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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2/2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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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상을 다스리러 주님이 오시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주님, 사람이 되어 오시는 외아드님의 탄생을 기뻐하오니 주님 백성이 드리는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그분께서 위엄을 갖추고 다시 오실 때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게 하소서.

 

2023년 12월 21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2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자] 12월 21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아가 2,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아가 2,8) 성경말씀카드 아가서 성경구절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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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2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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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아가 2,8-14)
    보셔요, 내 연인이 산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 오늘 복음
    (루카 1,39-45)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2월 21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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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임마누엘, 저희 임금님, 어서 오소서. 주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소서.

 

 

루카복음
1장 39-45절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2월 21일 (목)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홍웅기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05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22일 (금)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김유철 요한 보스코 신부

 

📌 미사시작 05:48

📌 강론시작 13:37

 

 

 

명서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21일 (목) 10:00
명서동성당 미사
임태근 모세 신부

 

📌 미사시작 02:02

📌 강론시작 07:35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21일 (목) 11:00
남양성모성지 미사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미사시작 32:46

📌 강론시작 43:09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21일 (목) 16:00
팔로티회 분당
김지학 요셉 신부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자기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처럼

 

늙은 나이에 아들을 잉태한 엘리사벳, 그리고 처녀의 몸으로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한 두 여인의 아름다운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서둘러’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그도 하느님의 권능으로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는 친척이 있다는 것이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을까요? 한시라도 빨리 엘리사벳을 만나 서로 체험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유다 산악 지방까지 가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마리아는 주저하지 않고 잉태한 몸으로 여행길에 오릅니다.

그렇게 먼 길을 달려와 준 마리아를 본 엘리사벳은 또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는 임신하고 무려 다섯 달이나 숨어 지냈습니다.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적인 사건을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 상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두 여인의 만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이 잉태한 아기들, 곧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첫 대면이기도 한 것입니다. 메시아와 그의 선구자, 그들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만났고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주님의 어머니를 마주한 사실에 기뻐하고, 태중의 아기 요한도 태중의 아기 예수님의 방문에 기뻐 뛰놉니다. 엘리사벳과 요한처럼, 이제 곧 예수님을 만나게 될 우리도 기뻐합시다. 아가서에서 자기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처럼 말입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우리를 보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뛰어오시는 그 ‘연인’을 기쁘게 맞이할 채비를 서두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엘리사벳 성녀나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던 믿음

 

몇 년 전, 갑곶성지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미사 후에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혹시 제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미사 때 계속 저만 보고 계셔서요.” 
 
이 자매님이 누군지 알 수 없었습니다. 처음 뵌 분이었고 또 미사 중에 특별한 행동을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이 자매님을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이 자매님은 제가 미사 중에 자기만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예전에 교수법 강의를 들을 때, 연극 배우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은 객석에 누가 앉아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조명이 배우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맨 뒷자리를 바라보면서 연기하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자기와 눈을 마주치며 연기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시선은 배운 대로 늘 맨 뒷자리였습니다(사람들은 제 시선을 피하려고 맨 뒤에 앉지만, 사실 제일 잘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착각 속에 삽니다. 운전할 때 내가 가는 차선만 느리게 가는 것 같고, 줄을 서면 나의 줄만 짧아지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삶에서 하는 커다란 착각도 있습니다. 나만 불리한 조건 속에 사는 것 같고, 고통과 시련은 나만을 찾아서 오는 것 같다는 착각입니다. 나만 불리한 조건 속에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런 생각의 착각 속에 있을 뿐입니다. 착각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께서 만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이신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찬양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셨고, 그 믿음을 통해 가장 복된 분이 되셨다는 찬양이었습니다. 사실 엘리사벳 성녀는 나이 많은 상태에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울 수 있으며, 그래서 세상의 이목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라면서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계셨기에, 더 큰 믿음 안에 있는 성모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 있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삶을 원망하는 착각의 삶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도 엘리사벳 성녀나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던 믿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 안에서 자기 삶이 새롭게 보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도 잘살고 있구나. 나의 삶이 그렇게 팍팍한 것은 아니구나….”.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 잠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기를 긍정하려면 성당 다녀도 소용없는 이유

 

저에게 지금 교황님이 거의 이단이라는 식의 카톡을 보내오는 분이 계십니다. 세례명도 있고 신자인데 어떻게 사제에게 계속 교황님을 거의 악마처럼 여기는 이들의 글을 보낼까요? 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하늘 나라 열쇠를 지닌 베드로가 계시고 사도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교황이시고 사도들은 주교들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들 안에 은총이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며 성체나 고해성사한다면 효과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은총은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만의 것입니다.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아프다며 돈 요구하는 집 나간 엄마, 도와드리는 게 맞을까요?’라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사연자는 초4 때 엄마가 집을 나가셨는데, 최근에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운을 뗍니다. 엄마는 이혼했을 때 한 달 정도 아빠가 큰 사고를 당해 자신들을 한 달 동안 돌봐줘야 했는데, 병원에 있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아빠에게 애 돌봐주는 값으로 100만 원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또 고3 때 약 3개월을 함께 생활했는데 같이 살던 집 보증금을 다 까먹었다며 천만 원을 달라고 요구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천만 원, 언니는 300만 원 주고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지막 말처럼 딸의 양심을 건들며 돈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도와주지 못해 엄마가 죽으면 장례식에서 친척들에게 날아올 따가운 시선이 두렵다고 합니다. 

