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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9/26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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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2023년 9월 26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9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다시 짓게 하여라. (에즈라기 6,7)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다시 짓게 하여라. (#에즈라기 6,7)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에즈라기 6장 7절

오늘성경구절이미지_23092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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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9월 26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루카복음
8장 19-21절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26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용준 니콜라오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39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26일 (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 미사시작 08:30

📌 강론시작 17:46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26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17

📌 강론시작 06:47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26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4:19

📌 미사시작 1:03:35

📌 강론시작 1:10:2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하느님 모시기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에즈라기의 말씀을 듣습니다. 에즈라기는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수많은 유다인이 조국을 떠나 바빌론에서 유배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십 년가량 지난 뒤,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가 유다인들의 귀향을 허락하는 칙령을 반포하면서(에즈 1장 참조), 유배자들은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에즈 2장 참조).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의 우선적 과제는 무너진 주님의 집을 복구하는 일, 곧 폐허가 된 그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재건 공사를 시작하며 그들이 느꼈던 벅찬 감격과 기쁨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주님의 옛집을 보았던 많은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 주님의 집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 그러는가 하면 다른 많은 이들은 기뻐하며 목청껏 환호성을 올렸다”(에즈 3,12). 

그러나 그 뒤 공사는 순조롭게 흘러가지 못합니다. 그들을 시기하던 적대자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이런저런 일을 꾸미면서, 공사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어야 하였습니다(에즈 4―5장 참조). 

그러나 예언자들의 격려로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중단되었던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성전 건축을 무사히 마친 유다인들이 성전 봉헌식을 장엄하게 거행하고, 성대하게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성전을 향한 그들의 열정을 묵상하여 봅니다. 유다인에게 성전은 하느님께서 임마누엘, 곧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 모시기’였습니다.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하느님과 이전에 맺었던 관계를 되찾고자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새 백성이 된 우리도 ‘하느님 모시기’를 그 어떤 일보다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신비는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을 영성체로 모시는 바로 우리 각자가 이제 하느님의 새 성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직업과 소명에 대한 차이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다. 직업으로 일하면 월급을 받고, 소명으로 일하면 선물을 받는다.” 
 
직업과 소명에 대한 차이를 명확하게 일러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봉사와 희생은 직업일까요? 아니면 소명일까요? 당연히 ‘소명’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왜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는가?”라면서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직업의 측면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관점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먼 훗날 하느님 곁으로 가게 될 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족을 데리고 갈 수 없으며, 또 애지중지했던 나의 귀한 소장품 역시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자랑스러워했던 자신의 지위는 어떨까요? 이 역시 모두 내려놓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모두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해야 합니다. 즉, 직업의 측면보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소명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명의 측면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선물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은총’이라고 합니다. 은총의 삶은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면서 주님 관점으로 살게 될 때 가능합니다. 가장 힘 있고, 가장 높으신 분의 선물이 형편없는 것일까요?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가장 훌륭한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군중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전해 줍니다. 예수님의 가족이니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세상의 관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관점은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를 뛰어넘습니다. 하늘 나라에 단순히 친한 사이인 인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만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관점이 아닌, 소명의 측면이 가득한 주님의 관점이 필요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모두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그저 힘만 든 것 같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가장 큰 선물을 하느님 나라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언제나 첫 미사처럼, 마지막 미사처럼, 유일한 미사처럼 정성을 다해 봉헌하라.

- 사제는 미사를 봉헌할 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유부단함 해결법 : 고슴도치로 살 것인가, 여우로 살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왔지만, 이렇게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정말 많은 반론이 나올 수 있겠지만,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이가 없기에 성모님은 기분 나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지극히 단순한 사고를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아버지의 뜻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결정도 쉽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 한 어머니가 “밥 먹어라!” 하고 불렀는데 뛰어가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만이 그 어머니의 자녀들입니다. 이렇듯 부모의 뜻은 자녀들을 구별하는데 핵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은혜를 받았기에 부모의 뜻을 따르는 존재가 됩니다. 결국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형제로 보아야지, 육체적 형제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죽음과 함께 영원히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너무나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오늘 예수님도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냐, 가족이냐의 문제로 갈등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단호합니다. 그분은 아버지 뜻, 한 가지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내 뜻에 치우치면 우유부단해지고 그러다 잘못된 선택을 하여 평생 후회하게도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하나만 하면 됩니다. 

영화 ‘레이버 데이’(노동절)은 한 10대 아이가 새롭게 결합한 부모의 뜻에 어떻게 적응해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야기는 1980년대 후반 노동절 주말 동안 뉴햄프셔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엄마 아델은 10대 아들 헨리와 함께 살고 있는 우울한 미혼모입니다. 그녀는 헨리를 낳고는 네 번이나 연속으로 유산하며 극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남편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델과 헨리가 쇼핑하던 중, 피를 흘리고 있는 프랭크라는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옵니다. 프랭크는 탈출한 죄수로서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도록 설득합니다. 아델은 두려움 때문에 동의합니다.

