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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1/07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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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2024년 11월 7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1월 7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1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필리 3,3-8ㄱ)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5,1-10)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오늘 말씀 카드
    (시편 105,3)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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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 3,3-8ㄱ
오늘 제1독서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기야 나에게도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는 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루카 15,1-10
오늘 복음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7일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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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는 버림과 포기라는 말이 없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가는 목자는 그리 좋은 목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한 마리의 양을 위하여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둔 무책임한 목자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속성’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자 하며, 단 한 마리의 양도 버리시거나 포기하실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백 마리를 돌볼 때 한 마리쯤 잃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어쩌면 아주 작은 기회비용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버림과 포기라는 말이 없으며, 그분께 한 마리를 잃는다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놓아두시는 분이 아니라, 단 한 마리도 포기하시지 않고 모두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이 비유는 버림받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 이야기가 아니라,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이야기입니다. 어쩌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 가운데 또 다른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주님께서는 곧바로 그 양을 찾아 나서실 것입니다. 이는 아흔아홉 명의 구원을 배제한 채 특정한 한 명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주님의 구원 의지에서 멀어질 수 없음을 뜻합니다.

우리도 길 잃은 영혼 하나를 찾으러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한 영혼을 포기하고 배제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공동체보다, 불편하고 고생스럽더라도 한 사람의 회개를 이끌고 그것에 기뻐하는 공동체를 바라십니다. 그런 공동체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과 닮았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형제 여러분, 나는...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것이 바오로 사도에게는 지고의 가치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고도 다른 지식이 많다는 뜻이고, 실로 다른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사람을 옛날 우리 수도원에서는 백과사전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ChatGPT라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한 형제를 만났는데 저는 이 형제를 통해서 ChatGPT를 처음 경험했습니다. 

그때 오늘 독서에서 얘기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뭐냐?’라고 물었더니 1초도 안 지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며, 자기의 삶이 변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지식은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서는 영적 경험과 관계의 발전으로, 이를 통해 신앙인들은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새롭게 하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을 키워가게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저는 너무도 놀랐습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놀랍기도 했고 1초도 안 되어 답을 제공하기에 더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잡다한 정보의 습득이 아닙니다. 제가 옛날에 그 ‘백과사전 형제’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존경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그 쓸데없는 지식을 왜 그리 많이 모으고 있고 모아놓고 있느냐? 그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지혜 곧 하느님을 많이 알아야지 그런 것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쓰레기들을 내 머리 안에 수북이 쌓아놓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던 것인데 실제로 그 형제는 얼마 안 있다가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실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많이 알아야 하고 하느님을 많이 사랑해야지 그러지 않고 다른 걸 많이 아는 것은 쓰레기를 많이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다른 지식은 쓰레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데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론을 아는 것입니다. 

앞서 얘기한 ChatGPT도 그리고 악령들도 그리스도론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정보의 습득을 넘어서는 영적인 체험과 관계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잘 알지만 ChatGPT 자신은 하느님 사랑과 은혜를 체험치도 않고 관계도 발전하지 않지요. 

프란치스코가 권고에서 얘기하듯 악령들도 천상과 지상 일을 얼마나 잘 압니까? 

신학자를 수백 수천, ChatGPT를 수백 수천 합쳐놓은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있어도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있냐고 하는 것이 악령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바오로처럼 그것을 통해 인생이 바뀌어야 하고,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의 원수였던 바오로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요 종’이라고 자기의 모든 서간에서 자신을 소개하지요. 

이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진 우리는 다른 것들은 쓰레기로 여기는 한편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하느님 사랑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는 죄인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한 죄인 하나를 두고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 속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여인 역시 ‘잃은 드락메’를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이는 잃은 것을 찾으시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과 또한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잃은 것을 되찾은 후에,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라고 말씀하심은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되찾은 후에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베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고, 은전 한 드락메를 잃어버린 슬픔이 마치 열 드락메를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슬펐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백 마리의 양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고, 은전 한 드락메를 되찾은 기쁨이 마치 열 드락메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들을 맡기신 아버지께 대한 ‘충실함’이요, 드락메를 결혼의 징표로 주신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한 ‘신의’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안에서의 전부인 사랑’, ‘전부 안에서의 하나인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전 인류를 구원하신 전부인 사랑입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당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쁨이요, 재회의 기쁨이요,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요한복음 사가가 말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요한 15,2)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9,10)는 당신 자신의 소명과 행위를 옹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찾고 계시는 음성, 곧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6) 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목숨까지 바치신 당신의 외아들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었던 양을 되찾기 위해 광야를 쫓아다니며, 잃었던 은전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목자의 사명도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도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신 이 큰 기쁨을 형제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5,6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회개한 양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와 은전 하나를 찾아 마을 사람들에게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하는 어떤 부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 사람의 회개는 하느님을 정말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1967년 8월에도 온 국민이 한 사람의 생명이 살아난 것 때문에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창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새마을 운동을 강조하던 시절 충남 청양 구봉 광산에서 김창선 광부가 수직갱도의 붕괴로 120미터 아래에 갇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곳에는 전화가 있어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됩니다. 

언제까지 버틸지도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해 열악한 장비로 수많은 사람이 투입되어야 하고 막대한 돈이 들어야 하는데 구조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냐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전 국민에게 그 가족들이 나서서 자신들의 남편이자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제쳐놓고 구출작업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2,200여 명이 구조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김찬선 씨는 떨어지는 물방울을 옷에 묻혀 그 옷을 씹으며 15일을 버텼습니다. 그가 절망에 빠질 때 가족들은 온 국민이 기도하고 있다고 힘을 주었습니다. 16일째 극적으로 구조되었고, 이는 갱도 밑에서 세계에서 가장 최장 시간을 버틴 기록이 되었습니다. 구출 당시 김 씨는 건강도 정신도 또렷한 상태였습니다. 

