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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6/24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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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

하느님, 복된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하느님 백성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준비하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영신의 기쁨을 주시고 모든 신자의 마음을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2024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6월 24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6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49,1-6)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제 2독서
    (사도 13,22-26)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57-66.80)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1,66)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루카 1,66)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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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49,1-6
오늘 제1독서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사도 13,22-26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루카 1,57-66.80
오늘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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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24년 6월 24일
김이주형 세례자요한 신부

 

✚ 성 요한 세례자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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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진정한 겸손을 보여 준 세례자 요한

오늘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은 우리에게 특별한 본보기가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었지만(마태 11,11 참조),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마르 1,7 참조).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사람임을 잊지 않았습니다(마르 1,3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 받기를 청하시자, 자신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분 뜻에 순종하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마태 3,14-15 참조). 

그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고(요한 3,30 참조), 마침내 자신의 말처럼 작아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마태 14,3-12 참조).

진정한 겸손은 나약하고 불리한 처지에 놓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으로 나약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참된 겸손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주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웁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맡은 봉사 직무가 곧 자신의 권위가 되고, 하느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교회 생활에 대한 경험들로 자신을 위한 봉사를 하게 됩니다.

그 반면 참된 겸손은 내적으로 강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덕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얻게 되는 내적인 힘은 자유롭게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함을 힘으로 삼은 겸손한 사람은 주님께 첫자리를 내드리고 자신은 그 뒤에 설 줄 압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이를 위하여 드러나지 않는 봉사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을 보여 준 세례자 요한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진짜 헛수고는?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헛수고. 

저는 헛수고를 정말 싫어합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제가 자주 듣는 얘기 중의 하나가 포르치운쿨라 행진과 전에 산청 성심원에서 했던 포르치운쿨라 축제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인상이 많이 남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하면서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아쉽다고, 지금 새로 프란치스칸이 된 분들에겐 그런 체험이 없어서 안 됐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수천 명이 모여서 그런 축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좋은 기억과 감명으로 남았다는 것이 한편 저의 보람으로 남지만 그것이 없어진 것은 다른 한편 헛수고로 남습니다. 

그래도 이런 것은 하나의 일이랄까 행사일 뿐이고, 전국적인 축제는 없어져도 어쨌거나 여기저기서 축제를 지내니 이 프란치스칸 운동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헛수고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더 헛수고로 느끼는 것은 사람 농사입니다. 수도원 안팎에서 인재를 양성하려고 한 저의 노력이 열매 맺지 못하거나 그런 노력이, 비록 일부에게서지만, 인정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비난받을 경우, 무척 마음이 아프고 헛수고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정말 제가 세속적이라는 표시이고, 그런 면에서 이런 헛수고 체험은 많을수록 좋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하지요.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저의 노력과 수고가 세속적으로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은 욕망과 욕심이 아직도 있다는 표시가 아닙니까? 

그러니 오늘 이사야가 얘기하는 헛수고 느낌은 제게 필요하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나 다른 성인들과 비교하면 헛수고 체험을 오히려 더 많이 하고 더 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그의 수도회 개혁 노력이 반대와 박해로 보상받고, 성 프란치스코도 자기가 시작한 운동이 제자들에게서 반대를 받았지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어땠습니까? 자기의 제자들은 다 자기를 떠나 주님의 제자가 되고 자기의 목숨은 한낱 계집의 앙심 때문에 날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 생각에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범인은 이 헛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지만 성인은 이 헛수고 체험이 하느님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보상이 없는 수고가 헛수고입니다. 그런데 진짜 헛수고는 이 세상에서의 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고, 그 이상의 하느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헛수고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과 하느님 체험이 없다면 진정 가련합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에게서 보상받지 않고, 세상에서 보상받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례자 요한이라는 거울을 통해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비혼주의 : 행복할까?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 탄생의 특이한 점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 뜻에 봉헌된 나지르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이름을 천사가 일러준 대로 요한이라고 지으며 처음에 의심했던 즈카르야까지도 아들의 사명의 협조자가 됩니다.

그러자 그동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였다가 입이 풀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 뜻을 따르는 이를 긍정하고 도와주기만 해도 그 사람의 수준이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즈카르야가 귀와 입이 풀렸다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전에는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이 의로움은 양심의 자유에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으나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의로움은 오로지 하느님 자비에서 옵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의로워진 이는 그 받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녀를 그렇게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양심은 ‘정의’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오리를 엄마로 착각한 길잃은 강아지’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어미를 잃은 강아지는 착해 보이는 오리에게 다가갑니다. 오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강아지를 태우고 돌아다닙니다. 강아지가 안정됩니다. 강아지는 오리를 어미처럼 따릅니다. 

