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2024년 11월 8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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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필리 3,17―4,1)
우리는 구세주를 고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6,1-8)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 오늘 말씀 카드
(필리 4,1)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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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 3,17―4,1
오늘 제1독서
우리는 구세주를 고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
루카 16,1-8
오늘 복음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8일
전호준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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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주님의 재산을 잘 사용하는 법
약은 집사의 비유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집사의 행위는 그 목적과 과정과 결과 모두 부당해 보이고, 이 부당한 행위에 대한 부자 주인의 칭찬에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나 재산 사용에 관한 가르침으로 다가가 본다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집사는 우리를 뜻합니다. 집사가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재산을 관리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과 능력은 우리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잘 관리하고 적절하게 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산을 아무 계획 없이 그대로 두거나 자신만을 위하여 쓰는 것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재산은 그분의 영광과 세상을 위하여 쓰여야 합니다. 집사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재산을 가지고 자신을 위하여 쓰다가 쫓겨날 위기를 맞았지만, 나중에는 이웃을 위하여 쓰면서 칭찬을 받고 그 자리에 계속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은 집사에게서 주님의 재산을 잘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곧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재산이 그렇게 쓰이기를 바라십니다. 집사에게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당장에는 집사에게 고마워하겠지만, 결국 그 재산의 원주인인 부자에게 더 고마워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은 이들은 은혜를 베푼 이에게 먼저 고마워하겠지만, 결국 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께 찬미를 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선행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십자가의 원수? 벗?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바오로는 오늘 십자가의 원수에 대해 언급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라! 십자가의 원수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원수가 있다면 십자가의 벗도 있나요?
십자가의 원수와 벗에 대해 생각하니 반성부터 됩니다. 저의 주보인 레오나르도 성인이 지금의 14처 십자가 길을 널리 보급한 분이기에 저는 수련 때부터 십자가 길에 대한 신심이 있었고 자주 십자가 길을 하였고, 적어도 한 주일에 한 번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을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십자가의 길을 거의 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예전의 저는 십자가의 벗이었고, 지금은 십자가의 원수인가요?
그런데 이런 지금의 제가 무척 부끄럽긴 해도 십자가의 원수는 아닙니다. 십자가를 원수로 제가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가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지 않으면 나는 십자가의 원수가 아닌 건가요? 사람 간에 관계를 예로 들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그를 원수로 생각지 않지만, 그는 나를 원수로 생각할 수 있잖아요? 장난삼아 개구리에게 돌을 던질 때 나는 개구리를 원수로 생각지 않지만, 개구리는 나를 원수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같은 논리로 나는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지 않지만 나는 얼마든지 십자가의 원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십자가 삶 그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살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런 뜻에서 십자가의 원수, 그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또는 이 세상 즐거움이랄까 쾌락이랄까 이런 것들을 즐기는 사람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아무튼 종합하면 나는 십자가를 원수로 여기지 않지만 실제로는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 또는 ‘그들’이라고 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마침 금요일이네요. 그리스도 십자가의 벗이 되겠다는 뜻으로 오늘은 제가 오랜만에 십자가 길을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 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줍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곧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사이에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6,3-4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제가 박해당하면 우리 신자들은 나를 숨겨줄까?
오늘 복음은 약삭빠른 집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재산은 ‘성령’입니다. 하느님은 청하는 이들을 당신 집사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을 청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성령으로 이뤄지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 곳에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다양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약삭빠른 집사처럼 된다면 하느님은 그들을 당신 집사로 계속 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기 전의 집사처럼 한다면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사제가 되어보니 신자 중에서도 성령의 은총을 약삭빠르게 잘 사용하는 집사가 있는가 하면 낭비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이 일을 더 할 수 없을 때 드러납니다.