이 일로 대통령은 물론 온 국민이 기쁨을 누렸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서? 그럴까요? 그래서 기쁠까요? 애초에 대부분은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사실 4일째 되는 날 김창선 씨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그를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면 왜 기쁜 걸까요? 내가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2,200명과 엄청난 돈을 투입해 살려낼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나도 저런 처지가 되면 나를 똑같이 구해줄 나라에 산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한 나라가 하느님 나라가 되는 방법은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목자들이 많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를 영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을 모실 성전이 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되지 못한다면 나는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게 아닙니다. 

의인 아흔아홉은 적어도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게 행복한지 아는 회개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주인에게 사명을 받은 목자만이 주인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는 돌아오는 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파견받는 목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하라는 뜻으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냥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목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 머무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회개는 양이 아니라 목자가 되게 합니다. 

내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양이 되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창선 씨도 1982년 매몰 14일 만에 생존한 태백 탄광 사고 생존자들을 찾아가서 힘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김창선 씨의 사례를 보고 버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김창선 씨는 말합니다. 

“죽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내 목숨 하나가 그토록 소중한 거라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 이야기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복자품에 오른 바로톨로 롱고(Bartolo Longo)의 이야기입니다. 바르톨로는 나폴리 대학에 다니는 동안 가톨릭 신앙에서 멀어졌습니다. 반가톨릭 교수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교회에 대한 그들의 회의주의와 경멸을 흡수했습니다. 그의 호기심으로 인해 그는 강령술에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사탄 숭배에 가담하게 되었고 심지어 강신술의 ‘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그에게 명확성이나 진실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괴로운 환상과 악몽과 함께 끊임없는 공포, 어둠, 깊은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신비술 수행을 계속했고 점점 더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폼페이에서 일어났는데, 그곳에서 바르톨로는 절망과 자살 충동에 압도되어 사탄과의 계약의 결과를 반성했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부가 하느님께 봉헌된 것처럼 사탄의 신부로서 마귀에게 속박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자신이 영원히 저주받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믿음과 씨름했습니다. 바르톨로가 갑자기 묵주기도에 관해 들었던 약속, 즉 “묵주기도를 전파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입니다.”라는 약속이 기억난 것은 바로 이 강렬한 암흑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기억은 그에게 희망의 불꽃을 가져다주었다.

감동에 사로잡힌 바르톨로는 땅에 엎드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약속이 참이라면 묵주기도 신심을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오랫동안 느꼈던 고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깊은 평화의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삼종기도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여 이 은총의 순간을 더욱 확증해 주었고 바르톨로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찾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즉시 도미니크회 신부인 알베르토 라덴테(Alberto Radente) 신부를 찾았고, 그 신부는 그에게 영적인 지도를 제공했고 결국 그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정기적인 모임과 기도, 참회를 통해 바르톨로는 묵주기도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한 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신비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돕는 사명을 발견하면서 교회와 화해했습니다.

바르톨로의 개종은 너무나 심오하여 남은 생애를 묵주기도에 바쳤고, 궁극적으로는 폼페이에 유명한 묵주기도의 성모 성당을 짓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들을 위한 자선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삶은 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 은총의 구원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곡한 존 뉴턴 사제는 처음엔 노예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고는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제가 되어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목자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아 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 죽어가는 이들을 두고 풀만 뜯는 양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양이 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젠 길 잃은 양을 살리는 목자가 되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갑곶성지에 있을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부활 시기였는데, 한 순례객이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제게 오셨습니다. 
 
“성지까지 왔으니 십자가의 길을 하자고 일행에게 말하니, 한 분이 부활 시기에는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시기라서 십자가의 길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세요. 전에도 부활 시기에 와서 십자가의 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잘못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례 주년은 신자들의 신앙을 위한 것으로, 한 해를 보내며 구원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돕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삶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며 지금 열심히 살아서 다가올 종말을 향해 신앙의 여정이기에, 부활 시기에도 주님 고통과 죽음을 묵상하고, 사순 시기에도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이야 제게 물어봐서 해결되었지만, 많은 분이 모두 사순 시기에만 십자가의 길을 해야 한다는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앎이란 정말로 중요합니다. 자기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은 전혀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기들의 관습만이 옳다면서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인데, 그들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음식을 먹는다면서 죄인 취급을 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과 은전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 말씀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과 되찾은 뒤에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으니 심지어 하느님을 단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앎은 과연 어떤가요?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 사랑에 반대되는 말만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잔치를 벌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겸손의 마음으로 사랑에 집중하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내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자정이 되면 내일은 매우 깨끗한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매우 완벽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와 우리 손으로 들어온다. 내일은 우리가 어제에서 뭔가 배웠기를 희망한다.

- 존 웨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잃어버린 하나를 찾기위해 친히 나서십니다. 잃어버릴수록 간절해지는 소중한 관계이며 소중한 구원입니다.

잃어버린 것이 소중함의 또 다른 중심이 됩니다. 잃었던 하나를 되찾는 것이 하느님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참된 사람의 길을 만납니다. 죄인 하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떠난 우리를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끊어진 길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가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울 때 하느님께서도 우시고 우리가 기뻐할 때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십니다. 이 기쁨으로 우리의 삶은 진정 아름답습니다.

함께 기뻐하는 우리가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한 사람을 다시 찾고 다시 얻는 기쁨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돌아오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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