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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8/28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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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주님, 일찍이 복된 아우구스티노 주교에게 부어 주신 그 정신을 주님의 교회 안에서 새롭게 일깨우시어 저희도 그 정신을 따라 참된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을 그리워하고 영원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게 하소서.

2024년 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8월 28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8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테살 3,6-10.16-18)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 오늘 복음
    (마태 23,27-32)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 오늘 말씀 카드
    (2테살 3,10)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2테살 3,10)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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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2테살 3,6-10.16-18
오늘 제1독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지시합니다.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형제는 누구든지 멀리하십시오.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16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온갖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언제나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17 
이 인사말은 나 바오로가 직접 씁니다. 이것이 내 모든 편지의 표지입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편지를 씁니다.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

 

 

마태 23,27-32
오늘 복음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8월 28일
장이태 경환프란치스코 신부

 

✚ 성 아우구스티노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3

✚ 강론시작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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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바오로 사도가 신자들에게 하였던 말이고, 특히 그 자신과 같이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권고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복음으로 생활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1코린 9,14)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폐를 끼치지 않고자, 그리고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그것으로 먹고살 때, 더구나 여유 있는 삶을 누릴 때,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하였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아모 7,12) 같은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다 하여도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복음 선포조차 돈벌이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정말 믿을 수 있어서 오해를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던 필리피 신자들에게서만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른 교회들도 자신이 복음을 처음 전하여 주었고 자신이 세운 교회들이었지만, 그는 그 교회들에서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분명히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복음 선포도 얼마든지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하여 쓰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려고까지 할 때는, 이것은 이미 걸림돌이나 오해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나는 바오로 사도보다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느라고 천막 만드는 일을 할 시간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 착각 또는 착각 행복

제 생각에 진짜 불행은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거나 더 나아가 행복한 줄 알고 계속 그렇게 살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불행을 키워왔음을 알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세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고, 호의호식에 떵떵거리던 권력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불행한 줄 모르고 살면 불행합니다.

저는 불행한 줄 모르고 행복한 줄 아는, 이런 행복을 <행복 착각> 또는 <착각 행복>이라고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인생이 이런 착각을 하며 삽니다. 이런 착각이라도 없으면 살기가 힘드니까 착각을 하는 것이요, 불행하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하는 소박한 행복을 살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불행은 불행일지라도 소박한 불행일 것입니다. 속으며 살고 속아서 산다는 사람에게는 인생이란 어차피 이런 소박한 행복과 불행을 살다가 가는 거지 뭐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런 불행에 대해서는 오늘 바리사이에게처럼 그렇게 거창한 불행 선언을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만일 그러신다면 소 잡는 칼로 파리 잡으시겠다는 식이 될 테니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불행 선언을 하시는 것은 소박한 불행이 아니라 남을 불행에 빠트리고 예언자를 죽이는 어마어마한 죄악의 불행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비판하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조상들이 죽였던 예언자들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며 자기들은 조상들과 다르다고 착각하지만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인데 사실 옛 예언자가 아니라 지금의 예언자, 그것도 나에게 예언을 퍼부어대는 예언자를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래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하느님의 사람인데,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왜 파견하시겠습니까? 하느님 계명을 잘 따른다면 왜 파견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언자는 하느님 계명을 어기는 자들, 특히 종교 사회 지도자들에게 파견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잘못을 꼬집으니 좋아할 리 있겠습니까?

다윗과 같은 사람이라야 즉시 그것을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회개하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개뼉다귀처럼 여기는 예언자들이 하는 개소리라고 여기지요.

사실 우리 삶에도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하면 예언자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언자처럼 거룩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 눈에 그야말로 개뼉다귀같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예언자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고, 그런 사람을 고마워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개뼉다귀같은 사람이 하는 쓴소리가 개소리가 아닌 하느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 곧 예언이 될 것입니다.

저도 머리로는 이것을 압니다. 그리고 억지로 그 예언을 받아들이기는 하고, 적어도 예언자를 죽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예언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고마워하는 데까지 아직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바리사이들을 보면 이런 점을 반성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자녀는 미운 부모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여자 주인공 테레자는 어머니를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어머니와 닮은 남자를 사귑니다. 어머니는 외도 하는 것을 딸에게 자랑할 정도였고 테레자를 무시하였습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비슷한 바람기가 있는 의사 토마시와 사귑니다.

