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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1/02 (토) 위령의 날 미사 생중계 말씀묵상

by 평화다방 2024.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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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듯이,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예수님과 함께 데려가시리라.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나리라.

주님, 성자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저희의 믿음을 깊게 하셨으니 저희의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고 저희도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굳건한 희망을 지니게 하소서.

2024년 11월 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1월 2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1월 2일
위령의 날
미사 생중계
말씀묵상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위령의 날 첫째 미사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욥기 19,1.23-27ㄴ)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제 2독서
    (로마 5,5-11)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 5,1-12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오늘 말씀 카드
    (4에즈 2,34-35)
    주님,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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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9,1.23-27ㄴ
오늘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로마 5,5-11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마태 5,1-12ㄴ
오늘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2일

위령의 날 둘째 미사
박선용 요셉 신부

 

✚ 위령의 날 소개 00:06

✚ 서울 용산성당 소개 01:23

✚ 미사시작 02:23

✚ 강론시작 11:34

 

 

 

 

2024년 11월 2일 14시 용인성직자묘역
위령의 날 둘째 미사 생중계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신부 집전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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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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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로티회 온라인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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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연옥 영혼을 위하여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어제 천상 교회의 성인들에게 지상의 나그네인 우리 구원을 위하여 전구를 청하였으며, 오늘 위령의 날에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어제와 오늘, 이 두 날에 걸쳐 우리는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 그리고 연옥에 있는 이들이 하나임을 기억하며, 서로 기도해 주고 영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을 온전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그 안에서 서로 온갖 것을 주고받습니다. 

죽음 이후의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교회는 이러한 관계가 세상을 떠난 이들과도 지속된다고 믿습니다.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교리는 이처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이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거룩함을 나누고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나아가고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을 떠나보내고 세상에 남은 이들은 그리움과 더불어, 살아생전에 더 잘해 주지 못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통공의 교리는 우리가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영혼을 기억하며 그들이 평안한 쉼을 얻도록 기도하는 하루로 보내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기도가 더 필요한 죽은 영혼들

잘 아시다시피 어제 모든 성인의 날과 오늘 위령의 날은 죽어 우리를 떠난 영혼들에 관한 축일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그래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같은 복음 곧 행복 선언을 듣습니다. 

그런데 차이점도 있고 그래서 구분하여 축일을 지내는데 그것은 모든 성인은 천당에 가 주님을 직접 뵈옵는 영혼들인 데 비해 위령의 날에 기도하는 영혼들은 아직 천당에 가지 못한 영혼들, 그래서 아직 주님을 직접 뵙지 못한 영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성인보다는 아직 덜 행복한 영혼들이고,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위로가 더 필요한 영혼들입니다. 

그래서일까 모든 성인의 날은 대축일로 지내고 대영광송도 하는 데 비해 위령의 날은 대축일로 지내지 않지만, 하루에 세 번 미사를 봉헌하고, 그것으로 모자란다고 생각되어서인지 11월 한 달을 위령성월로 보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영원한 행복 안으로 들어간 성인들은 현양을 할지언정 성인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성인들의 전구를 우리가 청해야 하고, 아직 영원한 행복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선 우리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전에도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요즘 우리 신자들은 위령기도를 전보다 덜 바칩니다. 이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생미사보다 연미사가 훨씬 적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 몇 가지 이유가 겹쳐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에게 효도보다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큰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상당수의 생미사가 자녀들을 위한 미사라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사랑이 본래 내리사랑의 측면이 있지만 아무튼 요즘 우리의 사랑이 치사랑보다 내리사랑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산 이들은 가까이 있고 눈에 보이는 데 비해 죽은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멀리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서양 격언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가 여기에도 적용되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떠났으니 하느님께 맡긴다는 우리의 믿음 말입니다. 여러 번 제가 말씀드렸듯이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어머니가 저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돌아가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를 제가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야 하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나 죄책감이나 허무감에 매이지 말고 하느님께 어머니를 돌려보내 드려야 한다고 저의 믿음을 산뜻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것이 산뜻하게 ‘정 떼기’하고 ‘사랑 떼기’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통공의 교리와 믿음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은 산이든 죽은 이든 경계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산이와 죽은 이의 경계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고, 사랑이 진실하면 할수록 또 크면 클수록 경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는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저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의 청원기도 지향을 보면 죽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는 소수에 그치고 산 이들을 위한 기도가 대부분이며, 그러다가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모든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뭉뚱그려 바칩니다. 

