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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8/14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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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오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느님, 거룩한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사제가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를 열렬히 사랑하여 영혼들을 돌보며 이웃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언제나 이웃에게 봉사하며 죽기까지 성자를 닮게 하소서.

2024년 8월 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8월 14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8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제 9,1-7; 10,18-22)
    예루살렘의 역거운 짓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 오늘 복음
    (마태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오늘 말씀 카드
    (마태 18,18)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8,18)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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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 9,1-7; 10,18-22
오늘 제1독서

 

예루살렘의 역거운 짓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주님께서는 


내가 듣는 앞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도성의 징벌이 다가왔다. 저마다 파멸의 무기를 손에 들고 나와라.” 


그러자 북쪽으로 난 윗대문 쪽에서 여섯 사람이 오는데, 저마다 파괴의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는 서기관 필갑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와서 구리 제단 곁에 섰다. 


그러자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때까지 자리 잡고 있던 커룹들 위에서 떠올라 주님의 집 문지방으로 옮겨 갔다. 주님께서는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 필갑을 찬 사람을 부르셨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그분께서는 또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아낙네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주님의 집 앞에 있는 원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분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집을 부정하게 만들어라. 그 뜰들을 살해된 자들로 채워라. 가거라.” 그러자 그들은 도성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쳐 죽였다. 

10,18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나와 커룹들 위에 멈추었다. 

19 
그러자 커룹들은 날개를 펴고, 내가 보는 앞에서 땅에서 치솟았다.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들도 옆에서 함께 나갔다. 그들이 주님의 집 동쪽 대문 어귀에 멈추는데,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 
나는 크바르 강 가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떠받들고 있는 생물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커룹임을 알 수 있었다. 

21 
그들은 저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도 넷인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같은 형상이 있었다. 

22 
또 그들의 얼굴 형상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보았던 모습,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마태 18,15-20
오늘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8월 14일
김정욱 마태오 신부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소개 00:06

✚ 미사시작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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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돌아갑시다.

오늘 독서에서는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나와”(에제 10,18) 떠납니다. 바빌론에 유배 가 있던 에제키엘이 본 환시이고, 예루살렘의 함락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서, 심지어는 성전 안에서도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선고하시고, 그 선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때 결국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떠나가시고 성전은 파괴됩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형제가 잘못할 때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가 “교회의 말도”(요한 18,17)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는 그를 더 이상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에서 교회는 푸는 권한만이 아니라 매는 권한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풀기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복음에서 내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 읽는 것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 그것이 차이를 가져옵니다. 예언자를 보내시어 경고하시고, 형제를 통하여 일깨우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 버릴 때, 남은 길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심각한 경우도 있습니다. 듣지 않을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아예 경고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면, 분명 다른 사람도 나에게 그렇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에, 귀를 막아 버린 나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잘못을 알려 줄 때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돌아봅시다. 이것은 나를 회심의 길로 이끌거나, 아니면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길로 이끌 것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돌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육신의 병보다는 영혼의 병을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어제 복음은 백 마리 양 가운데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인데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를 타이름으로써 그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라고 하시고, 그래도 안 되면 둘이 타이르고 최종적으로는 교회에 알려서 고쳐주라 하십니다. 

어제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서라도 한 마리를 찾으라고 하심과 같이 한 사람을 구하는 데 온 공동체가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한 사람이 잘못하면 저의 누나들 모두를 혼내셨답니다. 특히 동생이 잘못했을 때 애꿎게 언니들이 같이 혼났는데 그것은 언니가 되어 가지고 동생의 잘못을 막지 않은 것 때문이었답니다. 

이것은 저의 아버지만 그러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거의 모두 이렇게 자녀를 교육했지요. 예를 들어 동생이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데
그것을 본 형이 그런 동생을 놔두고 저 혼자 돌아왔다면 그 얘기를 들은 어느 부모가 그런 놈을 가만 놔두겠습니까? 제가 아버지라도 그런 놈은 무지막지하게 혼쭐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모르는 체할 형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만약 모르는 체한다면 그것은 무관심하기에 어떻게 되든 관심 없거나 미움, 질투, 시기 등으로 형제가 잘못되기를 바라거나 아무튼 사랑하지 않기에 모르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입니다. 육체적이나 경제적으로 형제가 잘못되었을 경우 그러니까 형제가 병들거나 부도가 나서 쫄딱 망하게 되었을 경우는 그것을 딱하게 여기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데 죄를 지을 경우,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을 경우, 이 경우에는 이상하게도 연민을 가지기보다는 분노하고 미워합니다. 

사실 육신이 병든 것보다 영혼이 병든 것이 더 불쌍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죄를 지은 것,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을 영혼의 병이라고 생각지 않기에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병인 죄를 육신의 병보다 더 안타깝게 생각하고, 더 고쳐주려고 해야 하고 어떻게든 그러니까 혼자 안되면 둘이서, 둘이서도 안 되면 공동체적으로 고쳐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합니다. 죄도 병입니다. 아니 죄가 더 안타까운 병이고, 죄야말로 신자인 우리가 더 고쳐줘야 할 병입니다. 

나한테 죄지은 것이 영혼의 병 때문이라고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면 그의 죄 때문에 같이 미워하고 분노하기보다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害)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면죄부와 대사는 어떻게 다른가?