토마시도 자기 내연녀인 사비나에게 테레자를 소개할 정도로 사랑을 가볍게 여깁니다. 어쩌면 테레자가 토마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둘이 반씩 양보하는 상황이 됩니다. 토마시는 결혼을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테레자는 자신도 외도하면서 토마시에게 미안함을 갖습니다.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습니다. 부모를 원망했지만, 결국 부모를 닮아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부모를 싫어하면서도 부모를 닮거나 자기가 싫어하는 부모와 같은 배우자를 만나는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태도에서는 분명히 부모 중 한 명과 경쟁을 하게 됩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어머니보다 우월해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해 그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고 믿는 딸은 자신도 술주정뱅이와 결혼해 어머니보다 잘사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누군가를 심판하면 이제 나는 그 누군가와 경쟁 관계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속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그들이 조상들을 비난하며 여전히 그들의 조상을 자기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조상들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조상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조상들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비난하며 부모처럼 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아예 그 족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족보를 주러 오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는 ‘새로 태어남’이 새로운 족보에 들어옴과 같습니다. 

영화 ‘오블리비언’(2013)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지구인을 위해 외계인과 싸운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를 만든 것이 외계인이고 그는 지구인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겉은 지구인이지만 조상은 외계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안의 조상을 모시고 삽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 대로 삽니다. 만약 ‘진화론’을 믿는다면 우리 조상은 누가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원숭이를 비웃지만, 실상 사는 것은 원숭이와 다름없이 비윤리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가 되고 싶은 전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참으로 착했지만, 소풍 가는 날 개울을 건널 때는 자신이 개구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영을 할 수 없는 전갈은 자기를 태우고 가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고 자신도 죽습니다. 자기 조상이 전갈이라고 믿으면 아무리 자기가 전갈의 조상들을 비난하더라도 그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개구리처럼 온순하여지려면 그냥 개구리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맞서서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그 부모의 수준밖에 안 됩니다.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려면 인간을 비판하며 그 비판하는 인간들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 결심해도 소용없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다른 부족한 면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조상으로 여기면 그들을 비난해도 그들의 습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갈비뼈로 탄생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냥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면서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신이 신처럼 살지 못하는 것만 보이며 인간의 죄의 습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비난하는 것으로는 절대 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따로 있을까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따로 있을까요? 따로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굳이 나눈다면 행복이라 여기는 사람과 불행이라 여기는 사람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 또 형체를 확인할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각자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행복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불행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지만 불행이라는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불행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은데도 행복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행복은 자기만 꺼낼 수가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라면서 사람과 환경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하지만, 외적인 것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복은 내가 마음 안에 만들고 보관해서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게 행복이다.” 
 
행복을 멀리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또 세상의 것에서만 찾는 것도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우리는 행복을 자기 마음 안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으며, 이로써 언제든지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부르면서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입으로 하느님을 끊임없이 외치고 있지만, 실상 하느님의 것을 찾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지만, 실상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했습니다. 위선과 불법은 하느님의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다.”라고 꾸짖으십니다. 무덤의 겉은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된 것 같지만, 무덤 속은 시신이 부패하면서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마음이 더럽고 추한 것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위선의 끝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마음에 품고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또 받아주시기에 더 큰 행복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불안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미래를 통제하길 원하는 데서 시작된다.

- 칼릴 지브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회개는 죄를 보지만 죄는 죄를 보지 못합니다. 악습으로 자신을 찌르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개도 다 때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시작은 하느님 말씀을 읽고 빛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더 좋은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어머니의 기도에 빚진 우리들 삶입니다. 

회개의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음이며 구원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죄와 함께 진솔한 고백으로 주님의 은총을 가득 체험합니다. 들어주시는 주님을 통해 행복한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둡고 무질서한 생활과 이별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 오신 예수님을 놓치지 마십시오. 주님께로 돌아선 삶은 예전의 삶과 다릅니다. 어제와 다른 우리들 삶이 펼쳐집니다. 

회개와 은총은 마음을 닦는 거기에서 자라납니다. 내면의 자유가 곧 외변의 자유가 됩니다. 진실로 회개한 한 사람 성 아우구스티노가 있습니다. 진실한 자기고백과 회개를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의 믿음이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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