그러므로 위령의 날인 오늘 저는 두 가지를 다짐하며 기도합니다.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하고 말한 욥처럼 저도 하느님을 기어코 뵈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저를 위해 기도하고 위령기도 또한 더 잘하기로 다짐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나뭇잎들 내내 달려와, 단풍이 되었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입니다. 사라져 없어져가는 아름다움입니다. ‘죽음’의 아름다움입니다. 

단풍! 이토록 아름다운 변색! 그런데 사실, 잎들은 가슴 속 이미 단풍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있었던 것이 드러나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 단풍을 본 것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도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이 드러나게 되는 일일 뿐일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그 죽음을 마주치게 되면, 마치 새로운 사실을 맞은 듯이 죽으면 안 되는 것처럼 반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일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은 당하기 전에는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러나 우리가 눈 감고 지낸다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절대극명의 현실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 우리는 바로 이 현실 앞에서, 이미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죽음’과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봅니다. 

‘죽음’은 참으로 하나의 진정한 만남일 것입니다. 다름 아닌 그분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다가, 마침내 그 희망하던 분과 만나는 바로 그 일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죽음’은 그분과 만나는 통로요, 그분께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욥기>는 바로 이러한 만남의 희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내 살갗이 이처럼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기 19,25-27)

욥은 ‘죽음’에서 하느님을 뵙고 체험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만남의 희망을 보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수도규칙 4,47)

이 가을, 떨어지는 단풍 잎새 하나에서 희망을 봅니다. ‘만남’을 봅니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내안에 이미 있는 ‘죽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미 내 안에 계시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결국 우리는 죽으면서 그분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슬픔을 넘어 아름다운 희망입니다. 

사실, 우리는 ‘영원’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래 영원불멸한 존재인 우리의 영혼이 영원하면서도 영원한 줄을 모르기에 이 세상의 한계와 제한을 통하여 영원한 존재임을 배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악을 보면서야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오늘도 우리는 ‘죽음’을 몸에 달고 다닙니다. 하루하루 죽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새싹처럼, 내 몸 안에서 단풍을, 곧 ‘죽음’을 성숙시켜갑니다. 아니, 영원의 향하여 달려갑니다.

마지막 교부 철학자인 보에티우스(470~524)는 말합니다.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5,1-12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주님!
이익보다 손해 볼 줄을
자신보다 타인을 존중할 줄을
옳기보다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지고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지고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어 지게 하소서.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임을 깨닫게 하소서.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고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홀로
고독할 줄을 알게 하고
진정 당신이 주님 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연옥을 믿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연옥은 무척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성인들은 지옥의 고통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만큼 큰 자비의 행위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은 연옥이 하느님의 자비임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만약 연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 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보다 크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례자 요한보다 완전해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을 친구 생일잔치에 가서 느꼈습니다. 다만 양말이 뚫려 엄지발가락이 나왔을 뿐인데 잔칫상이 마치 지옥과 같았습니다. 창피해서 맛있는 거 먹는 거보다는 집에 빨리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지옥에 가지는 않더라도 양말을 기울 시간을 주어야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실 것입니다. 만약 그럴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핑계를 대든지 잔칫상에 가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연옥이 없으면 감히 성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더라도 연옥에 대한 교리가 약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르틴 루터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지옥이 두려워’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해성사하고 보속을 해도, 죄는 여전히 짓고 보속을 고통스럽기만 하였습니다. 이때 바오로 사도의 행위보다는 믿음이라는 말씀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행위를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일단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어야 해서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 이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처음에는 성경에서 제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믿음의 정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정도면 충분할까요? 우리 믿음은 하느님 자녀, 곧 그리스도처럼 되었다는 믿음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죄를 짓는 법이 있으셨을까요?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행위 또한 완전하셨습니다. 이렇게 연옥을 생각하지 않으면 완전해야만 해서 그 완전의 정도를 낮추기 일쑤입니다. 

