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2024년 9월 1일 연중 제22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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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신명 4,1-2.6-8)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는 안 된다. 주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 제 2독서
(야고 1,17-18.21ㄴ-22.27)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 오늘 복음
(마르 7,1-8.14-15.21-2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오늘 말씀 카드
(야고 1,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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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 4,1-2.6-8
오늘 제1독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는 안 된다. 주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6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7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8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야고 1,17-18.21ㄴ-22.27
오늘 제2독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21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네.
마르 7,1-8.14-15.21-23
오늘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1일
반유성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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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들음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들음에 대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실천하면 다른 민족들이 그들을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하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머리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할 때보다, 하느님께서 이것이 바른길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을 따라갈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판단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온갖 좋은 것은 위에서 온다고 하며, 공손히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공손함, 그것은 신명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서 더 좋고 더 옳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우기지 않고 하느님의 생각에 순응하는 것이 공손함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느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전통은 바꿀 수 없다고 여기고,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올 여지를 남겨 두지 않습니다.
열왕기 상권 3장에서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청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듣는 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고, 우리에게는 이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이 더 지혜로움을 인정할 때,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일치하지 않거나 내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이 더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며 그 지혜가 이끄는 대로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두려워서 하지않고, 사랑으로 하는 우리
직장 상사가 하라는 것은 군소리 없이 하지만 엄마에게는 함부로 말하면서 엄마의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조폭의 막말은 꼼짝못하고 들으면서 아버지의 말은 가볍게 넘긴다. 우리가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왜 이럽니까?
그것은 사랑으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더 풀이하면 사랑으로 하는 말을 사랑으로 듣기보다 강압으로 하는 말을 두려움 때문에 듣기 때문입니다.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고 흔히 말하는데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걸 뒤집으면 법은 주먹보다 멀며, 사랑은 법보다 멀고 주먹보다는 더, 더 멉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아주 가까이 계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그렇다면 하느님은 다른 누구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가까이 계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 하느님보다 주먹을 더 가까이 느끼고 법이 더 가까이 있는 것이며, 사랑의 말보다 주먹의 말을 더 잘 듣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모이고 하느님이십니다. 조폭은 결코 우리에게 가까이 있지 않고 우리에 관한 관심이 도무지 없습니다. 사실 관심이 없다면 관계도 없는 것이고 관계가 없다면 그것이 제일 먼 것이지요.
이렇게 조폭은 우리에게 관심도 없고 멀리 있지만 우리는 되레 두려움 때문에 주먹을 가까이 느끼며, 그의 말을 듣는데 이것이 다 우리의 미성숙과 약함 때문입니다.
사실 미성숙하고 약한 사람이 사랑보다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사람에게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고 요한의 서간은 충고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중요시한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들은 얘기이기도 하고 저도 경험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오래된 본당 그래서 전통이 있고 뼈대가 있는 본당에 사제가 새로 가면 그 본당 신자들은 본당 사제보다도 본당 원로들 눈치를 더 본답니다.
그래서 신부가 새로운 사목을 펼쳐도 그리고 사목회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원로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신자들이 달리하기에 신부들이 애를 먹고, 심지어 교무금을 더 내고 싶어도 원로가 적게 내면 그보다 적게 낸다고 합니다.
아무튼 미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만만히 보고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인 우리는 두려워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빛 안에서 실천하고 진리 안에서 사랑하기
그 무덥던 찜통더위도 물러가고, 그 세찬 바람과 매섭게 퍼붓던 비도 그치고, 9월의 드높은 하늘의 가을입니다. 연중 2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율법의 올바른 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율법을 주면서 보여주신 사랑과 지혜를 생각하라는 모세의 따뜻한 권고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그것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신명 4,5-6)
모세는 이스라엘은 주님의 법을 지켜 다른 민족에게 하느님 사랑과 지혜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법을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과 축복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우리의 실천이 참된 실천이 되기 위한 식별기준을 밝혀줍니다.
<첫째 기준>은 그것이 “위에서, 곧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인지를 보는 것이다. 이를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야고 1,17)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인간애를 포함하면서도 초월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민주주의가 인류를 구원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둘째 기준>은 그것이 말씀의 원리를 따르고 있는지, 곧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야고 1,21)
왜냐하면, 바로 “그 말씀에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야고 1,21). 그러니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라고 말하며,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율법과 말씀의 올바른 실행’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정결법 논쟁을 통해 말해줍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나이 율법을 십계명의 성문율법 외에도 구두율법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613개로 확대하여 지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조상들의 전통’을 겉으로는 지키면서 자신들을 거룩하게 여기는 반면, 그렇지 못한 이들, 곧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을 “저주받은 사람들”(요한 7, 49)라고까지 하면서 족쇄를 씌워 짐 지우고,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척하면서 다른 이들이 그분을 따르는 것마저 막았습니다(마태 23, 1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8)
그러고 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이 나온다.”(마르 7, 14-2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의 올바른 실천’을 가르쳐주십니다. 사실, 참된 실천은 법의 원칙에 대한 외면적 준수가 아니라, 법의 근본정신에 맞게 사는 내면적 삶과 추종입니다. 곧 마음과 행실의 상관관계를 말해줍니다.