서장훈은 “평생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으면서 고작 스무 살짜리 딸한테 겨우 석 달 생활했다고 천만 원을 내놓으라는 엄마가 사람이냐?”라며 크게 격분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일한 부모인 엄마를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는 사연자에게 서장훈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너도 네 삶을 찾아.”라고 충고합니다. 사연자는 잘 받아들이고 기분이 좋아져서 떠났습니다. 

은총을 받으려면 자신이 찾아온 사람 안에 은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부정하고 그 말을 따릅니다. 만약 자기가 옳다는 마음으로 은총을 받겠다면 어떨까요? 절대 그 은총이 은총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이런 사연도 나왔습니다. 사연자는 14년 동안 서울 올라와서 한 달에 약 천만 원씩 열심히 일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 결혼도 못 하고 나이가 마흔이 다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속초 고향에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돈을 서울에서 더 벌어야 할지가 고민입니다. 

보살들은 묻습니다. 지금 돈을 얼마나 저축해 두었느냐고. 의외로 적습니다. 14년 동안 모은 돈이 고작 1억 5천입니다. 사기당하고 투자를 잘못해서 다 날려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집이 세 채나 있고 가게를 차릴 땅도 있습니다. 보살들은 어머니의 그 땅이 탐나서 그러는 것 같아 의심스럽습니다. 

1억 5천으로는 건물을 짓고 식당을 차리기에도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한 달에 천만 원씩 버니까 조금 더 자주 어머니를 찾아뵈라고 조언합니다. 그러자 상담하러 온 사람은 어머니가 자주 오는 것도 귀찮아하신다고 말합니다. 아프신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는 제주도와 일본 여행이 계획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온 것일까요? 자기가 이런 처지라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것밖에 안 됩니다. 또는 귀찮아하는 어머니가 땅을 자신에게 주고 좀 도와주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보살들을 찾아왔다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형이 둘이 있는데 한 명은 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삽니다. 

아무리 조언해주어도 다 튕겨내는 이 다 튕겨내는 이 사람에게 서장훈과 이수근은 말투부터 고치라며 “그렇게 답을 잘 알면서 여길 왜 왔어. 네가 알아서 해!”라고 소리 지릅니다. 

위 여자 청년은 “엄마 걱정하지 말고, 네 행복을 찾아!”라고 하는 말에 위안받고 웃으며 갔습니다. 그러나 아래 남자는 욕만 먹고 갔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래 사람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왔고 위 청년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은 알 수 없어서 해답을 들으려고 온 사람입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상담하다 보면 많은 경우 자신의 옳음만 어필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해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싶어 합니다. 은총을 주려는 이 앞에서 자기를 긍정하면 은총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말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순종과 함께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버리라는 말과 단어가 다릅니다. 나를 부정해야 주님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나를 긍정하는 이에게는 성령께서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못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총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님 안에 하느님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자기를 부정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주인만 섬길 수 있고 그래서 하나의 ‘나’만 긍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긍정하려는 이들은 성당에 나와도 은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긍정을 위해 이용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 만남은

 

오늘 아가서 말씀은 연인이 오기를 고대하고 기다리는 여인을 그립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얘기이고, 그리고 태중의 두 아기 곧 주님과 세례자 요한이 만나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연인 간의 만남과 같다는 뜻일까요? 그런데 기쁨과 설렘이라는 면에서는 두 만남에 공통점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두 여인의 만남이 어떻게 연인들의 그 기쁨과 설렘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연인의 그것과 같다면 의미상으로 너무 가볍습니다. 사실 오늘 아가서의 표현들은 너무 간지럽습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제 생각에 두 여인은 연인이 아니라 동지에 가깝고, 그러니 그 만남도 연인들처럼 사랑의 만남이 아닐 것입니다. 

우선 연인처럼 사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공적인 만남이고 그러니 우연이나 인간적인 동기가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은 만남입니다. 그래서 저의 만남을 생각게 됩니다. 

나의 만남에서 주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지. 

사적인 만남이 주를 이루는 것은 아닌지. 

공적이고 구원을 위한 만남은 얼마나 되는지. 

만남 이전에 나라는 사람은 혹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닌지. 

수도자가 되어 그저 자기 성취나 자기 복음화에 급급하고 그래서 세상의 복음화는 먼 나라 얘기인 것처럼 살지는 않는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더라도 혹 혼자 애쓰는 나는 아닌지.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서로 협력하는 관계는 얼마나 되는지. 

세상의 복음화는 너무 거창하니 공동체 건설을 위해서라도 서로 협력하는 관계는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많은 눈(雪)이 하얗게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하느님 안에 만남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더 깊어지는 만남이 있습니다. 만남을 깨어나게 하시는 만남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변명과 우리의 책임을 뛰어넘는 은총의 만남이 있습니다. 

길을 내는 것도 만남이며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도 만남입니다. 사람의 기쁨은 만남의 기쁨으로 확연히 드러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러 가듯 하느님께서 우리자신을 만나러 기쁘게 오십니다. 사람들 속에서 참된 기쁨을 구하시며 참된 기쁨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만남은 함께하기에 기쁜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행복이며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행복입니다. 기다림의 본질 또한 만남입니다. 우리의 만남 또한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하느님의 기쁨을 나누는 행복한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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