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2024년 11월 6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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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필리 2,12-18)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느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4,25-33)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오늘 말씀 카드
(필리 2,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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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 2,12-18
오늘 제1독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느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늘 순종하였습니다. 내가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지금처럼 떨어져 있을 때에는 더욱더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14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15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 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7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18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너희는 행복하리니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리라.
루카 14,25-33
오늘 복음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6일
이헌준 베드로 신부
✚ 교황님 11월 기도지향 00:23
✚ 미사시작 00:39
✚ 강론시작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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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제1독서에서 바오로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 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는 윤리적으로 왜곡되고 뒤틀린 이 세상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는 것’은 마치 동방 박사를 그리스도에게 안내한 별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요한 17,15-16 참조),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해야 합니다(마태 5,13-16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시류를 거슬러 가십시오.’ 세상 논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고, 세상의 편협한 관점에서 자유로워져 사회의 비판적인 양심이 되라는 말씀이십니다(프란치스코, 제36차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2021.11.21. 참조).
부의 분배, 공무 절차, 사회 갈등, 낙태, 환경, 기후, 전쟁, 난민 등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비인간적이고 물신 주의적인 관점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보통 이러한 시류 안에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맺는 모호한 타협을 거부하고, 시류를 거스르며, 어두운 세상에서 밝게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우리 안에서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라고 바오로는 얘기하는데 이백 주년 성서에서는 ‘의지’ 대신에 ‘원의’라고 번역하고, 이전의 공동 번역 성서는 ‘할 마음’이라고, 영어는 ‘to desire’라고 번역합니다.
제가 다른 번역을 얘기하는 것은 ‘의지’보다는 ‘할 마음’이나 ‘원의’로 번역함이 낫겠다는 제 생각을 얘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오늘 얘기는 ‘하느님의 호의’와 ‘우리의 원의’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호의에 따라 우리의 원의를 일으키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실제로 원의를 일으킵니까?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우리는 주님을 따르려는 원의를 가지느냐는 말입니다.
살다가 보면 우리는 모든 호의를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누가 호의를 베풀어도 거절하는 경우가 적지 아니 많지요. 누구의 호의는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호의는 싫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애초부터 부담스러운 사람은 하느님의 호의를 따를 생각이 아예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의 호의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을 호의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꽤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하느님은 믿어도 예수는 싫은 사람이 그럴 겁니다. 싫고 좋음을 떠나서 무관심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그럴 겁니다. 어제 복음에서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자기가 장가들어서 응하지 않고, 겨릿소를 부리러 가야 하기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따르지 않는 더 큰 이유는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주님을 따를 때 요구되는 것들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 자녀와 아내 곧 가족과 자신마저 미워하면서,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면서 따르는 것이니 그 호의는 더더욱 따를 원의가 없겠지요. 그러므로 당신의 호의에 따라 주신다고 하는데 하느님의 호의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겁니다.
그러니까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단것을 주는 부모는 없고,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단것을 주는 것은 호의도 선의도 아니듯이 하느님의 호의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이며 그 호의에 따라 우리에게 베푸시기에 우리의 호불호가 바뀌어야 합니다.
장가가기보다 천국 가기를 더 좋아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의 호의에 우리의 원의를 맞추고 입맛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싫고 그래서 원치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 세 가지
오늘날,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하나”라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것을 무엇일까요?
마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케케묵은 말이 되어버린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단지 그들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떨어진 것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종 권위가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의 권위’의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게 된 것일까요? 혹 자기 자신이나 재물이나 이윤추구가 차지한 까닭이 아닐까요?
가치관이 변해버린 이 시대에 우리는 대체 어떤 이를 스승을 모시고 싶어 할까요?
또한 무엇을 배우기를 바라고 있을까요? 참된 진리를 배우고자는 할까요?
오히려 이익을 추구하는 방편을 배우고자 열을 올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대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앞세워’ 배우고자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그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개의 동사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릅니다.
<첫째 동사>는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μισει)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지하거나 적대시 하실 리 만무합니다.
결국, 세상의 일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 중에 더 궁극적인 가치를 앞세우고 더 우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앞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한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βασταξω)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짊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짊을 덜어주시기는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와 함께 오라는 말씀이요, 십자가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αποτασσεται)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의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자신을 버리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 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으로 ‘바치다.’, ‘가납하다.’를 뜻합니다. 쓸 데 없거나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향하여’ 봉헌하는 것이요, 가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오니 주님, 제자인 저희가 당신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무엇보다 앞서, 항상 당신을 앞세우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4,27
~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처음부터 일부분만 버리기로 작정하며 시작한다면?
오늘 복음에서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나옵니다. 바로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소유를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순종’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면 제자가 될 수 없고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자기 소유입니다.