오늘 복음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마태오 복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하늘 나라는 죄와 벌이 모두 사해져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교회에서 파문당하면 하늘 나라에서도 파문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개신교는 그러나 교회의 이 죄사함과 벌까지 면해주는 권한을 교회에 주었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며 가톨릭은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뜻의 ‘면죄부’를 팔아 바티칸 베드로 성당을 지었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교회에 죄와 벌의 모든 용서의 권한이 주어졌음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며 그 치유가 죄의 용서의 권한이 사람에게 주어졌음을 보여주는 표라고 하신 복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영화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고려장과 같이 70세가 넘으면 먹을 것을 줄이기 위해 부모를 산에 버리는 옛 일본 풍습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이 주저하는 것을 보고 일부러 몰래 튼튼한 앞니를 부러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머니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둘째 아들이 첫 경험을 하는 날 큰아들의 지게에 실려서 산에 오릅니다. 새로 태어나면 누군가 죽어야 하는 상징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한 일본의 전설에서는 자기 아내를 살리기 위해 노모의 간을 빼서 달리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혼령이 나타나 “천천히 가라. 넘어질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하느님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어머니를 버리고 왔더니 슬퍼하는 기색 전혀 없이 어머니의 옷을 이미 나누어 걸치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낳으셨고 교회를 통해 구원의 백성이 탄생하기를 원하셨다면 ‘다’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면죄부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면죄부는 죄를 사해준다는 뜻인데, 죄사함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는데 그 은총을 죄인에게 돈을 받고 팔 수는 없는 일과 같습니다. 죄와 벌은 개인의 몫이기 때문에 돈을 받고 죄를 사해준다는 식의 ‘면죄부’라는 말은 가톨릭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고 개신교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그들이 면죄부라고 말하는 단어는 라틴어 ‘은총의 문서’(Litterae indulgentiales)의 번역입니다. 이는 분명 ‘대사’(Indulgentia)와 차이가 있습니다. 대사는 본래 ‘은혜, 자비’의 뜻으로 로마 제국 시대 특별한 날에 이뤄지는 형벌의 사면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입니다. 

대사는 죄의 용서와는 관계없고 일정한 전제조건(기도와 회개, 성지순례, 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 등)을 채울 때 죄에 대한 보속을 감면하거나 전부 없애주는 은총입니다. 대사는 교회가 죽은 이들의 잠벌을 없애주려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의 신심의 발전에 있습니다. 

16세기에는 대사 관행이 널리 퍼졌고 종종 남용되었습니다. 일부 성직자, 특히 독일의 요한 테첼(Johann Tetzel)과 같은 인물은 베드로 성전 재건을 명목으로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사거나 미래의 죄에 대한 용서를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면죄부를 판매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방침이 아닌 당시 돈으로 잘못을 되갚는 게르만족의 전통과 결합한 잘못된 관행이었습니다.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공식적으로 은총의 문서 판매를 금지하였고 1570년에는 대사를 거래하고자 하는 자들을 파문시킨다는 조항을 추가하였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느님께서는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벌을 없애주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죄와 벌을 함께 용서해 주지 않는 이유는 죄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느껴봐야 죄의 무거움을 느끼고 다시는 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다윗이 병적조사를 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흑사병이 들게 하시는 벌은 주셨습니다. 교회가 벌을 사해주는 대사 제도를 시행하는데 은총은 돈을 주고 사고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제도는 결국 신자들의 신심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어떤 직무를 맡는 도중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직무에서 오는 열정과 성취감을 잃어버리는 증상, 곧 정신적 탈진을 소위 ‘번 아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번 아웃을 가장 많이 겪는 직업군 1순위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 서비스업 종사자일까요? 아니면 잠도 자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는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일까요? 또 일의 강도가 심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사람일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전업주부라고 합니다.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전업주부는 자기가 일의 강도와 시간을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번 아웃은 일의 강도와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노동량에 따른 보상 정도에 따라 번 아웃이 온다는 것입니다. 주부는 노동량 대비 보상이 가장 적은 집단이었습니다. 
 
보상은 단순히 급여의 많고 적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을 때, 일에서의 느끼는 보람을 느낄 때 보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삶에서 누군가에게 충분히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을 통해 얼마든지 힘이 되어 주고, 이에 따라 자기 역시 다른 이에게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로운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했을까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사랑을 거둬들이고,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해서 단절을 해버리고, 나보다 뛰어나다면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힘을 쓰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구원되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자매를 고쳐 주려고 서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올바르고 지혜롭게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보다 둘이나 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음을 합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잘못했다고 거부하는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하는 사랑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외로운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우리의 결정이고, 또 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완벽한 사랑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큰 박수로 응원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음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진실된 사랑은 없다.

- 조지 버나드 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있기에 사랑이 있기에 이 모든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더 무서운 무관심은 더 큰 재앙을 초래할 뿐입니다.

자기버림이라는 참다운 사랑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내용도 없는 껍데기에 마음 빼앗기지 않으며 화려하고 현란한 일회적인 구호에 속지 않으며 진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실한 뜻과 진실한 실천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아름다운 힘입니다.

자칫 공허해질 수 있는 사랑의 복음을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순교로 사랑의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것이 수도자의 삶입니다. 사랑의 참된 실행이야말로 자아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사랑의 참된 본질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노와 살인을 사랑과 평화로 바꾸어 놓은 한 사람의 수도자가 더 많은 울림을 줍니다.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는 것을 사랑으로 실천하는 마음과 뜻입니다. 마음과 뜻이 살아야 신앙도 살고 공동체도 삽니다. 말과 실천으로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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