시간이 흘러 강아지는 꽤 자랐습니다. 오리는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오리는 새끼들을 잘 돌보지 못합니다. 그러자 개가 대신 새끼들을 돌봐줍니다. 받은 게 있으니 주는 것입니다. 

모기들은 알을 낳아주는 데까지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알을 낳고 그만입니다. 개는 두 달 이상 어미가 돌봐줍니다. 그렇게 받은 만큼만 해 줍니다. 인간은 20년 동안 그렇게 합니다. 그래야 양심의 자유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면 언제 양심의 자유를 누릴까요? 나의 자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 때입니다. 나의 자녀가 신앙이 없고 하느님 뜻에 자기를 봉헌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평화롭다면 나 자신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카베오 하권 7장에는 일곱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나옵니다. 이 용감한 어머니는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자신의 일곱 아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율법에 충실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영원한 보상과 부활의 희망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약 자녀에게 생명을 구하라고 했다면 어머니는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나는 너를 하느님 자녀로 낳았는데, 너는 네 자녀까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못했느냐?”라고 혼이 날 것입니다. 

우리나라 미혼 남녀 15%는 자신은 비혼주의라고 하고 51.7%는 비혼을 생각 중이라고 하며 결혼을 꼭 하겠다는 청년들은 33.3%였습니다. 부모가 나를 키워주었는데도 나는 자녀를 안 키우겠다고 한다면 이제 부모와의 소통이 단절됩니다. 그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비싼 핸드백을 들고 맛있는 음식을 찍어 인스타에 올려도 마음은 공허하고 점점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원리입니다. 

오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자기 아들을 ‘요한’이라고 짓는 동시에 그들은 아들을 주님 뜻에 바친 것입니다. 주님 뜻에 바친다는 말은 순교자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부모들이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양심의 평화를 얻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자녀 출산율이 1위일까요?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께 자녀를 봉헌하는 것을 내 행복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사무엘을 주님께 바치기 위해 아들을 청한 한나를 생각해봅시다. 

그녀는 처음부터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고 아들을 주님께 청했습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음이 없이는 하느님 자녀로 태어난 자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음을 명심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심리학자들이 쥐를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의 기다란 두 통에 쥐를 각각 한 마리씩 넣었습니다. 한 통은 깜깜했고, 다른 통은 뚜껑에 바늘구멍을 뚫어 빛 한 줄기가 들도록 했습니다. 빛이 전혀 통하지 않는 통의 쥐는 세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빛 한 줄기만 비치는 통 안의 쥐는 무려 서른 시간을 견뎠습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만이 가득한 곳에서 살맛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안 좋은 상황에서도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덕분에 희망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나의 인생을 비칠 빛만 찾지 말고, 스스로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빛으로 다른 이가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에 우리 역시 또 다른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현실이 힘들어도 내일은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품어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라고 불리는 또 다른 빛도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빛이기에 가능합니다. 
 
오늘은 오실 주님을 준비한 요한 세례자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으로 이웃과 친척 모두 기뻐합니다. 단순히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는 자애로우시다.’라고 하지요. 그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지금 갓난아기인 요한 세례자에게, 그리고 요한의 명명식 때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내려서 불신으로 말하지 못했던 그가 혀가 풀려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했던 것은 하느님 찬미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았기에 찬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은 사람은 모두 기쁨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줄기 빛이신 하느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 받아야 할 빛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받아야 살 수 있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또 그 희망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먼저 핀 꽃은 먼저 진다. 남보다 먼저 공을 세우려고 조급히 서두를 이유가 없다.

- 채근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무더위 속에 맞이하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끊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인간의 셈법과 하느님의 자비는 언제나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넘치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었습니다.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본마음이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통해 드러납니다. 사랑과 구원으로 엮어지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삶의 진정한 기쁨입니다. 우리 앞에 내려앉은 아기의 탄생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탄생입니다. 

한 사람을 통해 점점 밝아지고 한 사람을 통해 점점 어두워집니다. 하느님 친히 요한 세례자를 통해 희망이 되십니다. 하느님이 아니셨다면 불가능한 일들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집니다. 하느님밖에는 딱히 물어볼 대상이 없습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은 가장 값진 세례로 이어지며 주님을 드높이는 피의 순교로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온전히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하느님께 올려지는 탄생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는지를 묻는 새로운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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