며칠 전에 성령 기도회 때 수원교구 윤민재 베드로 신부님이 하신 강의 중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제 기억이 올바른지 모르겠지만,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어떤 자매가 병자성사를 달라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혈액암을 앓고 있는데, 재발하면 의사가 80% 이상 사망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발한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 자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에겐 누군가를 향한 깊은 미움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을 만나면 상해를 입히려고 옷에 칼도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런 상황에선 병이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며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고 미사도 넣어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재발한 암이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의사도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다시 찾아왔다고 합니다. 혈액암은 치료가 되었지만, 그분은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에게 약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수술을 한 번 더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병자성사를 다시 달라고 온 것입니다.
신부님은 약을 그냥 먹으면 되지 왜 굳이 수술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수술하려면 한 달간 무균실에 있어야 하는데 거의 죽을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건 아픈 게 아니니 병자성사는 줄 수 없고 안수만 하고 보내드렸습니다. 그분은 고집을 부리며 수술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성당에서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다른 성당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수술하였는데, 암이 세 군데로 전이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신부님께 와서 신부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죄송하다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다시 병자성사를 주었고 신기하게도 그 자매는 며칠 뒤 사진을 찍었는데 암이 다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교회에 순종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면 은총이 주어집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성당에 다닐 것이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순종할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소유를 다 버릴 수 있을까요?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을 없애야 합니다. 이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소유할 수 있는 주체인 내가 죽으면 됩니다. 아니 죽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악이요 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윤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을 자려고 하면 흰 뱀 2마리가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분의 말을 잘 들어보았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분이 미워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죽은 시어머니와 얼마 전에 돌아가신 남편입니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아내의 버릇을 고치도록 두들겨 패게 시켰다고 합니다. 남편은 지게 작대기로 아내를 때렸고 아내의 허리가 다쳤습니다. 아내는 남편도 밉고 시어머니도 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그분들을 용서하고 미사를 넣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잠을 편안히 잘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된 존재이고 나의 판단은 항상 옳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진리이시고 우리는 거짓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으려면 죄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내가 그분과 온전히 일치하려면, 나 자신을 죄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습니다. 만약 나에게 좋은 게 있다고 여긴다면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제자가 되고 싶다는 이들에게 배추를 거꾸로 심고 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들만을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루르드에서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구정물로 얼굴을 씻고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 일을 시키실까요? 우리 자신의 판단은 무조건 틀린다는 믿음, 나의 스승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이 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럴 수준이 아닌데도, 어떤 분은 저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하.사.시., 7기도, 성체조배 매일 1시간을 1년 동안 빠지지 않고 할 수 있다면 그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연히 하지 않았습니다. 스승은 언제나 옳아야 합니다. 우리의 스승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상황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설날에 네 살짜리 조카가 할아버지에게 두 손 모아 세배하는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손녀딸이 귀여웠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세뱃돈으로 만 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받지 않고 머뭇거리는 것입니다. 저자인 고모는 조카에게 “할아버지가 주시는 거니 ‘감사합니다’하고 받으면 돼.”라고 말했는데 조카는 딴청을 피우다가 고모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고모, 나 저거 집에도 있거든.”
만 원짜리 지폐가 집에 있으니 받을 필요가 없다는 꼬마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린이가 행복하다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만족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미사 후에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줍니다. 아이의 부모는 미사가 끝났으니 얼른 집에 가고 싶은데, 아이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사탕 받아야 한다며 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탕도 아닌데도, 이 사탕을 받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진짜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의 것임을 깨닫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요? 지금의 자리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습니까? ‘더~ 더~’를 외칠수록 하느님 나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데, 계속해서 ‘더~ 더~’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이 말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껏 살면서 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이런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고 하면서, 주님을 제일 마지막 자리에 놓는다면 결코 만족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비롯한 모든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過猶不及)
- 논어 선진 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비움의 시간입니다. 가볍게 내려앉는 단풍의 겸허한 모습입니다.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을 우리는 잊고 살았습니다. 소유는 자기 소유를 결코 보지 못합니다. 소유를 다 버리는 것에서 다시 시작되는 생명의 삶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방향이 예수님을 따르는 올바른 방향입니다. 버리고 비워야 가볍게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버리는 것이 절실한 우리의 기도입니다. 짧은 삶을 살면서도 버리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의 순리는 버리는 것이며 비우는 것이 삶의 성장입니다. 단풍잎을 떨구어 내는 나무들의 모습에서 하나되는 행복이란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하느님과 하나되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을 향하는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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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1.05 |
24/11/04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1.04 |
24/11/03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1.03 |
24/11/02 (토) 위령의 날 미사 생중계 말씀묵상 (0) | 2024.1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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