프랭크는 아내와 자기 아기를 죽인 살인자처럼 보이지 않게 매우 부드럽고 섬세합니다. 사실 프랭크의 아내는 바람을 피우며 남편을 조롱하고 있었고 부부싸움 중에 사고로 아내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아기는 욕조에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부부싸움 하다가 배우자와 자녀를 죽인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집 주변을 수리하고, 헨리에게 야구를 가르치고, 조금 있으면 상하게 될 복숭아들을 이용해 파이를 만들어줍니다. 프랭크는 지명수배된 상태였기 때문에 두 모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델이 헨리를 막습니다. 헨리도 프랭크가 싫지 않습니다. 하지만 프랭크가 엄마와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자신은 점점 소외되는 것처럼 느낍니다. 프랭크는 둘을 데리고 캐나다로 도망을 치자고 합니다. 그러면 헨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친구와 헤어져야 합니다. 

헨리는 갈등합니다. 돈을 챙기고 소지품을 챙기는 상황에서 프랭크는 이혼한 아빠, 경찰관과 은행, 여자친구와 동네 주민들에게 자기 집에 탈옥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와 프랭크가 사랑하는 것을 갈라놓을 수 없어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떠나려는 찰나 옆집의 신고를 받고 경찰들이 들이닥칩니다. 프랭크는 아델과 헨리를 묶어놓습니다. 인질로 해야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 5일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하며 잡혀갑니다. 

시간은 흘러 헨리는 여자친구와 결혼도 하고 프랭크가 알려준 방식으로 복숭아 파이를 만들어 유명한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잡지에서 본 프랭크는 헨리에게 편지를 쓰고 엄마를 만나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헨리는 엄마가 같은 곳에 살고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편지를 써 줍니다.

25년이 지나 프랭크는 아델을 찾아옵니다. 헨리는 더는 엄마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함께 마지막을 걸어갈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헨리가 자신을 생각할 때는 우울증 엄마와 범죄자 새 아빠의 결합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뜻에 순종할 때 둘은 결합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기에게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부모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에 순종하는 게 전부입니다. 그 사랑은 나를 버리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 사랑의 법에 모든 이의 뜻이 될 때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우리는 가끔 선택 장애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고민한다고 해 봅시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아무거나 동전 뒤집기 해서 시킵니다. 결국 선택 장애가 충동적인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짜장면을 먹으며 ‘차라리 짬뽕시키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고 고민합니다. 

결정 장애나 충동적 결정은 같은 데서 나옵니다. 다 자기의 뜻을 지나치게 따르기 때문입니다. 두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데 있고 그다음은 욕심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이들은 내 선택이 틀려서 내 자존감이 상처 입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결정을 두려워하다 시간이 촉박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것을 선택해서 잃게 되는 다른 것들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저하다가 다 잃게 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가 ‘나’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한 유일한 해결법은 ‘순종’입니다. 그리스 격언에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고슴도치를 잡아먹기 위해 많은 수를 고안해냅니다.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봅니다. 고슴도치는 여우가 다가오면 귀찮아하면서도 한 가지만 합니다. 몸을 공처럼 둥그렇게 웅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우는 가시에 찔려 다른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일단 후퇴를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미사를 열심히 해야 한다든지,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든지,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든지, 선행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여우가 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나만 생각하는 고슴도치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만 물으면 그만입니다. 그 뜻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만 생각하는 고슴도치가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리아처럼 하면 어머니가 된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주님의 모습과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도 주고 도전도 줍니다. 

우리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고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의 종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종이 아니라 어머니와 형제가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런데 어머니와 형제가 되는 데 공짜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뜯어보면 당신 어머니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야 어머니와 형제가 된다고 하시니 공짜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영광이자 도전입니다. 이것은 마치 챔피언에게 도전할 기회가 영광스럽게 주어진 것과 같이 대단한 영광이요 행운이요 기쁜 일이지만 도전의 어려움이 앞에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 그것은 어떤 도전이고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것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주님의 종이라고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해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되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실천하면 어머니가 된다는 말씀은 실천하기 어렵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어머니가 되라는 초대를 마리아처럼 받았으니 마리아처럼 응답하여 주님의 어머니가 될 것인지, 마리아처럼 하면 어머니가 된다는 도전을 받아들일 것인지, 결단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말씀은 어머니같이 혈육같이 우리의 피와 살이 됩니다. 말씀을 잃어버린 혈육은 집착이 되고 실행을 잃어버린 말씀은 언제나 요란스럽습니다. 분리될 수 없는 말씀과 실행입니다. 

말씀의 가치는 실행의 가치입니다. 말씀의 뜻을 온전히 실행으로 새기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있어야 할 자리를 압니다. 말씀은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말씀의 진가는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살아내는 사람들로 드러납니다. 가족도 가정도 말씀의 뼈대와 실행의 살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 해야할 일은 모두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중심은 말씀과 실행뿐입니다. 

서둘러 주님께 가야 할 우리의 회개입니다. 회개 보다 더 좋은 실행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회개로 말씀을 단단히 잡고 따라갑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발견하고 실행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평화를 지키는 것도 말씀의 실행입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실행하는 사랑의 오늘 되십시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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