이를 흔히 우리는 ‘수행’이란 말로 사용합니다. 행위를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행위를 닦는 일은 그 행위를 유발시키는 뿌리인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행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입니다. 바로 그 나쁜 생각이 사람을 더럽히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니 ‘겉이 아니라 속을 사랑으로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그렇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실천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실천하더라도 ‘참된 실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아무 것이나 실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생각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전통’을 따라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진정 중요한 것은 실천하더라도 ‘빛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요, 사랑하더라도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7,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마음을 빼앗기는 법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알 바꿔야 거룩해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음은 원하고 믿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자기가 신이라 믿고 소유하고 먹고 이기는 데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 마음을 없애고 당신의 마음을 넣어주는 일이 구원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 36,26)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에서도 개구리처럼 착해지고 싶었던 전갈이었지만, 정작 수영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자기를 태워주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이고 자신도 죽습니다. 마음으로 자신이 전갈이라 믿고 있으면 아무리 개구리처럼 살려고 하더라도 전갈의 본성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믿는 대로 이뤄집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믿으면 마음이 고쳐집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는 어떻게 자기 마음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김 씨는 회사에서 잘리고 애인과도 헤어졌는데 빚 독촉도 심해지자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런데 한강 밤섬에 표류합니다. 표류한 김에 사는데 다른 사람 간섭 안 받고 혼자 사는 삶이 즐겁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자기의 마음이라는 섬에서 자신이 왕입니다. 그리고 생존에 집중합니다. 김 씨는 짜파게티 봉지를 보고 그것을 만들어 먹고자 합니다. 그를 지켜보던 극도의 대인기피증으로 방 안에서만 살아가는 김정연이라는 여자가 김 씨를 사진기로 보고는 그 섬까지 짜장면을 시켜줍니다. 김 씨는 짜장면을 거부합니다. 그것을 받으면 간섭받아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농사지어서 결국엔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허무함과 그 달콤함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는 중에 여자 김 씨와 소통하며 조금씩 관계를 쌓아갑니다. 결국 섬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는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 김 씨도 집 밖으로 나와 남자 김 씨에게 달려옵니다. 이제 둘은 서로의 섬이 되어줍니다. 갈 곳이 생기자 이제 이전의 자기를 지배하던 섬, 곧 마음을 버리고 탈출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마음을 빼앗겨야 합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방법은 피를 받음으로써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줍니다. 자녀는 마음으로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마음 안에서 살지 않고 부모의 마음으로 삽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일을 하려 하고 마음 아픈 일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의 세계로 성장하며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고 조금씩 하늘 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예수님께 계속 마음을 빼앗깁시다. 그분의 마음으로 구원될 것입니다.
전래 동화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는 나무꾼에게 자기 옷을 빼앗겨 아기까지 낳습니다. 미안한 선녀에게 옷을 내어줍니다. 선녀도 아기 둘을 데리고 올라와 나무꾼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고안하여 나무꾼을 하늘로 불러올립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서로 마음을 빼앗기는 관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당신은 왜 변하지 않느냐?
부부싸움에서 가장 큰 원인은 “당신은 왜 변하지 않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남편에 대한 불만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이 모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물으니, 결혼과 동시에 그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결혼하신 지 40년이 넘으셨으니, 40년 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소연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쭤보았습니다.
“40년 넘게 변하지 않으셨는데, 과연 남편분께서 변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의 불만족은 상대가 달라지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커집니다. 상대의 변화를 바라는 것,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자기 배우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히 이기적인 감정이지만 피하기 어려운 마음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변하면 자기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그래서 이기적인 감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이 변화로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40년 넘게 유지했던 자기 모습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변하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자기가 불행이라는 틀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사랑만을 이야기하시고 당신 삶으로 직접 사랑을 보여주셨던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행복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께 변화를 요구합니다. 제발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서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단순히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행위보다 깨끗하고 흠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의 전통과 관습 위에 있습니다. 당연히 하느님 섬기는 행위가 손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자기와 다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다름 아닌 바로 일의 계획과 방향을 세우는 인간의 의식에서 나온다고 하시면서 진정으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제2독서의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1독서 신명기 말씀처럼, 오로지 주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자기의 진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강한 나무는 가장 유연한 나무이다.
- 노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하느님을 섬기고 피조물을 아끼는 기도의 삶에 많이 게을렀습니다. 무더위의 시간을 조금 벗어나 9월을 맞이했습니다. 기적처럼 살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신앙은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일상에서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의 실천이 하느님을 섬기는 건강한 실천입니다. 무겁고 질기며 길고 긴 형식인 사람의 전통은 끝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관습이 편견이 되고 가두는 감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물음이 없는 전통은 생기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은 늘 목마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힘 있는 자들의 착취와 억압의 전통을 뒤엎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보태는 것이 기도입니다.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와 묵상을 바탕으로 한 신앙은 시끄럽지 않습니다. 건강하고 맑은 세상을 위해 우리 자신들부터 기도하는 피조물이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건전한 우리의 생활입니다. 계명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생활 기도의 생활입니다. 기도하는 행복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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