함’과 ‘충성’을 드러냅니다. 곧 ‘온 마음과 온 목숨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모세가 말한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 뿐입니다(레위 19,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44-48).
또한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또한, 나아가서,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신명 6,4-5)과 ‘이웃 사랑’(레위 19,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사랑의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이요,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인 셈이 됩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먼저 ‘형제의 일부’가 되어주는 일로 이루어져 갑니다.
마찬가지로, 좀 더 확장해서 표현해본다면, 내가 형제의 일부가 되고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2,31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웃보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에게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계명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면 계명은 왜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가르치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그래야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할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2023년 38년 동안 중증 장애인인 딸을 돌보다가 수면제를 먹인 뒤에 살해한 60대 어머니에게 법원이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선처했습니다. 검찰은 징역 12년을 구형했는데, 어머니는 최후 진술에서 “버틸 힘이 없었고 끝내자는 생각이었다.”라면서, “딸과 같이 갔어야 했는데 혼자 살아남아서 정말 미안하다.”라고 오열했습니다.
분명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랑이 저절로 솟아나면 부모에게 키워질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사랑은 실체가 없고 개념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더라도 그들도 부모에게 사랑받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없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받아야만 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라하고 하실 때 중요한 부분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그 부족한 부분을 이웃에게 채우려 해서 나중에 본인은 사랑했다고 말하겠지만, 자녀들에게나 이웃에게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최고야 원장의 『벼랑 끝, 상담』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20대 중반에 무역회사에 다니며 이미 팀장의 자리까지 오른 능력 있는 여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는 어렸을 때 항상 부모의 싸움만 보며 자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피해의식이 컸던 엄마가 큰 문제였습니다. 엄마는 모든 분풀이를 딸에게 해대고 있었습니다. 딸이 수학 95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하고 기뻐서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엄마는 그 시험지를 찢어버리며 “내가 이런 점수 보자고 이 고생하며 키웠냐?”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은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죽도록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직장에 취직해서 독립했을 때도 딸을 찾아와 괴롭혔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스트레스가 폭발할 때면 자해하며 풀었습니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어서 남자친구는 쉽게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하던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고 그렇게 많은 남자가 떠나갔습니다. 남자가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해하며 피 흘리는 모습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유일하게 지금 이 남자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었기에 여자는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고야 원장은 그녀에게 남자를 위한 공간을 제공해 달라고 했습니다. 집 안에 텐트를 하나 마련해서 그 안에 남자친구가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자유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잘 됐을까요? 나중에 다 부숴버렸습니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면 남자친구 사랑받아야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것에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이고 지금으로 말하면 ‘십일조’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자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행복한 아내가 되어야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아내의 겨울’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노동으로 하루살이 하던 정호는 경기 침체로 넉 달째 일을 못 나갑니다. 그 남편을 위해 고깃집에서 일하다가 사장이 줬다며 아내가 불고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보다 먼저 남편에게 주었고 그 안에 씹다 버린 껌이 노란 종이에 싸여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자녀 몰래 그 껌을 집어삼켰습니다.
남편은 숫기 없는 아내가 몰래 남들이 먹다 남긴 고기를 모으느라 고생했을 생각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배부르다며 밖으로 나온 남편은 아내의 구두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존재로서 자녀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랑이기에 순수한 사랑이고 그 사랑은 자녀들의 자존감을 높여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이고 그 나라의 행복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미사 마치고 복사들과 함께 제의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대복사를 선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오늘 너무 긴장해서 몇 군데 틀렸다는 것입니다. 전례 때 종종 틀렸다면서 찾아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례는 ‘맞다, 틀리다’의 관점이 아닙니다. 바른 자세와 바른 순서에 따라 바른 전례 예식이 거행되는 것은 우리의 일치와 정성스러움이 드러나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전례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 10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례에서, 특히 성찬례에서, 마치 샘에서처럼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고, 또한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이 그 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이 가장 커다란 효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맞는지 틀리는지의 관점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서 우리 존재가 진정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참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만 기억한다면 틀린 것이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만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판단도 맞는지 틀리는지였습니다. 이 판단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이루어지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틀렸다’라고 말했고,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은 오로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분명히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오히려 그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종교적인 민족이었고 그들은 모세의 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계명을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의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의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힘들었고, 이 조항들을 지키느라 다른 것들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613개의 조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단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종교적인 질문을 예수님께 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 계명의 핵심이고,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맞다, 틀렸다’라는 말로 상대에게 때로는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 전에 사랑의 기준으로 따져보았으면 합니다. 사랑만이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끊임없이 노력하라. 체력이나 지능이 아니라 노력이야말로 잠재력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다.
- 윈스턴 처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올바른 순서가 필요한 계명의 질서이며 실천입니다. 뉘우치는 최상의 깨달음은 다름 아닌 하느님 사랑이며 최상의 실천은 우리가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실천입니다.
하느님 사랑이라는 이 첫째가는 참된 계명을 통해 우리는 삶에 꼭 필요한 절제와 질서를 배워 나갑니다. 사랑은 질서이며 사랑은 생명입니다. 차별이 없으신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올바른 생명의 길로 이끕니다.
마음을 내어야만 사랑도 자랍니다.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사랑은 은총이 되고 축복이 됩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 또한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들의 결단이 절실히 필요한 관계의 질서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리도 혼돈스러운 것은 하느님을 향한 진심어린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성찰하며 진실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아가는 조화로운 사랑의 주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삶의 가장 큰 의미는 사랑이며 사랑은 성찰이 필요한 질서이며 절제입니다. 서로를 구원하는 사랑이 복음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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