만약 제가 사제를 더는 하지 못하게 될 때 저를 맞아줄 신자들이 있을까요? 갑자기 자신이 없어집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는 신자들이 대부분 성직자를 죽이기 위해 찾았습니다. 그만큼 은총의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중세 교회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소설이 있습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중에 ‘종교 재판관’ 부분입니다. ‘대심문관’이라고도 불립니다. 대심문관은 당시 종교 재판으로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고위 성직자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상으로 돌아오시다가 대심문관을 만나 갇혀서 재판받는 형식을 취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마지막에 대심문관에게 마치 유다가 당신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입을 맞춥니다. 이 상징적 행위는 목매달아 죽은 유다처럼 종교가 죽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심문관은 예수님의 죄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기는커녕 그것을 더 늘렸고, 인류의 영적 왕국에 영원히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자유로운 사랑을 바라시어, 사람이 자유롭게 당신을 따르며 당신에게 유혹당하고 포로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청지기가 바로 예수님처럼 해야 했습니다. 자유가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고마워서 자유롭게 자신을 받아들일 친구를 사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심문관은 종교는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되고 통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빵에 대한 유혹을 이긴 것을 비난하면서 중세 교회의 부유함을 통해 인류를 교회가 배를 불리게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우리 발 앞에 놓고 우리에게 ‘우리를 너희의 노예로 삼아 먹이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자유와 빵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자비는 행사되어서는 안 되며 종교 재판처럼 종교가 강한 힘으로 그들의 자유를 빼앗아 줄 때 그들은 신비로운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들이 쫓겨났을 때 자신들을 자유롭게 맞아줄 사람들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닌 자신들에게 완벽히 통제되는 사람들로 만들려는 시도이고,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일부 성직자가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은총을 관리하는 집사는 자신이 사제라면, 만약 사제 옷을 벗었을 때 자신을 맞아줄 사람들을 만드는 사람과도 같아야 합니다. 만약 자유를 빼앗는 존재였다면, 그들이 그를 맞아들여야 하는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 자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그를 받아줄 리가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는 성직자들이 얼마나 신자들에게 못되게 굴었는지 오히려 그들을 찾아내어 신자들이 죽이려 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를 생각해 봅시다. 박해받는 땅에 처음으로 들어와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신자들의 노력은 대단했습니다. 평신도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가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사제복을 입고 대신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쫓기는 주문모 신부를 목숨을 다해 보호한 강완숙 골롬바도 있습니다. 그가 체포령이 발효된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수많은 가족이 다 위험할 수 있어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목숨을 걸고 은총을 신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러니 신자들도 주문모 신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신도들도 은총을 받으니 은총의 관리자입니다. 박해 시대가 되었을 때 자신을 숨겨줄 친구를 그 은총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청지기만이 끝까지 주인이 칭찬해주며 자신의 집에 살게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수많은 나라를 전쟁으로 정복했고 여러 번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권력을 굳건히 했습니다. 그 뒤에 그가 한 것은 무엇일까요? 불로장생의 영약을 찾았습니다. 비슷한 영약이 있다는 희미한 소문만 들려도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문제는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면 처형당했으므로, 그 특사들은 소식을 끊고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불로초를 찾지 못한 그가 선택한 것은 진시황릉입니다. 황제는 무려 70만 명을 동원해 시안에 도시 하나 크기의 무덤을 건설합니다. 무덤에서는 흙으로 만들어 구운 병사와 말 모형이 7천 점이나 발견되었습니다. 황제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호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죽지 않으려 했고, 또 죽음을 대비했던 그 역시 기원전 210년, 49세의 나이로 죽고 맙니다. 역설적인 것은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먹은 온갖 독성 물질 때문에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꾸준히 복용했던 것이 ‘수은’이라고 하지요. 이 수은에 장기간 노출되면 우울증, 의욕 상실, 졸음 등 정신장애를 동반하고, 심할 경우 환각, 정신착란, 기억상실 등으로 이어집니다. 진시황제가 말년에 보였던 모습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해서 피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닙니다. 죽음 역시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을 잘 사는 것입니다. 지금을 의미 있게 살아갈 때, 죽음 이후의 미래도 의미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을 소홀히 하면, 죽음 이후의 미래는 없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직하지 못한 집사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재산을 낭비하였을 뿐 아니라, 주인에게 쫓겨나게 되자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려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몰래 깎아 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가 영리하게 대처했다고 칭찬합니다. 바로 현재를 늘 미래와 연결해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을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이 될까요?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만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자기 욕심 채우는 것만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너머의 세상을 위해 지금을 잘 사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영리하게 대처했다고 칭찬받을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하늘 나라의 가치와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사소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큰 불행으로 발전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 알랭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마음은 있어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변화가 필요한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몰락과 멸망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단절은 없습니다.
닫히면 다시 열리는 것이 우리들 삶의 모습입니다. 모든 만남에서 우리는 삶을 배웁니다. 가장 큰 삶의 아픔은 관계의 결핍입니다. 관계의 결핍으로 삶을 망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 안에서 길을 찾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까지도 당신께 내어놓기를 바라십니다. 이와 같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잘라내도 다시 자라는 잡초처럼 더 영리한 것은 사람을 얻는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든 것에서 배우고 익히며 성장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이 시간을 가꾸어 나가는 빛의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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