전에 전교 1등 하는 고3 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전국 1등을 하라고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아들이 어느 날 성적표를 받았는데 학교에서도 1등이 아닙니다. 아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성적표를 위조하였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알까 봐 자기가 죽느니 어머니를 죽이는 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적표는 실천입니다. 실천이 믿음의 정도를 나타내줍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실천이 나오지 않으면 착각입니다. 그러나 ‘여지’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의고사와 같은 성적표가 필요 없다고 말할 것이고 또한 그 목표를 낮출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전국 1등을 못 하더라도 사회에서 살 수 있을 정도의 공부만 하면 나머지는 다른 것으로 보충하면 될 것임을 압니다. 그렇게 자비로운 여지를 주는 부모 앞에서 아이는 목표를 낮추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실천과 믿음의 균형을 맞추며 나아갈 것입니다. 

한때 조류 인플루엔자나 신종플루, 코로나 등의 전염성이 강한 병이 발생했을 때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혹은 외국에서 들어올 때 체온계 등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이 들어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였습니다. 

죄는 확실히 전염성이 있습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불량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보고 듣는 것들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가 매우 건전하게 크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그런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게 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병이 들었으면 치료될 수 있습니다. 성장하면서 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간을 주어야지, 무작정 완전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식이라면 정말 사랑도 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연옥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연옥을 목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노력을 포기할 필요는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연옥이라는 곳을 만들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진을 멈추지 않게 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날

지난달은 너무나 바쁜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무엇인가에 집중할 일이 생겨서 통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두통도 있고, 피곤함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제 집무실에 있는 너저분한 많은 것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제 집무실에 많은 사람이 오거든요. 그 사람들이 이 지저분한 모습을 모두 보았을 테니까요. 곧바로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지저분한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주 사용하는 것은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습니다. 1~2시간의 정리 끝에 제 마음에 드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계속 가지고 있었던 두통과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병의 원인이 ‘스트레스’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스트레스 대처법의 첫 번째가 ‘방을 치워라!’라고 하더군요. 집이든 직장이든 어수선한 상태가 불안 증대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정리 정돈을 하지 않으니, 불안이 생기고 이것이 스트레스가 된다는 말에 공감됩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기에 힘듦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도 당연히 우리가 따라야 할 것들입니다. 이를 하지 못하니 평화가 없고, 고통과 시련만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일의 우선순위는 즉시 처리해야 할 중요하고 급한 일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냥 삭제하고 무시해야 할 중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에 온 힘을 기울여 스트레스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이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무시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죽음 이후 힘듦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 없이 살면, 주님과 함께할 수 없기에 평화 대신 불안과 좌절만 가득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날, 우리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이 세상 안에서 스트레스 없이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실수하는 것은 인간적이지만, 실수를 고치지 않는 것은 악마적이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죽음을 묵상합니다.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죽음의 평등한 시간입니다.

죽어야 하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죽음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깨닫습니다. 떠남이 있기에 우리의 만남이 있습니다.

삶이 선물이면 죽음도 선물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있던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선물의 여정이며 구원의 여정입니다.

삶을 구원한다는 것은 죽음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의 문을 우리에게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깜박한 죽음을 다시 일깨워주는 은총의 위령의 날입니다.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고 기도합니다. 죽음 속에서도 사랑이 있습니다.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참된 부활입니다.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잇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죽음을 구원으로 지우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삶과 죽음 이 모두를 봉헌합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통하는 진심어린 기도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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